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09호] 세계의 혁명가1 - 프란츠 파농(1)

연재/세계의 혁명가1

연재
세계의 혁명가 1 : 프란츠 파농(1)

프란츠 파농 (1)


김경근 / 연구원, 연구위원회



I. 혁명가 프란츠 파농

1. 파농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프란츠 파농은 ‘정신분석학적 기여’로 혹은 ‘탈식민주의의 시초’로 혹은 ‘폭력론’으로 유명한 제3세계 정신의학자이자 혁명가이자 사상가이다.
최근 들어 그의 저작들이 탈근대나 지구화와 같은 서구 후기 산업사회 문화담론(포스트 담론)에 의해 주목받고 있긴 하지만, 양권석, 2002, 파농의 탈식민지 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진보평론 13호, 현장에서 미래를, 274p
이제까지 파농에게서 가장 부각되었던 것은 그 중에서도 바로 ‘폭력론’이다. 많은 이들이 ‘폭력’의 문제가 파농의 중심적 주제라고 평가하고 있다. 도미야마 이치로, 2002, 전장의 기억, 151p

그런데 이처럼 폭력론에 집중하여 파농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 접근법들에는 많은 아쉬움이 존재한다. 예컨대 파농에 대한 저작중 가장 최근에 한국에 번역된 저작인 세르키의 파농 전기 역자 서문에서는 “파농이 폭력의 옹호자가 아니라, 사회의 폭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해 누구보다 깊이 사유한 사상가”임을 주장하고 있다. 즉 세르키가 전기를 작성한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파농의 폭력론에 의해 발생하는 오해를 풀기 위한 것이다. 세르키는 파농의 폭력론이 오해를 받는 주된 이유가 사르트르의 서문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그는, 사르트르의 서문은 파농을 지지하고자 한 선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폭력 옹호자의 낙인을 선연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비판한다(알리스 셰르키, 2002, 프란츠 파농, 실천문학, 24p). 하지만 파농의 폭력론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폭력론에 대한 사르트르의 해석에 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예컨대 김대영은 “식민지인이 유럽인을 살해할 때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다고 말한 사르트르의 서문은 파농을 정확히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김대영, 1984, 프란츠 파농의 폭력론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78p).
파농의 ‘폭력론’은 그의 사유체계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론’만을 부각시켜온 이제까지의 접근방법은, 파농의 사상이 본래 자리 잡고 있던 제3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파농을 이탈시키게 되고, 따라서 파농 읽기가 탈맥락적, 탈역사적, 탈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폭력론’을 전혀 다루지 않는 현대 서구의 포스트 이론이 주목하는 파농은, “민중이 주체가 된 민족해방을 역설하며 탈식민화를 위한 도구로서의 폭력을 옹호했던 거칠고 위험한 파농이 아니라, 서구의 다양한 이론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지고 다듬어진 파농이 되어버렸다.” 양권석(2002), 277p

파농이 보여준 ‘식민지의 현실’과 ‘혁명’ 그리고 ‘혁명 이후의 과정’에 대한 통찰들은 그의 ‘폭력론’과는 별도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한 파농의 전체적인 통찰들을 파악한 이후에야 그의 ‘폭력론’에 대하여 풍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파농과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해 접근할 것인가? 이 글에서는 그의 마지막 저작인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의 총 세 가지 저작 중에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 시기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저술되었으며, 또한 파농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인지한 상태에서, 제3세계의 해방과 해방 이후 사회의 건설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는데 기여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정리한 글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저작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정신분석학적 접근이었고, 두 번째 저작인 ‘혁명의 사회학’ 이 책은 ‘알제리 혁명 5주년’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판되었는데 나중에 ‘혁명의 사회학’으로 제목을 바꾸게 된다. 또한 이 책의 영역판의 제목은 ‘몰락하는 식민주의’이다.
이 정세적이고 현실개입적인 접근이었다면, 마지막 저작인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이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접근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저작은 혁명가로서의 파농의 경험들을 온전히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농의 사유체계를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비교적 쉽게 일반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2. 알제리 혁명(알제리 전쟁)

