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10호] 노동자경제학1

서문: 자본주의 사회와 노동자계급1

파농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 우물이 있는 집
연재/노동자 경제학

연재
노동자 경제학 1

서문: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노동자 계급 1** 이 글은 연재기획 <노동자 경제학>에 들어갈 주요 내용들에 대한 소개이다. 졸고, ‘자본주의 사회와 복지’(사회복지와 노동 창간호, 2000년 겨울)를 수정한 것으로서, 앞으로 연재될 <노동자 경제학>의 서문 가운데 첫 번째 부분에 해당합니다.


이은숙 / 부소장, 편집출판위원장



“노동자들이 그들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싸움터는 그들의 모든 생활 상태에 대한 반대이기 때문에 당연히 노동자들은 바로 이 반대 속에서 가장 철저하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띌 수밖에 없다.”(엥겔스, 1845)


I. 들어가며

18세기말에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관계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형성된 이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과정은 일상적이고 공공연한 ‘사회적 전쟁’의 일반화와 내재화 과정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은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이며, 그 필요충분조건은 임금노동의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점으로부터 자본가계급과 임금노동자계급은 이 사회의 생산관계의 골간을 이룬다는 사실은 초기자본주의 시대부터 현대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이다.

이 사회의 계급관계는 자본-임노동 관계를 축으로 하여 각 계급계층이 정교하게 다면적이고 다층적으로 위계화되어 있고, 바로 자본주의의 지배적 정치과정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계급관계의 재생산 과정, 자본-임노동 관계의 재생산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 정치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본질로부터 연유하는 노자간 계급 적대를 자본주의체제에 적합하도록 중화하고 재배열하고 계열화함으로써 계급 적대로부터 발생하는 계급투쟁=‘사회적 전쟁’이 체제의 위기로 전화되는 것을 방어하고 자본가계급지배의 항구화를 도모한다.

자본주의의 국가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지배적 정치과정의 총체적 담지체로서, 이데올로기적/물리적 지배도구(‘국가장치’)들이 국가의 정치과정을 뒷받침한다.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각각의 주관적 의지와는 무관하게 지배적 정치과정에서 일역을 담당하도록 요구받으며, 모든 가치기준은 자본의 의지에 따라 정해지고 통제된다. 각 개별이 지배적 가치로부터 이탈하려하거나 이탈할 경우 그들은 사회의 지배적 가치기준과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적대시되고 물질적 생활 자체도 곤란에 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사회적 생산력 발전의 성과를 한 계급의 이해에 모조리 종속시키는 데서 인류 역사상 가장 효율적이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II.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 그 자체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사회의 생산관계는 그 사회를 유지/재생산하는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핵심은 생산과정에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의 생산과정이며, 거기에서 생산된 자본은 이 사회 계급관계=사회관계의 재생산의 기초로서 자본가계급 지배의 원천이다. 사회에 대한 자본의 지배, 곧 자본가계급의 지배(정치)는 자본이 이 사회의 물질적 부의 원천으로서 사회 구성원의 생활을 지배함으로써 실현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관계는 자본이 생산되는 직접적인 생산과정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된 것은 자본의 출발점이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거래되면서부터 자본은 비로소 자연(토지)에 의존하던 자본주의 이전 사회를 대체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토지로부터 강제로 쫓겨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유민이 된 것은, 첫째로 그들이 똑같이 먹을 것, 입을 것, 주거공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로 그들이 똑같이 그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야 하고, 그것들을 그들이 똑같이 어떻게든 그것들을 얻어내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 각자 생산한 것을 각자 소비할 수 있는 토지경제는 불가능해졌다.

토지(생산수단)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예를 들어 백정, 갓바치 등 장인들, 방물장수, 가수 같은 이들과 달리 토지(생산수단)에 의존하고 있던 절대다수의 쫓겨난 사람들은 토지로부터도 신분적 구속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그들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영주네 집을 습격해서 영주가 쌓아놓고 있던 것들을 빼앗아 내거나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영주의 기사층, 영주의 마름층, 일부 ‘깬’ 영주들 등등이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만들게 하고 돈(임금)을 주되 만들어진 그 모든 것을 전부 자신이 소유하고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들은 임금으로 받은 돈으로 그 필요한 것들을 되사가게 함으로써 자본의 필요충분조건인 노동력을 그제야 상품으로 등장시키게 된다. 직접적 생산자들이 농노에서 임금노동자로 된 내력이다. 그야말로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나온 자본주의’라고 하겠다.


