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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음란을 두려워하는가

김인규 교사, 대법원 판결에 입장 밝혀

다시 표현의 자유를 둘러 싼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7일, 대법원은 미술교사 김인규씨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사진 일부가 음란물이라고 유죄 판결, 무죄를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의 근거로 10년전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를 음란물로 규정하며 확립한 판례에 따른 것이라며, '음란의 여부는 표현물 제작자의 주관적 의도가 아닌, 사회 평균인의 입장에서 그 시대의 건전한 통념에 따라 객관적이고 규범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음란'을 '보통사람의 성욕을 자극해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쳐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김인규 교사의 게시물 6점 중 ‘환자용 변기에 놓인 남성성기 그림’, ‘성기가 발기된 청소년 그림’, ‘고속편집 된 동영상’ 등 3점은 음란물이 아니지만 ‘여성성기 묘사’, ‘김인규 교사 부부의 맨몸 사진’, ‘정액을 분출하는 남성성기 그림’ 등 3점은 음란물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시대착오적인 판결이라는 비판여론이 일고 있는 가운데 김인규 교사가 이번 판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혀 왔다. 김인규 교사의 글 전문을 싣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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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여간 재판을 받아오면서 제가 느껴왔던 모호함과 어지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1심과 2심에서 동일한 기준과 동일한 잣대로 제가 무죄 판단을 받았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대개의 경우 재판이 잘못되었거나 선고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법리해석의 문제나 증거채택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법에 대해 문외한입니다만.) 그러나 저의 재판은 오직 '그 느낌에 대한 재판'이라는 생각입니다. 현재의 (사법부의) 판단은 거의 증거나 법리적인 문제를 넘어서 '누가, 어떻게 느꼈느냐'의 문제에 거의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거기에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회 평균인의 입장'이라는 근거를 끌어 들이지만, 과연 '평균인의 입장'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어쩌면, 그렇게 보면 이미 평균인이 저를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판단에 대한 네티즌의 태도를 보면 과반이 넘는 다수가 법원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의 사건은 인터넷 상의 문제였기 때문에 네티즌의 관점에서 따지는 것이 올바른 것이기도 하구요. 물론 이에 동의않을 수도 있지만, 그 평균인이라는 것이 그토록 모호하고 애매하다는 것이 지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큰 어려움은 그러면 창작자가 어떻게 사회 평균인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창작자의 경우 자신의 판단을 토대로 작품을 하고 그것을 전시하게 됩니다. 그때 창작자는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 충실하게 되지요. 그때 그는 자신의 작품을 사람들이 음란하게 볼 지 안 그럴 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걸까요? 만일 평균인의 판단을 받기 위해서는 공개적으로 전시해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야 하는 걸까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미리 감정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창작자 스스로 만일 그것이 결코 사회 풍속을 해칠 음란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평균인의 판단을 받기 전까지는) 전시할 수 없는 걸까요? 작가의 곤혹스러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저의 작품이 형법 상 어떠한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그래서 전시를 했습니다만, 재판장님의 판단에 의해 위법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지요. 어쩌면 저의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이 곤혹스러움은 (판단의) 그 모호함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상황이 아닐까요?

문화는 규범이 아닌 생명

물론 호색적인 욕구를 돋구어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 풍속을 해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러한 판단과 잣대를 예술창작에 무조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창작의 자율성과 실험정신은 극도로 위축될 것이며, 결국 사회의 문화적 성숙을 가로막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결코 고정불변한 규범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만일 누군가 그것을 규범화하여 일정한 틀 안에 가두어 두려 한다면 그것은 점차 말라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온실 안의 화초처럼 말입니다. 예술은 그것에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실험의 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색적인 음란물과 예술적 표현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반문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그것이야말로 보다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저의 의도는 명백했습니다. 누구나 저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사유를 유발하는 일련의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그 과정은 때로 아주 답답하거나 고리타분하기까지 합니다. 이를 통해 누구나 나의 홈페이지가 호색적인 취미나 돋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지 않고 특정 이미지만 면도칼로 오려내어 문제를 만들어내는 시선입니다. 그렇다면 그것까지 작가가 책임져야만 하는가요? 누가 성의학 서적에서 성기 그림만 오려내어 음란물로 사용했다면 그 책이 음란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렇게 사용한 사람이 음란한 사람일까요? 그렇게 본다면 이미 널리 공인된 예술작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적나라하게 여체를 그려내는 앵그르라든가 고야와 같은 화가의 누드를 어떤 청소년들은 도색적인 용도로 얼마든지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누군가 그걸 그렇게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사유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는 성숙된 문화적 풍토를 형성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재판부의 판단도 그러한 범위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토론과 대화의 장 원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사건에 대해 저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분들의 경우, 그 반대와 비난은 저의 표현이 음란했다기보다는 일부 혐오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저의 작품에서 누구든 결코 성적 충동을 느끼거나 호색적인 자극으로 인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저의 사진과 그림에서 성적인 충동을 느끼겠습니까? 그리고 그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겠습니까? 유화나 오브제로 만들어진 그림들의 경우 오히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혐오감과 당황스러움으로 인해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수치심이 아니라 혐오감입니다. 저는 '성기표현에 대해 성적으로 반응할 수 없음'에 대한 바로 그 좌절감을 작품에서 목표로 한 것이었으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대 사회의 욕망과잉 상황의 허구를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는 패러디이며 풍자입니다. 그리고 저의 부부 사진의 경우 그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 이미지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재판부의 판단도 혹시 그러한 혼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요?