파농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그가 복무하였던 알제리 혁명에 대해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파농에 대한 연구에 있어 ‘파농에 대한 간략한 전기로부터 시작해야하는 까닭은 그의 정치적 활동이 그의 이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그에 상응하여 이론이 그의 혁명적 실천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레나테 자하르, 1982, 프란츠 파농, 종로서적

알제리 혁명은 알제리 독립을 위하여 1954년~62년까지 프랑스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투쟁을 의미한다.
1930년 프랑스에게 침략 당하여 1834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알제리에서 백인 이민으로 인한 토지의 수탈이 진행되는 가운데 수많은 저항운동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된다. 그러다가 1954년 11월 FLN(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동부산악지대에서 시작된 무장봉기는 차츰 전국 농촌지대로 확대되고, 도시에서도 태업과 테러에 의한 저항운동이 빈번해진다. 1958년에 이르러서는 저항운동의 병력이 13만을 넘는 인민전선으로 발전한다. 이에 프랑스는 알제리 주둔군을 80만 명까지 늘리고 5조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하여 철저한 진압작전을 전개해서, 알제리 인민 약 100만이 죽고 70만이 투옥되었으며 프랑스군도 1만 2천명이 전사한다. 그러나 완전한 진압은 실패로 끝이 났다. FLN은 1958년 가을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아랍제국과 사회주의 국가의 승인과 원조를 받게 된다.
한편 프랑스는 국내여론의 분열 및 전쟁비용으로 인한 재정난 때문에 제4공화국 자체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는 1958넌 지방자치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신알제리기본법을 마련하였으나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의 반란을 유발하게 된다. 이 사태가 해결된 뒤 그 해 10월 드골장군의 제5공화국이 발족하게 된다. 드골정부는 알제리 자결권을 승인하게 되고 1962년 3월 정전과 함께 7월에는 알제리가 독립을 달성하게 된다.

3. 파농의 삶

프란츠 파농은 1925년 서인도 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에서 아버지가 세관원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조상은 아프리카에서 서인도 제도로 강제 이주된 노예들로서 수많은 인종차별정책에 시달림을 받긴 했지만,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은 자력으로 부르주아지로 성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파농의 8형제들은 모두 프랑스의 대학 교육을 받게 된다.
파농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에 가담하여 독일에 대항하여 싸웠다. 이 참전을 통해 그는 레지스탕스 정신을 배웠지만 인종차별도 처절하게 경험했다. 십자훈장을 받고 제대한 파농은 1945년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의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947년 프랑스로 떠나 1951년 리옹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관심은 철학과 문학에도 있어서 장 라크루아와 메를로 퐁티의 강의를 들었으며, 후에 키에르케고르, 니체, 헤겔, 맑스, 레닌, 후설, 하이데거, 싸르트르 등의 영향이 그의 저서에서 나타난다.
1952년 프랑스 여자와 결혼한 뒤 그의 첫 책인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출간한다. 이 저작은 흑백 관계로 인해 벌어지는 흑인들의 심리적 상처에 주목하는 것으로 정신분석학 이론을 방법론으로 차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내재된 인종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제 그는 아프리카에서 몇 년간 근무한 뒤 다시 고향인 마르티니크로 돌아간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1953년부터 알제리의 블리다 정신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하는 파농은 알제리에 대해 조금씩 알아나가면서, 유럽인들을 위해 고안된 치료법으로는 알제리인들을 치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정신병원의 치료법을 바꿔나간다. ‘사회적 치료법’을 도입한 그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끊임없이 개선해가며 원주민들의 문화적 지표와 언어, 그들의 사회적 삶을 회복시키려 노력하였다. 점차 그는 정신질환을 낳는 식민 사회의 모순은 알제리를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1954년 알제리 혁명이 발발한 이후 알제리 투쟁을 비밀리에 지원하던 파농은 1956년 정신과 의사직을 사임하는 공개편지를 알제리 주재 프랑스 총독에게 보내지만, 이로 인해 알제리에서 추방당하게 된다. 파농은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에 가담하고 튀니스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FLN 대변지의 편집인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1959년에는 알제리 임시정부의 아프리카 순회대사로 활동하였다.
1959년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독립국이 세워지던 해였다. 파농은 아프리카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선동했고, 아프리카를 전체적으로 횡단하는 해방전선의 구축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두 번의 암살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바로 이 1959년에 그의 두 번째 저작인 ‘알제리 혁명 기원 5년’이 출간된다. 그는 이 저작에서 식민지 민중들이 혁명을 통해 해방되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1960년 파농은 다시 많은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을 순회하게 된다. 파농에게 있어 중요한 일은 아프리카인들에게 알제리 투쟁이 아프리카 전체의 하나의 본보기로서의 중요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또한 알제리인들에게 그들 자신과 전체 아프리카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해시키는 일이었다.
그 해 12월 골수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파농은 1961년 4월부터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3달 후 완성하게 된다. 11월 책을 출간하고 1961년 12월 사망한다. 레나테 자하르(1982), 김대영(1984), 알리스 세르키(2002), 알리스 세르키(2004), 민새얼(2005)



