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09호] 누구를 위한 개량이고 누구를 위한 투쟁인가?

특집/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3)

특집: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3)



누구를 위한 개량이고
누구를 위한 투쟁인가?

정상철 / 공공연맹 대전충남지역본부 본부장


특집: 노동운동 출구를 찾자(3)
누구를 위한 개량이고 누구를 위한 투쟁인가?


- 민주노총 현 지도부의 투쟁은 개량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이 문제이고 그들의 본질이다.
- 대중조직의 종적 질서와 복종을 강제하는 관료주의와 그 세력을 지역과 현장의 수평적 연대와 투쟁으로 상쇄하고 아래로부터 민주노조운동을 새롭게 강화하자!


1. 들어가며

노동운동(주로 노동조합운동의 측면)의 위기 및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현장에서 미래를』지지난호(107호)에 ‘민주노총 이대로 좋은가?’ 라는 제목으로 장황하게 쓴 적이 있다. 위기의 이면을 까뒤집어 보면 민주노조운동 진영 내 똬리를 틀고 기생하면서 세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자본에 야합하는 상층의 기회주의, 개량주의 세력(총자본의 초과이윤의 일부인 떡고물을 핥아 혹은 받아먹으려는 집단들과 권력지향의 해바라기 세력들)이 있다. 또한, 극심해지고 있는 자본의 누적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초국적자본과 국내 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 폭압에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 되어버린 노동현장과 그 현장에 그대로 노출되어 점점 더 개별화되고 우경화(체제내화)되어 가고 있는 조합원 대중이 있다. 내게는 이것들이 먼저 보인다.

‘이 한국자본주의 세상에서 한 해 3,000명의 노동자가 노동재해로 학살을 당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외친다. 그 외침은 다시 이렇게 되돌아온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회적 교섭을 해야 한다’고. 단적인 사례이지만 이것이 개량이라고 한다면 노동조합운동에서 개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량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이 자본주의에서는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쟁취되지 않는다. 투쟁을 통해 쟁취한 개량은 전 인민과 노동자 전체 계급이 작지만 한 발짝이라도 전진하게 하고 그럴 때야 비로소 개량은 진보적인 개량일 수 있다. 그래서 3,000명이 학살당하는 그 현실과 결과를 노동자 계급이 그대로 받아들이고(인정하고) 한명이라도 줄이고자 하는 교섭을 진행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결과를 초래한 원인을 찾아 이를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해야 하는지 다소 어리석기 까지 한 질문을 던져본다. 곪은 종기는 그 ‘심’을 도려내지 않고서는 없어지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그 답은 명확하지 않은가!

우리 노동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지점은 어디인가? 소유, 착취, 경쟁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노동자가 몰인간적 취급을 받으며 죽어 나가는 자본주의 세상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 여전히 자본이 지배하는 개량된 세상도 아니다. 노동자 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세상은 학살의 자본주의가 폐절된 노동해방세상, 평등세상, 계급이 폐지된 세상인 것이다. 노동자 계급이 투쟁으로 바꾼 세상은 이런 세상이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 내 민주, 투쟁, 계급을 외치고 세상을 바꾸자고 외치면서 투쟁은 사실상 뒷전이고 타협과 교섭을 주장하며 개량‘만’을 외쳐대는 세력들을 이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있는지?


2. 몸말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지금부터다. 노동조합은 1차적으로 계급조직이지만 그 성격은 대중조직이다. 조합원은 각자 다른 사상과 정치노선을 가지고 있고, 이를 획일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조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계급적 대중조직이지만 양적성장을 하면서 관료화, 체제내화되기 쉽고, 현장은 이 관료들의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기 쉬우며,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무관심, 개인주의, 대리주의에 휩싸이게 되고 또 집행부는 이를 핑계로 삼아 투쟁을 회피하고 대중을 따라가는 추수주의에 쉽게 빠지게 된다. 자주, 민주, 투쟁, 연대 등 계급성의 위기를 노동조합운동 위기의 그 내부적 원인으로 진단하기도 하지만, 관료주의, 추수주의, 대리주의가 현 노동조합운동의 내부적 위기상황의 현상이자 배후가 아닌가 한다.

