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점거 운동, 강제 퇴거를 막고 주거권을 지킨다

2024년 5월 5일, PAHC 회원들이 카탈루냐 만레사의 재점거된 건물 밖에 모여 점거 1주년을 축하하고 있다. 출처: PAHC

내가 스페인에 처음 도착했을 때, 부동산 중개인은 바르셀로나 외곽에 있는 노동계급의 도시, 내 친구가 사는 만레사에 가지 말라고 말했다. “거기 가지 마라. 별로 좋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대신 [북쪽의 휴양지] 코스타 브라바로 가라.” 나는 개의치 않고 다음 날 기차를 타고 만레사로 갔다. 역에서 나서자마자 망치와 낫의 그래피티와 반자본주의 구호를 보고, 왜 부동산 중개인이 만레사에서 불편함을 느낄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중심가로 걸어갔다. 바람이 부는 좁은 골목길과 현지 주민들이 어슬렁거리는 매력적인 광장을 지나, 한때 수녀원이었으나 활동가들이 점거해 사회적 센터로 탈바꿈한 아테네우 라 세키아(Ateneu La Sèquia)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기도하는 수녀들 대신, 나는 그날 오후 새로 설립된 카탈루냐 국가 경찰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일지를 두고 토론하는 소수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들 왼편에는 사회적 센터와 그곳에서 활동하는 24개의 단체를 소개하는 안내문이 벽에 붙어 있었다. 아테네우 라 세키아는 비종교적이지만, 반자본주의,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환경주의, 자결권, 그리고 LGBTQ+ 투쟁에 대한 지지를 기본 가치로 운영되고 있다. 이 여러층의 거대한 건물에서 각 단체는 고유의 회의실을 갖추고 있으며, 그 외에도 회의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요가 스튜디오,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 햇살이 잘 드는 예술 스튜디오, LGBTQ+ 방, 안젤라 데이비스의 벽화가 그려진 널찍한 테라스, 그리고 공사 중인 많은 방들이 있다.

그 단체 중 하나는 PAHC(모기지와 자본주의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한 플랫폼, Platform for those Affected by Mortgages and Capitalism)로, 만레사 내 주택 관련 문제에 집중하는 단체이며, 전국적인 모기지 피해자들을 위한 플랫폼(PAH) 네트워크의 일부로 활동하고 있다. PAH는 2009년 바르셀로나에서 결성되었으나, '15M' 이후 새로운 의미와 인기를 얻었다. '15M'은 정부의 긴축 정책과 은행 구제 금융에 대응해 2011년 5월 15일에 시작된 광장 점거 운동이다.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고 모기지를 갚지 못해 퇴거당할 위기에 처했으며, 아파트의 가치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은행에 빚을 지기도 했다.

“우리는 대출 갈등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조직된 사람들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완전한 주거권 단체로 발전했다,” 내 친구이자 PAHC의 조직자인 잘로 로르사 플라네스가 내게 말했다. “이제는 대출 문제를 다루기보다 건물을 점거하는 경우가 더 많다.”

PAHC는 매주 일요일 라 세키아에서 일반 모임을 열어 단체의 목표를 새 참석자들에게 소개하고, 합의에 기반한 결정을 내리며, 전략을 논의한다. 또한, 갈등 해결과 그룹 역학 등 특정 주제를 더 깊이 논의하기 위해 또 다른 주간 모임을 열고, 매년 7월 말에는 연례 총결산 모임을, 9월에는 내년 계획을 세우기 위한 모임을 가진다. 그리고 내년 2월에는 카탈루냐 전역의 다른 단체 대표들과 함께 주거권을 위한 제2회 회의에 참여할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 지역 혁명 선언문과 플랫폼을 수립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모임들은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전략적 행동의 토대를 마련한다. 예를 들어, 플라네스에 따르면 PAHC는 모로코 출신 이주민들과 다른 사람들이 만레사에 있는 아홉 채의 비어있는 은행 소유 건물을 점거할 수 있도록 지원해왔다. 만레사 시 정부는 대개 이주민들에게 주택을 제공하지 않으며, 때때로 그들을 PAHC로 소개해 도움을 받도록 한다.

오랜 기간 활동가로 일해 온 파블로 루이즈는 모로코 출신 이주민들과 함께 그 아홉 채의 점거 건물 중 하나에 살고 있다. 그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건물이 2007년에 지어졌으나, 2023년 그들이 점거하기 전까지 약 15년 동안 비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곳에 살면서 그는 임금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주로 필요에 의해 운동에 들어온 사람들과 정치적 활동가들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어민이 점거 건물에 살고 있는 것은 이주민들의 주거권을 위해 협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이주민들은 언어 장벽 때문에 경찰과 행정 당국으로부터 더 자주 학대를 당한다.”