Ⅱ. 파농의 사상과 실천
-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1. 파농의 중심 주제 :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1950년대 식민지해방운동에 참여했던 한 혁명가의 글이다. 파농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을 한마디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바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라” 즉 “혁명을 하라”일 것이다. 파농은 혁명을 완수한 이들에게, 혁명을 진행 중인 이들에게, 혁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충고’와 ‘경고’와 ‘바램’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더 필사적이 된다.
모든 것이 미숙하고 부족한 시기, 아직 혁명의 성공이 명확해지지 않은 시기, 혁명 이후의 올바른 발전이 보장되지 않은 시기,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하던 민중들이 일어나 제국주의에 당당히 맞서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던 시기 한가운데서 아마도 이 혁명가는 너무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는 식민 지배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혁명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이 소외를 격지 않는 사회, 노동자 농민이 억압받지 않는 사회, 민중이 힘을 가진 사회를 만드는 것이기에, 단순히 혁명을 이룩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혁명을 고민한다. 혁명은 바로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것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탈식민화에 대한 분석이자 제3세계 나라들의 미래에 관한 고찰이다. 그가 분석하는 탈식민화는 단순한 주권회복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탈식민화, 인간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탈식민화이다. 그런 탈식민화는 폭력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파농은 진정한 해방에 실제적으로 도달하기 위한 조건들을 분명하게 제시하면서, 신생독립국들에서 나타나는 장애와 난관들을 냉철하게 서술하고 있다.’ 알리스 셰르키, 2002, 프란츠 파농, 실천문학, 417p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사르트르의 서문과 함께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르트르의 1961년판 서문은 한동안 원문보다 더 많이 읽혀진 때가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글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서문은 파농의 생각과 어조를 왜곡하는 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파농이 이 글을 3세계인들을 대상으로 썼던 반면 사르트르는 유럽인을 대상으로 서문을 쓴 까닭에 파농과의 불일치가 나타나며, 또한 사르트르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알리스 세르키, 2004, 2002년판 서문,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15p
사르트르는 파농의 저작을 “제3세계가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평가한다.(27) 괄호 속에 숫자가 있는 것은 모두 [프란츠 파농, 2004,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그린비] 의 페이지이다.
그는 파농이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형제들에게 설명하는 내용은 민족 혁명이 승리하려면 사회주의 혁명이어야 한다는 점과 제3세계의 단결을 이루려면 먼저 각 나라가 독립을 얻은 뒤에도 예전처럼 농민층의 지도 아래 식민지 민중 전체가 단결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한다.(28) 또한 ‘유럽인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 파농은 유럽인이 스스로에게서 소외된 메커니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유럽인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며’(31) 둘째, 폭력에 관한 진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1장 ‘폭력에 관하여’에는 파농의 ‘폭력’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다. 