어쨌든 매우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저의 홈피가 개설된 이후 불과 30여명 정도의 관람객밖에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사건이 잠잠해진 이후 다시 그렇게 평온한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현재의 상황은 언론이 다루는 방식과 문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쓸데없이 증폭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실로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저는 현재와 같은 표피적인 논란이 아니라 시급히 저의 표현에 대해 진지하고 담론적인 토론과 대화의 장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고 원하는 지점입니다.

작품이 전시된 맥락을 봐야

재판부의 개별 작품에 대한 판단에 대해 부연하는 것으로 저의 견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부분 무죄에 대해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변기 위의 남성성기>가 그려진 그림과 <그대 행복한가>는 완전히 동일한 기법과 방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표현주제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르는 판단은 모호하기만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크기 정도가 그것을 가르는 기준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실물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성의학 서적의 도판을 묘사하여 차용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실물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이 아니라 의학서적에서 다루는 방식으로서 생명이 빠져버린 물질적인 이질감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 사진의 경우 앞의 <나체1>에서부터 <나체6>까지를 보지 않고도 <나체7>를 바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물론 그러하기는 하지만, 카테고리의 형태상 작가의 의도가 너무도 명확하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을 순서적으로 인식하며 함께 감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홈페이지 전체가 무수한 글들과 이미지들을 천처럼 짜놓은 것이기 때문에 저의 홈페이지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이미 그렇게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기와 얼굴이 드러날 이유가 없다고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이미 <나체1>에서부터 <나체6>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나체2>의 토머스 이킨스의 작품에서 저는 이미 얼굴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나체3>과 <나체4>에서 저는 성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체7>이 필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그 카테고리를 살펴본다면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남근주의>의 경우 가장 노골적이며 표현이 사실적인 점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러한 전체적인 표현과 전시의 맥락 한가운데 놓여있는 것이며, 그 안에서 당연히 감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표현기법에 대해 다시 부연하자면, 그것은 사실적이기는 하지만 플래스틱처럼 아주 맨질거리게 묘사되었고, 정액처럼 보이는 것도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플래스틱 물감을 부어놓아 그것이 가지는 물질적 느낌을 아주 강화시켜 놓은 표현방식이었습니다. 때문에 그것에서 사람들은 뜨거운 성적 자극을 충동받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거절당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저는 그러한 이미지를 날것으로 길거리에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는 충분히 일련의 사유의 맥락을 형성하고 그 과정의 한가운데에 이미지들을 배치했다는 점입니다. 재판부는 제가 그림들의 경우 별다른 설명이 없이 연대순으로 나열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이미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서 홈페이지 첫 장면에서부터 거쳐야 했던 일련의 과정을 송두리째 무시해버리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대중적인 반감도 그러한 것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문제는 저의 홈페이지와 그것이 배열된 방식, 표현의도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부 작품들만 찢어발겨서 접근하는 태도들이 언론이라는 확성기를 통해 증폭되면서 발생했던 것입니다. 대부분 저의 홈페이지를 제대로 둘러보지 않은 분들이지요. 물론 저도 그러한 현상이 당혹스럽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저에게 물으신다면, “글쎄요. 정말 답답하고 속상하기만 합니다." 저는 오직 작가적인 신념과 관심에 충실했던 것이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저와 같은 작가들이 다음에 또 다시 작품을 하여 전시한다면 누구에게 사전에 위법 여부를 물어야 할까요? 그래서 작가들이 다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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