중앙은 비대해지고 현장과 점점 더 분리되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본다. 민주노총 출범 이후 20여만 명의 조합원이 증가했다. 민주노총 조합원 수로만 보만 50% 정도가 늘어난 숫자이다. 조합원 수가 늘어난 만큼 관료화와 동맥경화증은 심해졌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민주노총 중집위, 중앙위가 제대로 토론조차 진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주요한 의결단위는 치열한 토론과 비판보다는 집행을 맡고 있는 다수 분파들의 통과의례와 요식절차를 집행하는 대리점으로 전락되어 가고 소수의 의견은 무시된다. 수면에 떠있기 위해 물밑에서 바쁘게 발을 움직이고 있는 오리가 뒤집혀져 있는 형국이다. 중앙은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현장은 고요하기만 하다. 머리에 해당하는 중앙이 점점 커지면서 허리는 잘록해지고 몸통은 힘없이 점점 펑퍼짐해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꼭 모가지가 부러질 것 같기만 한데, 목이 톡 꺾이기보다는 모가지가 몸통을 덮칠 것 같기도 하다.

2007년 1월이면 복수노조시대가 열리고, 전임자 임금지급이 근로기준법상 부당노동행위가 된다. 이 두 가지를 이유로 민주노총 산별연맹들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도 산별노조 문제가 부쩍 회자되고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이 변화·발전(이것이 계급적으로 후퇴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해 나가는 과정에 산별노조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산별노조는 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산별노조를 왜 건설해야 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자칫 산별만능주의에 빠질 우려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의 산별협약 10장 2조의 문제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산별노조는 계급성의 강화를 그 일차적 과제로 하고 있다고 본다. 남성/여성, 정규직/비정규직, 국내/이주, 실업자/취업자 등의 차별과 자사 이기주의, 직(업)종 이기주의 등 기업별, 업종별 한계를 극복하고 계급적으로 단결하여 투쟁을 잘 하기 위한 조직체인 것이 산별노조다. 그런데 산별노조가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고 산별협약이 아직 경험하지 않은 개척의 영역이라고 조합원을 미혹하면서 근로조건의 하향평준화를 강제하고 투쟁하는 노조(서울대병원지부노동조합) 지부장을 징계까지 한다고 해서야 그런 산별이 제대로 된 산별이 되겠는가? 작금의 산별중앙이나 총연맹 중앙의 움직임을 볼라치면 산별이 자칫 대중조직의 중앙을 비대하게만 해서 현장을 질식사 시키지는 않을지 심히 우려스러운 것이다.

어용과 민주의 구분이 없어지고 있다.
이것이 민주노조진영의 입장에서 볼 때, 생산력의 진보가 만들어낸 비극적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민주와 어용을 구분하기 힘들다. 모두 민주와 투쟁을 말한다. 투쟁 한 번 하지 않는 조직도 민주노총의 집회에는 나온다. 그러면 민주노조의 연대라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 되는 셈이다. 한국노총도 혁신을 얘기하고 투쟁을 한다. 형식적 민주 절차와 요식을 거치면 모두 민주가 되는 셈이다. 민주는 형식적 민주는 담고 있으되 주체적, 계급적, 투쟁적 민주는 배제된다. 대부분이 다 어용조직이라고 회자되는 조직의 조합원이 민주노총의 우수조합원이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두 총연맹의 위원장은 가까이서 손을 잡고 악수하되 투쟁은 멀찍이 떨어져 있다. 두 총연맹은 늘 시차(민주노총이 6월말 파업을 예정하며 한국노총은 7월 초 파업을 선언한다)를 두고 파업을 계획한다. 하긴 민주노총 내에도 모든 조직이 파업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어용을 어용이라 부를 수도, 민주를 구분할 수도 없는 세상이 이미 되었는가?

현상에 대한 대응은 있으되 차분한 진단과 분석, 이를 통한 폭로와 치열한 투쟁은 없다.
비정규직 법안 처리와 투쟁을 두고서 몇 번이고 기억도 힘든 ‘늑대야’가 외쳐졌다. ‘파견법 개악’이 외쳐지자 작년 9월 말경 노사정 대표자회의는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법안소위 상정시 총파업을 단행한다’는 결의가 있었고, 늦추어졌고 늦추어졌고 늦추어졌다. 그런 과정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불쑥 살아났고, 올해 6월 처리가 무산되고 9월 정기국회로 비정규 법안 처리가 연기되자 이번에서는 노사정대표자회의에서 합의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파견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않아도 820만의 비정규직을 양산한 파견법과 관련법들이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자본이 굳이 양보까지 할 이유가 있는가?