III. 화폐, 상품, 노동, 그 모든 것의 뿌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화폐의 논리, 상품의 논리, 노동의 논리가 통합되어 있고 그것은 일괄하여 자본의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 뿌리는 자본의 직접적인 생산과정이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자본의 본질을 가장 투명하게 잘 보여주는 것은 물품제조 공장이다. 자본가는 생산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자를 고용한다. 연령별, 성별, 학력별, 종사지위별, 직종별로 차별을 두고 고용한다. 고용한다는 것은 임금을 주고 사서 쓴다는 그 말뜻 그대로, 노동자는 자본가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면서 일을 한다. 자본가가 생산을 조직하는 이유는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의 지휘와 통제를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이 자본주의적 공장은 자본가는 이윤을, 노동자는 임금을 각기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양자에게 공평한 장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처음에 화폐소유자로 등장하여 공장을 차리고 노동자를 고용하였던 자본가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면 이윤이 생산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기계와 원료만 쌓여 있는 공장을 생각해보자. 노동자의 노동력이 투여되지 않으면 그것들은 쓰레기더미일 뿐이다. 기계와 원료들 자체도 어디선가 역시 노동자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들이다. 생수공장의 물도 노동자의 손으로 떠 담아 와서 생수병 속에 담아내야 상품이 된다. 노동자를 고용하고서야 비로소 생산이 이루어지고 상품이 만들어지며 이윤이 만들어진다. 이윤은 최종적으로는 화폐형태로 자본가의 수중에 쌓이게 되는데, 상품이 유통에 들어가 거래되어야 그 이윤이 실현되고, 상품의 한 순환은 그렇게 끝맺음된다. 자본가의 이윤은 자본가가 생산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한 것이라는 점은, 우선 이윤이 상품의 유통과정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노동자의 노동력이 투여되지 않고서는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으로부터 자명한 사실이 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윤이 자본가의 것이 되어 나타나는 것인가. 맑스에 의하여 밝혀진 비밀들: 기계 및 원료와 함께 반드시 투입되는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데, 노동력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노동력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가치와 함께 자본가에게 귀속되고 자본을 재생산하는 잉여가치를 만들어낸다. 노동력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가치는 노동력 상품의 가격인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지불되고 나머지 가치는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는다. 전자는 지불노동, 후자는 부불노동. 전자는 필요노동, 후자는 잉여노동.

노동자가 노동력을 발휘하는 노동의 시간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생산하는 시간과 그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고, 자본가는 이 전체의 가치를 수중에 넣었다가 노동력상품의 대가를 노동자에게 후불제로 지불한다. 노동력 상품은 기계 및 원료와는 달리 자기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유일한 생산요소이고, 따라서 노동력 상품을 구입하는 데 드는 자본은 가치가 변화하는 가변자본, 기계나 원료를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 자본은 가치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생산물로 이전되는 불변자본. 노동자의 잉여노동에 의한 잉여가치는 자본 그 자체의 근원이다.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에 의하여 생산되는 이 잉여가치야말로 자본주의적 기업의 생산의 목적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통하여 나오는 것은 상품이며, 그 상품은 시장에서 거래되어 화폐로 모습을 바꾼다. 즉 잉여가치는 상품을 통하여 자기를 실현한다. 상품의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은 자본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이므로 자본의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이기도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자본의 순환과정은 상품뿐 아니라 화폐의 순환과정과도 불가분의 관계이다.


IV. 자본주의 사회의 인구법칙

한편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초기자본주의 이래 직접적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 창출에 필요한 노동자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유통과정과 유통보조과정에 더 많은 노동자가 분포하게 되고, 동시에 기계에 의한 노동력 대체가 진행되면서 고용에서 배제되거나 불안정하게 고용되는 상대적 과잉인구의 규모를 누진적으로 증대시켜온 점이다.

이 과정은 더 많은 잉여가치(이윤)를 취득하고자 벌어지는 자본 간의 경쟁의 결과로 진행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함께 일어나는데, 신기술개발과 기술혁신 등은 그 과정의 소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와 같이 진행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 생산력 발전의 성과가 이윤의 증대를 열망하는 자본의 본성으로 인하여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일하는 시간 단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적으로 볼 때는, 한편으로는 고용된 노동자의 강화된 노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를 줄이는 데로 이어진다. 또한 한쪽에는 거대한 부가 축적되고 그 대칭으로는 빈곤이 축적된다. 피라미드식의 부의 위계가 형성된다. 거대한 부와 빈곤으로의 사회의 양극화는 부의 피라미드식 위계의 꼭대기 토막이 차지하는 전체 사회적인 부의 총량에서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가운데 토막을 포함하여 밑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그 비중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65년부터 1990년까지 25년 동안 전 세계 소득의 분포를 5분위 소득층으로 구분하여 분석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1965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20%가 소득의 69.5%를 점하였다가 1990년에는 83.4%를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가장 가난한 20%는 1965년에는 2.3%를 점하였다가 1990년에는 1.4%로 낮아졌다. 하위에서 2번째 20%의 경우 2.9%에서 1.8%로, 세번째 20%는 4.2%에서 2.1%로, 4번째 20%는 21.2%에서 11.3%로 각각 떨어졌다(R. Patricio & T.P. Moran, 1997).

