["미래를 향한 회상"-진보정치 운동사 19]중앙지도력 취약 ‘선거연합당’ 머물러

90년대 민주주의 좌초의 상징 민중당(2)

▲ 1992년 2월 1일 민중당과 가칭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의 통합선언 기자회견.

김원/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창당 이후 민중당은 민중운동 내부 소수 세력으로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구체적으로, 당시 비(반)합법적 활동을 운동의 중심에 둔 세력은 당시 합법정당 자체를 거부했으며, 80년대 민중운동의 중요 부분이던 종교, 학계, 노동계의 민중당에 대한 지지는 거의 부재했다.

더불어 창당 시기 51개의 지구당 규모는 전체 2백24개 지역구에 비춰 볼 때, 1/5정도에 불과했고, 지구당의 자금규모나 지구당 위원장의 인지도 및 지역 지지기반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민중당 안팎에서 제기된 민중당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대표적인 비판은 ‘개량주의’―민중당을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실무자회의 사건”이다. 오세철 등 당내 활동가들에 의해 제기된 비판에 대해 당 지도부는 ‘제명’이라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고, 이는 민중당 지도부의 개량화·우경화 노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더욱 강화시켰다.

하지만 “민중 주체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민중당의 강령을 ‘사상투쟁’의 시각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느 정도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91년 소연방 해체 이후 정치조직의 이데올로기 문제는 민중당만이 아닌, 모든 변혁운동 조직이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화두였다.

따라서 민중당 노선을 이데올로기적 정통성 맥락에서 비판하는 것이 90년 당시 민중당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민중당은 민중운동내 일부 세력이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기한 것이지, 전위당과 같은 변혁 사령부로서의 조직 위상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런 비판은 민중당 위상에 대한 과도한 해석에서 기반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민중당은 내부 조직구성에서 다양한 정치조직 연합으로 이뤄졌고, 이는 당의 통합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후 민중당에 합류한 인노련을 포함해서 여러 정치조직들은 민중당을 비합법정치조직의 전술단위로 사고했고, 인노련은 한 문건을 통해 민중당에 대해 “후일 우리당이 합법성을 쟁취할 때, 민중당에 심어 놓은 우리의 조직, 또는 민중당 좌익은 우리의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다”라고 진술했다.

이러한 정치조직들의 민중당에 대한 관점은, 후일 정태윤이 민중당의 비합정파에 대한 평가에서 “당시 민중당 안에는 지도의 중심을 당의 공식 지도부가 아닌 외부의 정치 지도부에 두는 전통적인 비합법 정파 조직들이 여러 개 들어와 있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민중당의 정상적인 발전에 참으로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고 말한 것에서 드러나듯이, 당내 정파의 분립은 중앙당의 지도력 약화와 지구당의 ‘분권적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이는 92년 총선 실천 과정에서 보여지듯이, 중앙당의 통일적 지도 결여와 지구당의 각개약진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 내부 조직적 갈등은 정당으로서 통합력보다 당을 ‘선거연합’적 형태로 귀결시켰다.


민주연합론, 진보정당운동에 찬물

문제는 당내 문제만이 아닌, 전국연합 등과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이 문제는 92년 총선을 앞둔 전국연합의 총선 방침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91년 12월 전국연합은 총선 관련, ‘국회의원 총선거 대응방침’에서 민주당을 포함, 모든 민주세력과의 공동 선거강령을 마련,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구성을 제안한다.

또 전국연합 후보를 추동, 제도야당과의 연합공천을 통해 후보단일화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이는 민주당의 완강한 거부로 무산된다. 하지만, 연합공천의 무산 이후에도 전국연합은 민중당과의 연합이 아닌, 전국연합 후보의 독자출마를 선언, 민중당의 고립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전국연합의 실천은 선거 국면 민중운동 분열이라는 문제 이외에도, 민중당의 선거 참여 효과를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스스로 표방한 민중운동의 정치적 대표체라는 위상과는 정반대의 과오를 범했다.

이처럼 민주연합론(혹은 독자정치세력화 반대론)은 언제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야당과의 연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실패이후에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병행’이라는 교묘한 언술로 진보정당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프티 부르주아지 지지 운동의 아류였다.