파농에게 있어 폭력은 곧 탈식민화이며 곧 해방이다. 폭력은 인간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고 사회구조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파농은 이러한 폭력이 왜 식민지에서 반드시 필요한지를 설명하고, 그러한 폭력이 식민지 내의 구조와 주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다. 파농은 1장에서 ‘폭력’을 분석함으로써, 혁명을 이루어내는 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2장 ‘자발성의 강점과 약점’에서 파농은 ‘혁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혁명에 참여하는 각각의 주체들인 민족정당의 지도자, 민족 부르주아지, 노동자, 농민들의 특성과 이들 간의 관계들을 분석한다. 파농은 혁명 주체들 중에서 특히 지도부와 대중, 도시인과 시골인(농민) 간의 갈등과 대립을 주목하고 이러한 갈등을 변증법적으로 변화·발전시켜나가는 방법을 설명하고자 한다. 2장에서 파농은 현실을 자각한 민중의 직접적 투쟁만이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전진할 수 있음을 설득시키고자 한다.
3장 ‘민족의식의 함정’에서 ‘민족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파농은 민족주의와 탈식민화 투쟁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민족주의에 대한 현실화와 구체화를 시도한다. 민족주의 그 자체로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즉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족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3장에서 파농은 혁명 시기를 넘어서서, 혁명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직면하게 될 어려움들을 경고하고, 그러한 신생독립국들이 취해야할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설명하고자 한다. 4장 ‘민족문화에 관하여’에는 ‘민족문화 운동’에 관한 파농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혁명운동 중의 한 방법인 민족문화 운동을 분석하고 그것의 의의와 한계를 지적해내고자 한다. 파농은 민족문화 운동이 민중들의 투쟁과 유리되거나, 새로운 민족의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상황들에 대해 경고한다. 여기에서 그는 식민지배체제에 맞서서 투쟁하는 민족들이 지켜야 할 민족문화의 유산과 독립이후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할 민족문화의 발전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5장 ‘식민지 전쟁과 정신질환’은 ‘정신질환’에 대한 것이다. 파농은 알제리 민중의 민족해방전쟁에서 비롯된 여러 정신질환들을 분석하고, 식민지배와 해방전쟁이 인간 개인의 정신에 얼마나 커다란 악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5장은 그의 첫 번째 저작인 ‘검은 가면, 하얀 피부’에서 전개된 문제의식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파농은 만연한 폭력이 식민지 상황의 직접적인 산물임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며, 또한 그러한 폭력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설명하고자 한다.
6장 ‘결론’에서 파농은 제3세계가 유럽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시작해나가기를 주장한다. 이 마지막 장에는 새로운 세상, 파농이 평생을 바쳐 꿈꾸었던 세상을 제3세계 민중들이 만들어나가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이처럼 파농의 저작은 식민지 민중에게 있어 그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 과정에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자 하는 총체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파농은 식민지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고, 그러한 식민지 체제를 바꿔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해방 이후의 사회의 발전 방향을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과정 속에서의 주체와 구조 모두의 동학을 설명함으로써 역사의 변화를 변증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파농의 폭력론 : 폭력을 통한 폭력의 분쇄

