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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행적 삶과 폭력의 세기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순진하다고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머리에 고속도로가 난 상태로 어줍짢게 반항이랍시고 며칠째 그냥 등교하다가 운동장 한 가운데서 먼지나게 맞은 적도 있었고, 대면식이란 걸 나갔다가 이유도 모른채 우리 학년 전체가 딱 한살 많지만 신분은 완전히 다른 ‘선배’에게 피멍들도록 맞아도 봤다. 어디 그뿐이랴, 선생에게 맞아서 귀가 찢어진 친구가 충분히 그럴만한 '대접'을 받아 마땅한 놈이라는 진술서를 쓰지 않겠다고 버티다 학생부 한 귀퉁이 쪽방에 감금당하고 밤 12시까지 무릅꿇고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폭력의 세기’, 바로 그 20세기가 아니었던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누가 누구를 때릴 수 있단 말인가. 교복 주머니, 주머니마다 카메라가 꽂혀있고, 자유/민주를 신봉하는 아저씨들이 오히려 그것이 너무 넘쳐난다며 이상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하는 이 때에. 왠 낯익은 ‘구타의 풍경’이란 말인가.

모든 이들을 ‘빠져~’들게 만들었던, 새로운 세대의 아이디어와 재능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던 개그맨들에게 하나의 ‘관행’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구타’였다. (오호라통재여, 이 왠 낯익은 용어란 말인가!) 한때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이 꽤 인기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 그 기준에 따르자면 ‘폭력의 세기’, 20세기의 폭력은 거시적인 것이었다.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쳤고, 군대는 시민을 쐈다. 경찰은 노동자/학생을 때렸다. 남자/남편/선배는 하느님과 동격으로 불리며 여자/부인/후배를 때리고 또 때렸다. 권력은 폭력을 옹호했고, 폭력을 통해서 권력을 재생산했다. 그러나 이땅에서 20세기적 어둠의 악순환은 이제 아주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폭력을 옹호하고 생산하던 국가는 세련된 통치의 방법을 선택했고, 20세기의 폭력에 대해 반성하고 이를 재평가하기 위한 법률까지 제정하였다. 폭력에 대한 국가 구성원들의 의식은 오늘도 끊임없이 계몽된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을 둘러싼 거시적 체계의 해체는 폭력을 없앤 것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를 미시적 관계에 가두고 폭력의 본질을 은폐시켜버렸다. 거칠게 말하자면, 폭력의 주체가 국가에서 개인으로 신분 강등당한 것이다.

폭력을 미시적 관계 속에 가두고, 이성의 영역 밖으로 내몬다고 해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깊어질대로 깊어진 폭력의 심층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됐을 뿐이다. 모든 폭력은 개별화되고, 언젠가부터 국가/제도는 자신들은 결코 폭력을 휘두르지 않으며, 폭력은 언제나 개인적인 차원의 우발적인 사건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최근 연이어 벌어진 폭력 사건들은 우리 사회에서 폭력이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폭력은 관행’이란 말은 역설적이게도 폭력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닌 시스템의 문제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시스템을 고발하려했던 ‘깜박이’는 결국 시스템의 중재와 협박아래 사건의 우발성을 인정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게임에서 진 이후 화가 나서 선수를 때릴 수밖에 없었다’는 배구계의 꼴통들 역시 폭력을 행사한 것은 처음이며 소양이 부족해 벌어진 우발적 사건임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들이 너무도 당연히(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우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위임받은 ‘권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릴수 있는 권력을 가졌기에 때린 것이다.


그렇다 나쁜 폭력이 고민 없이 횡행하고 있는 이 땅에서 홍콩 영화는
하나의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파괴욕의 대리 만족 현장, 보라 광포한 체제의 무형강기에 관통 당한 상처받은 육신들이 속속 홍콩 영화에 귀의하는,저 인산인해의 장관을 !

- 유하, 싸랑해요 밀키스, 혹은 주윤발론(論) 中


군대와 학교, 연예계와 체육계로 번지고 있는 폭력의 광풍을 보며 울컥하고 서글픈 마음에 우수에 젖어 그 시절의 홍콩영화가 떠올랐다. 홍콩 영화가 대책없는 인기를 누리던 때, 그 때는 ‘폭력의 세기’ 끝물이었다. 각종 마초들이 선사하는 현란한 폭력의 이미지는 도시의 뒷골목과 없이 사는 자들에게 묘한 선망을 만들고, 가슴 저 바닥을 달아오르게 했었다. 세기는 바뀌었고 세월은 10년이 넘게 흘렀다. 이제 홍콩영화는 사라졌지만, ‘고민없이 횡행하고 있는 이 땅의 나쁜 폭력은 계속해서 상처받은 육신’들을 양산하고 있다. 폭력을 대하는 우리의 ‘고집스런 일관성’ 역시 사라지지 않고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폭력에 희생당하는 그들이 귀의할 때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국가는 그들에게 법에 문의하라며, 야박하고 음흉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언제라도 폭력을 사용할 용의가 있는 자들의 협박과 침묵은 계속되고 있다. 폭력에 상처받은 ‘인산인해의 장관’ 만이 세기를 뛰어넘어 여전히 ‘구타의 풍경’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가. 권력을 지배하는 야만적 폭력 문화. 그 간극을 메우는 근대적 질서와 욕망이 찬란한 5월의 햇살처럼, 오늘도 지리멸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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