루이즈의 건물에 사는 모로코 출신 이주민 나디아 사귀르는 트루스아웃에 처음에는 아파트를 점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대 대행사들이 그에게 집을 빌려주기를 거부하자, 이것이 그의 가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PAHC 모임과 퇴거 저지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PAHC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이제 나도 PAHC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말했다. “나는 PAHC의 건물에 살고 있으며, 건물 공동체 전체와 함께 재산 소유자에게 사회 임대료를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빈 건물을 점거하는 것 외에도 PAHC는 매주 약 세 건의 퇴거를 중단시키고 있으며, 때때로 경찰이 세입자들을 퇴거시키려 할 때 건물 입구를 물리적으로 막아 시간을 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거나 시 정부와 협상해 공공 주택을 제공받거나, 부동산 회사와 협상하여 점거자들에게 스페인 법상 이론적으로 보장된 낮은 ‘사회적’ 임대료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특히 국제 기업들은 이를 준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도시를 둘러보는 동안, 플라네스는 퇴거 위기에 처한 이주민들을 통역 지원과 아이 돌봄 서비스가 제공되는 일요일 모임에 초대했다. “우리는 퇴거 방어 서비스가 아니다,” 플라네스는 말했다. “우리는 자선이 아니라 상호부조를 믿는다. 도움을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하지만, 물론 누군가에게 ‘우리가 당신을 돕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결국에는 모두가, 모든 사람들이 집을 가져야 한다고 믿기에.” 사귀르는 PAHC에 참여하고 가입한 것이 변화를 가져다 준 경험이라고 말했다. “오늘 나는 2022년의 나디아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생각과 지식을 가진 새로운 사람이다,” 그는 말했다. “지금은 아주 용감하다. 인터뷰를 하거나 이웃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 물론 그들 중 다수가 점거에 반대하지만 — 누구와도 대화하고 내 아파트를, PAHC를, 싸움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에게 지붕을 제공하고 많은 생각과 현실을 바꿔준 PAHC 덕분이다.”

PAHC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변화를 주도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도록 격려하고, 또한 다른 지역 단체들과 연대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힘을 키워가고 있다. 인터뷰 전날, 플라네스는 만레사에서 서로를 지원하는 반자본주의 커뮤니티 조직들의 네트워크인 XEPC 소속 약 70명과 함께 퇴거 방어에 성공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오전 10시에 예정된 퇴거 전 집 밖으로 나와 경찰을 막아냈다. “우리는 퇴거당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경찰이 왔지만, 시위 진압 경찰 없이 왔다. 아마도 그들이 여기가 학교와 시장 앞이고 우리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을 보고 그렇게 했을 거다,” 플라네스는 말했다. “법원 서기도 왔다. 퇴거는 취소되었지만, 그들이 2월 25일에 다시 올 거다.”

PAHC는 때로 퇴거 시도 전에 이해관계자들과 협상해 더 낮은 임대료나 공공 주택을 확보하기도 한다. PAHC는 은행이나 정부를 위해 일하는 변호사들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갖추고 있다.

“정치인들과 만남을 가질 때는 반드시 총회에 보고해야 하고, 정보를 총회에 숨기지 않아야 하며, 총회 없이 별도로 계획을 세우는 그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 의사소통이 단절된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지 않는 문화가 있다,” 플라네스는 말했다. “내가 그들과 협상할 때마다 총회를 통해 진행하는데, 때때로 그들이 농담으로 내가 너무 부드러워진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협상하면서 공감을 쌓다 보면 그들을 더 잘 알게 되면서 부드러워지는 거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종종 직면하는 문제다. 총회나 단체는 ‘네가 부드러워지고 있어’라고 말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PAHC는 이러한 종류의 협상을 주거권을 위한 투쟁에서 맞닥뜨리는 현실의 일부로 보고 있다. “누구와도 항상 대립하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말했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과 자주 의견이 다르다. 오늘 나는 초자본주의적인 회사의 초자본주의적인 변호사들과 만났지만, 우리가 그 사건의 큰 허점을 지적했기 때문에 [이 은행과의] 15건 중 한 건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주거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점거는 주로 라 세키아와 같은 사회적 센터를 점거하는 활동가들에 의해 특징지어졌지만, 15M 이후 이 전술은 대중적이고 풀뿌리 주거 운동으로 일반화되었다. 전국적으로, 광장 점거 운동이 결국 더 작은 규모의 동네 총회로 분산되었고, 동네 총회는 퇴거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지원했다. 세비야에서는 15M 활동가들이 퇴거 위기에 처한 가정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원 변호사와 활동가들이 운영하는 일련의 주택 자문 사무소를 설립했다.

“가정들이 사무소 주변에 모이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신용 기관들과 협상을 강요하고 퇴거를 중단시키며,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 점거를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연구자 이반 디아스-파라와 호세 칸돈 메나는 썼다. 15M의 총회는 2012년 5월 세비야에서 38가정이 네 채의 빈 건물로 이주하는 것을 지원했으며, 그 후 몇 달 동안 200가정 이상이 다른 9채의 건물을 점거했다.

웨이징 논바이올런스(Waging Nonviolence)에 따르면, 2011년과 2013년 사이에 PAH의 지원으로 카탈루냐에서 은행 소유의 빈 주택을 점거한 사람이 700명 이상에 달했고, 남부 스페인 지역 안달루시아에서는 또 다른 400명이 유사한 전략을 사용했다.