파농은 왜 혁명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혁명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이것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파농은 먼저 식민지배라는 형태가 식민지 내의 피지배계층에 대해 가하는 폭력을 드러내 보인다. 특히 알제리를 비롯해 아프리카 전역에서 식민지 권력에 의해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었던 대학살은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의 모든 문제가 무력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94)
그리고 파농은 그러한 폭력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그 방법은 바로 폭력을 통한 폭력의 분쇄이다. “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적대적인 두 세력 간의 처절한 투쟁을 거쳐야만 탈식민화가 이루어질 것이다.”(55) “식민주의는 더 큰 폭력에 의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82)
이처럼 그는 식민지라는 상황이 피식민지인들에게 주는 폭력을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폭력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에 맞선 폭력밖에는 방법이 없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1) 식민지적 상황

파농의 폭력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활동하고 있던 시공간을 먼저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파농에게 있어 폭력론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조건에서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파농이 이론과 현실을 분리될 수 없는 변증법적 관계로 바라보았다면,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이론과 그가 처했던 현실을 변증법적 관계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파농은 알제리를 ‘마니교적 세계’ 즉 완전히 둘로 나뉘어져 있는 이중구조의 세계로 인식한다. “식민지 세계는 둘로 나뉜다.”(58) “알제리는 식민자와 식민지인으로 나뉘어져 있는 마니교적 세계이다. 지배하고 착취하는 식민자와 억압받고 약탈당하는 식민지인은 철저히 나뉘어져 있다.” “마니교는 원주민을 비인간화시킨다. 즉 쉽게 말해 인간을 동물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상 이주민이 원주민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는 동물학적인 용어이다.”(63) “식민지 상황의 특징은 전 민족에게 이분법을 강요한다는데 있다.”(66)
한편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진 구조에서 폭력은 그러한 구조를 지탱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폭력은 식민지 세계의 질서를 지배한다.”(61)
이처럼 ‘식민지적 상황을 특징짓는 것은 인종차별주의이다. 그것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원주민들을 가장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착취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한 원주민 자신들의 반응은 그 체제에 대해 고정화 효과를 갖는다. 피압박자들이 자기들이 당하는 압박의 이유를 자신들만의 열등성에서 찾음에 따라 그 압박에 대한 저항의지가 감소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압박자는 피압박자들을 점점 더 그런 운명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만드는 빈곤을 야기하고 그것을 항구화한다. 공포와 착취는 비인간화되고, 착취자는 한층 더 착취하기 위해 이 같은 비인간화를 정당화한다.’ 레나테 자하르. 1982. 52~53p

“파농은 알제리의 식민지적 상황에서의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느끼게 된다. 첫째, 알제리에는 심각한 경제적 문제가 존재한다. 프랑스에게 이용당하고 수탈당함으로써 가난과 굶주림으로 가득 찬 사회가 된 것이다. 둘째, 알제리인들의 의식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 알제리의 정신병원은 환자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으며, 온갖 정신분열 증세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셋째, 알제리인들 사이에서 반목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봉건귀족과 민족부르주아들 간에, 도시민과 농민들 간에 치열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다. 넷째, 폭력에 의한 지배가 존재한다.” 김대영, 1984, 프란츠 파농의 폭력론 연구, 서울대 석사논문, 9p~14p


한편 이러한 식민지적 상황은 파농의 폭력론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파농의 사상이 맑스주의와 일정정도 긴장을 가지게 한다. 파농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맑스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그는 맑스가 꿈꾸었던 세상을 공유하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그러나 파농을 단순히 맑스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맑스주의가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3세계 식민지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파농은 맑스주의를 확장시키고 발전시켜내고자 노력하게 된다.
먼저 파농은 식민지에서는 세계를 구분하는 단초가 인종이라고 주장한다. “식민지에서 경제구조는 상부구조”인 것이다.(p.60) 즉 파농은 ‘식민지 구조를 이윤추구나 경제적 착취의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식민지라는 마니교적 이중구조는 인종주의와 폭력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김대영, 1984, 17p.


2) 폭력의 필연성

앞서 언급했듯 식민지적 상황은 피식민지인들에게 끊임없이 폭력을 가한다. 이에 따라 피식민지인들은 폭력에 의해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필연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폭력의 ‘발현’을 이끌게 된다.

먼저 파농은 당시 알제리에 만연하고 있던 범죄와 알제리인들 상호간의 폭력에 대해, 그것이 알제리인들의 야만적 속성 때문이라고 보는 서구의 관점을 비판한다. “알제리인의 범죄성·충동성·살인의 폭력성은 신경체계가 잘못 조직된 결과도, 독특한 성격 때문도 아니라 식민지 상황의 직접적인 산물이다.”(348)
식민지 상황으로 인해 알제리인들이 폭력성을 보이는 이유는 그러한 식민지 상황으로 인해 알제리인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피식민자와 식민지 통치자들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피식민자들간의 관계까지도 특징짓는다. 식민지 구조의 비인간적 영향은 이 체제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개인에게 작용한다.’ 레나테 자하르, 1982, 프란츠 파농, 종로서적