상대적 과잉인구의 누적적 증대가 자본의 과잉축적과 동시병행으로 일어난다는 사실 및 그 대응 쌍으로서 빈곤과 부의 양극화가 동시병행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것이며, 자본의 지배가 일국적 국경을 넘어 세계화된 오늘날의 현대자본주의하에서는 더욱 심화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V. 자본의 국제적 운동과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발전의 과정은 먼저 출발한 자본주의 국가 일국에서의 자본의 포화상태가 다른 국가의 자본주의화로 퍼져나가는 자본의 팽창적/침략적 운동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소위 자본의 위기(공황)는 자본의 포화상태의 폭발이며, 그 과정의 반복적 진행이 이른바 경기순환이고, 자잘한 경기순환과정들 속에서 망할 자본은 망하고 망한 자본을 흡수하면서 거대화되는 자본은 거대화되면서 자본의 집중이 이루어진다. 점점 더 소수의 자본가에게 더 많은 자본이 쌓이는 가운데 그 와중에서도 또 자본간 경쟁이 벌어짐과 동시에 더 크게 포화상태가 이어진다. 자본의 가장 폭력적인 포화상태 폭발은 20세기의 두 차례에 걸친 세계전쟁으로 나타났는데, 그 이후에 자본은 더 대규모화된 축적을 계속하였으며, 인류의 생산력 발전에는 도움을 주고 있는지 모르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는 지구상의 곳곳을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못해 우주로까지 자본주의 세계를 확장시켜나가려고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자본주의 사회가 태동한 200여년에 걸친 기간 동안의 생산력의 발전은 그 이전의 어떤 사회보다도 파괴적으로 빠르고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쌓여진 생산력이 부의 양극화로 귀결되어 한쪽에서는 굶어죽는 빈곤의 포화가, 다른 쪽에서는 남아서 썩어도 바다 속에 쳐 넣을지언정 그냥 나눠주는 일은 없는 부의 포화가 계속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복지정책의 핵심을 이루는 우리나라 식으로는 ‘생산적 복지’, 영미식 표현으로는 ‘워크페어’ workfare 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러한 자본의 이윤동기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노동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바로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정책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VI. 자본의 동맹자들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의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체제 자체의 이와 같은 모순은 경쟁을 하나의 원리로 하여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자본은 먼저 사람을 자본의 생산에 조직하고 그들의 의식을 조직하고 그들의 삶 자체를 조직한다. 생산력 발전의 결과를 사회 다수의 구성원이 공유하지 못하고 차별적이게끔 하는 것이 자본의 재생산, 자본주의 사회 재생산의 기초이다. 돈은 돈을 벌고, 부는 부를 낳는다. 가난은 가난을 낳고 그 격차는 생산력이 발전할수록 더 커진다. 경쟁 자체가 이 사회의 공공연하고 정당화되며 일반화된 사회적 전쟁이다. 자본은 마치 쇠를 먹어치우는 불가사리와도 같이 사람들을 자본의 쇠사슬로 동여맨다.

자본의 동맹자는 현실에서 매우 많다. 자본의 쇠사슬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동맹자를 찾아낸다. 노동자는 임금이라는 사슬로, 자본가는 이윤이라는 사슬로 칭칭 동여 메인 채 노동자는 어떨 때는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어떨 때는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필요한 이윤을 생산하고 화폐로서 그것을 실현시키면서 자기 목에 사슬에 메어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너무도 바쁘게 묶여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소위 시민은 중간적인 노자간의 완충노릇을 자칭하며 결국은 자본의 목표에 자신들을 스스로 배열한다. 몇 가지 점을 통해 우리나라의 시민단체들이 대변하는 시민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고 또 어디에 서 있으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구조조정에 대하여 시민단체들은 지금 같은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고 있고, 그 내용으로서 투명경영과 재벌개혁이 더 내실 있게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리해고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소액주주운동 등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 복지정책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인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의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민중이 실지로 살고 있는 실태와 더불어 그 점들을 살펴본다면,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결과 노동자와 민중 가운데 복지정책의 대상이 되는 층이 더 많아졌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인데, 시민단체들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목표하고 있는 현재의 구조조정의 내실화를 추구함과 동시에 복지정책에 관심이 높다는 것은 그들이 확실히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자본의 논리 위에서 노동자와 민중을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정부가 지금 같은 구조조정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해야 하는 불가피한 것이라면서 투명경영이나 재벌개혁 그리고 정리해고제를 비롯한 노동시장유연화 등을 내용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고 있는 사회의 양극화에 대해 복지정책을 들고 나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로써 불가피하게도 시민단체의 시민은 노동자와 민중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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