미국에서는 비슷한 주거 운동이 점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복잡한 이유 때문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의 기세와 에너지가 이웃으로 퍼져나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 오큐파이 운동에 대해 15M의 광장 점거와 동네 총회에 참여했던 작가 피터 겔더루스는 “장소의 부재”가 미국 사회 운동의 장애물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거의 누구도 특정한 장소에 뿌리 내리고 있지 않으며, 대부분의 장소는 계획된 노후화의 필요에 맞추어 지어지기 때문에 지역적 정체성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공통된 기반이 거의 없다”고 썼다. “미국의 풍경은 지속적으로 해체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불안정성과 강제 이동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미국의 주거 투쟁은 2020년과 2021년에 부활했다. COVID-19로 인해 소득을 잃은 1,000만 명 이상이 퇴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자율 세입자 연합 네트워크(Autonomous Tenants Union Network)는 2020년에 전국의 세입자 연합을 조율하는 공식 네트워크를 설립했으며, 여기에는 포틀랜드 세입자 연합과 LA 세입자 연합이 포함된다. 필라델피아에서는 약 50명, 대부분이 싱글맘과 그들의 자녀였던 사람들이 2020년 3월 필라델피아 주택국이 소유한 빈 주택 15채를 점거했다. 2020년 9월 말에 도시 측은 활동가들이 세운 캠프를 해산하는 대가로 50개의 주택 단위를 포함한 토지 신탁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24년 2월 기준으로 도시는 신탁에 단 한 채의 집도 넘기지 않았다고 지역 언론 매체 빌리 펜은 전했다.

미국의 주거 운동은 독특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왜냐하면 많은 인구에게 법적 및 도덕적으로 사유 재산이 무엇보다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인데, 신대륙에서 원주민의 땅과 노예가 된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 형태의 재산이었다.


PAHC 회원들이 2024년 겨울 카탈루냐 만레사의 아테네우 라 세키아(Ateneu La Sèquia)에서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출처: PAHC

터틀 아일랜드(Turtle Island, 일부 원주민이 북미 대륙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의 사람들은 사유 재산 체제가 시작된 이래로 이에 저항해왔다. 수만 명의 흑인 노예들은 남북전쟁 이전에 도망쳐 스스로를 재산이라는 지위에서 해방시켰고, 남북전쟁 중에는 수십만 명이 더 도망쳤는데, 이를 W.E.B. 듀보이스는 노예들의 "총파업"이라 불렀다. 1930년대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공산당은 실업자 위원회를 통해 대규모 퇴거 방어와 시위를 조직했고, 수백, 때로는 수천 명이 경찰이 가정에서 가구를 빼앗아 가는 것을 막았다. 일부 사례에서는 경찰이 퇴거 방어자들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1931년 3월, 한 기자는 디트로이트에서 퇴거 방어가 “사실상 퇴거를 중단시켰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공황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이 임대 주택 시장에서 밀려났다.

오늘날 미국에서 주거 투쟁이 대규모 풀뿌리 운동으로 일반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법의 구할(九割): 미국에서의 재산과 저항(Nine-Tenths of the Law: Property and Resistance in the United States)⟫의 저자 한나 돕즈는 저스트시즈(Justseeds)와의 인터뷰에서, 점거자들이 주변 공동체를 참여시킬 때 미국에서도 공공 점거 시위가 성공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플라네스는 또한 정치 교육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성공적인 주거 운동은 이웃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그는 말했다. “정치적 의식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 만레사에서 주거 운동은 주택법을 배우고 점거를 통한 활발한 시위를 통해 탄력을 받았다. “우리가 건물을 점거할 때는 축제다,” 그가 말했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나설 때는 집 앞에서 무료 음식을 나누고 파티를 연다. 우리는 말한다, ‘이건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이뤄낸 거다. 당신이 오는 것을 환영한다.’”

미국의 조직가들은 만레사와 다른 지역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지역사회에서 어떤 행동과 전략이 의미가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돕즈는 미국의 점거자들이 유럽의 운동을 그대로 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유럽은 고유하고 풍부한 점거와 재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점거자들은 그들만의 맥락의 중요성을 연구하고 이해해야 한다. “유럽 스타일의 대립적이고 전투적인 전술 중 다수가 미국의 맥락에서는 번역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전술들은 이웃, 미디어, 당국을 혼란스럽게 하고 짜증나게 할 뿐이다 … 결국 모든 점거자가 감옥에 가게 된다.”

아직은 부시윅이나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의 대형 수녀원 점거지 앞에서 떠들썩한 파티를 여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도 우리의 지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관계를 맺어가며 우리의 전략적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Housing Activists in Spain Occupy Vacant Bank-Owned Buildings and Halt Evictions

[번역] 류민

덧붙이는 말

엘라 페슬러(Ella Fassler)는 뉴욕시에 기반을 둔 독립 언론인이다. 커뮤니티의 자율성, 노동, 기술, 감옥 시스템에 관한 그의 작업은 여러 매체에 실렸다. 그의 트위터는 @EllaFassler 이다. 참세상은 이 글을 공동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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