현장의 비정규직 투쟁은 생색내기 정도로 지원되고 있고, 충북지역의 투쟁의 경우 오히려 중앙의 적극적인 엄호와 지지보다는 관리와 통제가 더 우선시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울산플랜트노조는 어떤가? 울산노동자대회 중에 합의를 보았다는 소식에 헹가래를 치고 환호하든 조합원들은 어느 공원에서 고립되어 잊혀진 채 합의를 준수하라고 하며 다시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저들 자본을 제대로 진단하고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한 결과이지는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반대와 반세계화 투쟁을 외치되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투쟁은 전개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법안 저지와 입법쟁취투쟁을 예로 든다면 민주노총이, 강행처리를 호언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고 이후 9월 투쟁을 준비하고 조직해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이즈음처럼 노동부 장관 퇴진, 노사정대표자회의 재개와 이를 통한 합의를 요구하면서 진행해야 하는지, 어떤 것이 제대로 된 분석을 통한 투쟁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말 잘하는 연설은 있으되 선동은 없고 투쟁은 있으되 진격은 없다.
말 잘하는 연설꾼은 있으되 정작 투쟁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선동은 없다. 문제와 모순을 폭로하고 실천적 투쟁을 야기시키는 계기는 촉발되지 않는다. 투쟁을 하자는 구호는 있으되 투쟁의 전선에서 진격을 외치고 현장과 함께하는 지도부는 없다. 지도부는 보위되되 정작 권력을 위임해준 조합원은 대중지도부에 의해서 보위되지 않고 방치된다.


3. 나오며

계급투쟁의 내용과 질을 지역과 현장에서 실천해 나가자!
말뿐인 투쟁과 연대가 아니라 내용과 질을 담는 계급투쟁을 지역에서 현장에서 실천하자! 충북지역의 예를 보면 이는 가능하다. 충북지역본부 동지들은 비정규직투쟁을 지역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확대간부파업을 실천하면서 이를 확대강화하여 지역 총파업을 진행했다. 집회투쟁에서는 단호하고 강단진 실천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민주노총 중앙의 지침이나 산별연맹의 지침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나? 지역의 대표자들이 결의하고 간부들이 실천하면서 조직적으로 조합원들을 교육하고 선전, 선동하고 조직해낸 것이다. 대전지역본부의 경우 380여일 위장폐업분쇄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리베라노조 동지들의 투쟁을 엄호 지원하기 위하여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조합원 1인당 1,000원/월의 투쟁기금을 결의했다. 돈 문제는 다소 치사하기까지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한 달의 천 원 정도도 대중조직 지도부는 결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비정규직 장기투쟁사업장의 문제가 궁극에 가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존권의 문제로 대부분 귀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는 작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물론, 조직화, 실천의 문제는 남아 있다.

노동자 계급투쟁을 경제적 측면에 한정하고자 하는 조합주의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상승시키고 전화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체제내적인 제도개선의 정치적 개량 투쟁으로만 제한하고자 하는 경향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평등세상, 노동해방세상 건설이라는 궁극목표를 명확히 하고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통일시켜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과학적, 사상적, 철학적 내용을 학습하는 이론 무장 투쟁도 전개해야 한다. 자본과 정권의 그 엄청난 이데올로기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론적 재무장이 그 기본이 아니겠는가! 노동자 다수가 사회적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단결하고 계급으로 조직되어 올바른 사상으로 지도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적질서와 복종을 강제하는 중앙의 권력에 맞서 지역과 현장,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전개하자!
사회적 교섭과 관련하여 민주노총 중집위, 중앙위, 대의원대회에서의 현장 활동가 및 조합원들의 투쟁은 총연맹의 계급성, 투쟁성, 민주성을 지켜내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내부적 투쟁이었다. 지금이야 이 투쟁의 당사자들이 진상조사와 징계의 대상이 되고 경찰에 고소고발을 당하고 있지만, 이후 민주노조의 역사는 정당한 투쟁으로 그렇게 평가할 것이다. 서울대병원 지부노동조합의 산별협약 10장 2조에 대한 문제제기와 이를 관철해내기 위한 투쟁도 민주노조의 계급성을 지켜내기 위한 치열한 아래로부터의 현장투쟁이었다. 산별연맹 중앙의 종적 질서 속에서 투쟁과 사업의 우선순위가 밀린 투쟁사업장의 경우 지역차원에서 선전, 선동하고 투쟁을 조직해낼 수 있다. 실천적 결의와 집행의 문제로 결국은 귀결될 뿐이다. 투쟁과 연대에서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은 현실로 나타난다.

개량을 위한 개량만에 머물러서는 노동자 계급이 쟁취하고자 하는 궁극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 누구를 위한 개량이고 누구를 위한 투쟁인지를 분명히 짚어보아야 한다. 노동조합운동 내에 한편으로는 점점 더 폭과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관료화, 개량화, 우경화를 깨부수고 또 한편으로 점점 더 희석되어가고 있는 계급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제는 지역과 현장, 아래에서 횡적으로 실천하는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