2. 한노동과의 통합, 통합 민중당

하지만 91년 하반기 노동운동 세력 내부에서 ‘노동자정당’ 결성의 움직임이 가시화됐고, 이는 진보정당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그 흐름은 바로 “한국노동당” 창준위(이하 한노당) 혹은 “노동자정당창당추진위”(이하 노정추)였다. 3파 연합이라고 불린 노동자운동 내 “한국사회주의노동당” 그룹은, 91년 12월을 즈음해 비합법적 전위정당 노선을 실천적으로 폐기하고 공개적인 노동자정당 노선을 전격 선언하며 ‘지상’에 등장했다.

그러나 민중당 그리고 진보정당 운동에 있어서 노정추의 출현은 진보정당 운동의 장미빛 희망만을 던져주지는 않았다. 민중당과 노정추의 통합 과정은 민중당의 확대 강화라는 측면이 존재한 동시에, 민중당과 노정추 사이 진보정당에 대한 시각차를 확인하는 균열·갈등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한노당의 민중당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한노당은 자신이 민중당의 최대주주임을 자임하며, 한노당 활동가를 재조직, 민중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개량화된 민중당을 올바르게 ‘견인’하겠다는 태도를 초기부터 표명했다.

하지만 실제 통합 과정은 한노당의 의지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애당초 한노당은 기대한 만큼 노동조합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고, 잇따른 지도부의 구속 등은 민중당과의 통합이라는 길을 걷도록 강제했다.

실제 양 조직 사이 통합에서 논란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라기 보다, 양 세력간의 구체적인 힘 겨루기 과정이었다. 이는 애초 민중당을 ‘견인’하겠다는 한노당의 구상과는 큰 차이를 지녔다. 이는 비합법 변혁운동이 합법정당이라는 형태로 공개화될 때 드러나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한노당은 핵심 조직원이 4백여명, 지지자 대오가 4천여에 달했지만 진보‘정당’을 운영·구성하기 위한 자원과 능력에선 취약했다. 이는 실제 통합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초기 한노당의 통합 조건은, 노동계급에 기초할 것, 당명은 노동당으로, 마지막으로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해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민중당은 김문수, 신철영 등으로 구성된 실무대표를, 한노당은 이용선, 전성, 최봉근 등으로 구성된 교섭대표를 선임했지만, 협상은 난항에 빠졌다.

이에 한노당측은 민중당내 좌파세력과 민중운동 좌파세력을 규합, 독자적 노동자당 건설을 준비한 ‘제2단계 전략’을 구상했다. 하지만, 지지 혹은 중립을 예상한 전노협의 반대와 동참을 예견했던 민중운동 및 좌파진영의 신노선에 대한 반대, 조직 실사 결과 실제 한노당이 독자적으로 창당 가능한 지구당이 21개에 불과한 조직적 취약성 등의 현실은 독자창당 구상을 무산시켰다.


난항끝 총선 50여일전 통합

더군다나 한노당측이 작성한 3차례에 걸친 공문과 “민중당내 민주주의 수준이 대공장 민주주의 수준보다 못하다, 민중당의 지도부 구성 방법은 운동권의 부정적인 모습인 동창회적 관습” 이라며 한노당측 지구당에서 중앙당에 보낸 팩스 등은 양측의 불신을 심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면에서 양측의 통합과정은 민중당과 한노당의 대립인 동시에, 민중당 지도부와 한노당을 지지하는 당내 세력간 ‘당내 갈등’의 이중적 성격을 지녔다.

15차례에 걸친 통합 무산 위기 및 합의를 반복한 결과, 1월 30일 ‘통합기자회견문’이 작성되기에 이른다. 통합 과정을 볼 때, 민중당의 경우 한노당과의 통합을 통한 세의 확산이란 잇점이 존재했지만, 역으로 통합이 결렬될 경우 한노당을 지지하는 좌파활동가의 대거 탈당 등의 난점도 존재했다.

결국 민중당과 한노당이라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운동의 역사를 지닌 조직은 총선을 50일 정도 남기고 통합했고, 그 실제 과정은 한노당이 민중당에 흡수되는 형식이 짙었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92년 총선에서 독자세력으로서 자리잡는 대중정치실천만이 남았던 것이다.
[ 109호] 10.28 ~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