이와 같이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의해 깊이 영향 받는 피식민지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것에 대해 반응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 서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우리는 도피라는 행동 양식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마치 혈육상잔에 전념하는 것이 식민주의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는 문제와 관련된 불가피한 선택을 뒤로 미룰 수 있도록 해주는 듯하다. 집단적인 자멸은 원주민의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는 한 가지 방식이 된다.”(75) 주술적 요소를 통해 자신들의 폭력성을 억제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원주민은 저개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포스러운 신화를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의 공격성을 억누르는 각종 금지를 강화한다. 표범인간, 뱀인간, 좀비 같은 것들이 원주민의 주변에 이주민의 세계보다 더 무서운 금지와 장벽의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76) 집단적 춤을 통해 육체의 긴장을 해소하기도 한다. “우리는 원주민의 정서적 감수성이 무아지경의 춤을 통해 모두 분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저지당한 공격성을 화산의 분출처럼 해소하려고 한다.”(78)
이처럼 피식민지인들은 ‘폭력’을 “춤과 신들림을 통해 정서적으로 배출하기도 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여내기도 한다.”(79) 알제리인들의 야만성과 미개성으로 표현되던 모습들이 실제로는 바로 식민지적 상황의 직접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식민지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싸움과 범죄 및 부족 항쟁으로 또한 원시적 종교와 마술에 대한 신앙 및 집단 무용으로 나타난다. 파농은 이러한 종교나 주술, 몽상과 광기를 부정적인 요인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이 모든 것을 폭력의 과정으로, 대항 폭력으로 가는 성숙으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위한 최초의 단계로 보았다. 파농에 의하여 이러한 폭력의 분위기는 차차 행동화한 폭력으로 나아간다. 그 계기는 식민지의 탄압이다.’ 박홍규(2003), 396~397p


이처럼 폭력이 사회에 실존하며, 주체들의 생존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폭력을 해소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이제 ‘어떻게 폭력을 운동으로 전개하고 조직할 것이냐’의 문제만 남게 된다. “운동을 전개하고 조직하는데 있어서의 일관성이 없으면 자유를 향한 맹목적인 의지만이 존재할 뿐이며, 몹시 반동화될 위험을 수반하게 된다.”(80)

소속된 개인들에게 끊임없이 폭력이 가해지는 사회, 그리고 개인들이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자기 파괴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에서, 해결책은 폭력의 근원을 없애는 것만이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폭력으로서만 가능하다.
‘식민지라는 엄격한 마니교적 이중 구조의 세계에서는 잡아먹느냐 잡아먹히느냐의 철저한 대립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반식민지 투쟁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식민지인의 역폭력이 정당화되고 폭력투쟁이 식민지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파농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김대영, 1984, 22p.


그러나 파농이 폭력을 절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조건 하의 어떤 형태의 폭력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예컨대 알제리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폭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제리의 경우 무력이 불가피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정치적 행동이나 정당이 대중을 평화적으로 이끌어 (똑)같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219)

3) 폭력의 영향

앞서 식민지의 폭력적 상황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그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폭력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탈식민화는 개개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그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56)

‘폭력’은 즉 ‘투쟁’은 곧 ‘탈식민화’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첫째, 폭력은 민중을 단결시켜준다.
“폭력의 행사는 식민지 민중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들이 된다.” 해방전쟁에서 대중이 동원되면 각 개인의 의식에는 공통의 대의, 민족의 운명, 집단의 역사 같은 관념들이 싹튼다.
둘째, 폭력은 개개인의 인간성을 회복시켜준다.
“개인적 차원에서 폭력은 정화의 힘을 가진다. 폭력은 원주민에게서 열등감과 좌절, 무기력을 없애주고, 용기와 자존심을 되찾게 해준다.”(118)
셋째, 폭력은 민중을 주체로 만들어낸다.
폭력 즉 무장투쟁 곧 탈식민화 운동을 통해 “민중은 해방이 모두의 과제이며 지도자라고 해서 특별히 우수한 사람은 아니라는 점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민중은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얻은 결과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며 자신들의 미래와 운명을 살아있는 신의 손에 내맡기려 하지 않는다. 어제 그들은 완전히 무책임했으나 오늘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118)
넷째, 폭력은 개량적이고 협조적인 지도부로부터 민중을 분리시켜낸다.
“폭력으로 인해 깨어난 민중의 의식은 일체의 화해를 거부한다.”(118)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파농이 말하는 폭력은 단순히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가하는 물리적 공격’이 아니다. 파농이 말하는 폭력은 바로 운동, ‘민중이 주체가 되는 비타협적 운동’을 의미한다. 그러한 운동을 통해 민중은 억압받는 개별적 피식민지인에서 개인의 존엄을 지키고, 서로 단결하며, 해방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존재가 된다.

‘이처럼 폭력은 해방의 심리적 효과와 여러 단체의 역동적 통합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갖고 있다. 파농은 해방운동이 개인들과 동시에 사회 구조를 어느 정도로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레나테 자하르, 1982, 프란츠 파농, 종로서적, 145p 150p
파농은 폭력을 두 가지 다른 국면으로 특징지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첫 번째 국면에 있어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이며 아직 분명한 정치관을 갖고 있지 못한 폭력은 식민자라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자에 대항하고 있으며, 두 번째 국면에 있어 폭력은 사회의 혁명으로 조직된다. 첫째 국면에 있어 폭력은 피식민자의 심리적 소외를 해결하고, 둘째 국면에서 폭력은 소외를 야기하는 자본주의적 식민주의의 구조를 변혁시킨다. 레나테 자하르. 1982. 142~143p


파농에게 있어 인간성은 단순히 폭력을 행사한다고 해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상황 속에 매몰되어 있던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투쟁함으로써 찾아진다. “목숨을 걸어야 자유가 획득된다.”라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면서 파농은 자유로운 인간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헤겔의 노예가 노동함으로써 자유를 찾는 반면에 파농의 노예는 주인을 죽임으로써 즉 폭력을 통하여 자유인이 된다. 헤겔과 파농의 노예는 모두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여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일치하지만, 헤겔은 자의식을 갖게 됨과 동시에 인간 존엄성을 되찾게 되는 반면, 파농은 자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고 그 폭력투쟁 속에서 새로운 자의식을 깨우치게 되는 변증법적 과정을 겪게 된다. 김대영, 1984, 28~29p


결국 폭력은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폭력은 곧 그 만큼의 민중의 전진이다.
“투쟁이란 바로 식민지 시대의 낡은 진리를 타파하고, 알지 못했던 측면을 드러내고, 새로운 의미를 끄집어내고, 이러한 현실들에 의해 은폐된 모순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이다. 투쟁에 참여하고 투쟁 덕분에 그 사실들을 알게 된 민중은 식민주의로부터 벗어나 앞으로 전진하며, 신비화의 모든 책동을 경고하고 맹목적 애국심에 대해 반대한다. 오직 민중이 행사하는 폭력만이, 민중 지도부가 조직하고 교육하는 폭력만이 대중에게 사회적 진실을 이해하도록 할 수 있다. 그 투쟁이 없으면, 행동의 실천에 관한 앎이 없으면, 위로부터의 약간의 개혁과 휘날리는 깃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밑에는 분화되지 않은 대중이 여전히 중세의 삶을 살면서 내내 제자리걸음만 할 뿐이다.”(172)

4) 폭력으로 인한 정신장해

파농은 5가지 반응성 정신질환과 알제리전쟁이 직접적으로 유발한 5가지의 정신장해, 그리고 고문으로 인한 4가지 정신장해, 정신과 신체의 연관에 따른 병리현상을 사례별로 분석한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의 범죄충동의 원인에 대해 추적한다. 식민지 체제 자체, 그리고 피식민지인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피식민지인의 대항 폭력 각각이 그것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관찰자에게 미치는 정신장해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 폭력들의 성격은 다르지만, 이러한 폭력들은 모두 개인의 정신에 많은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농은 광기나 콤플렉스를 개인의 자질이나 가정의 문제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정신장해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산물이며, 식민지 지배나 민족해방투쟁에서 창출된 것이다.” 도미야마 이치로(2002), 172

“오직 힘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은 주체를 용해시키고 분열시키면서 정신장해에 빠져들게 된다. 폭력의 발동에 수반되는 익명화는 개인을 분열시켜 정신장해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 상황이란 일단 오이디푸스 개념이 들어설 수 없는 임계영역이며 정신장해가 끊임없이 만들어져 나가는 전장이다. 한편 그러한 폭력의 작동에 수반되는 익명화는 사회를 새롭게 열어 나갈 가능성이기도 하다.” 도미야마 이치로(2002), 170~171p
(다음 호에서는 파농의 사상과 실천이 “혁명의 주체들”과 “혁명 이후” 그리고 “민족에 대해” 등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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