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16호] 2006년, 우리에게 필요한 변혁의 역능들은 무엇인가.

특집/ 2006년 정세전망 II

현장에서 미래를 제116호 (2006년 2월호)



특집/ 2006년 정세 전망 II


2006년, 우리에게 필요한,
살아남아 발전가능한 변혁의 역능들은 무엇인가.


너부리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살아남아 발전가능한 대안 주체들 되기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활동해 온 연구소와, 또 그 활동을 통해서 알게 된 여러 사람들, 동료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페미니스트가 된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살아남아 발전가능한 주체(viable subjects)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나와 이들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라는 점을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특히 여성운동, 시민사회 운동, 좌파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이들의 삶을 보고 듣노라면, 가장 대안적이되 강한 주체로 살아남는 문제란 매일매일 부딪히는 생존의 문제, 최저생계비 확보라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또한,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면서, 그 현기증 나는 삶의 속도전에 ‘가담’하도록 강제됨에 따라 이런저런 ‘타협’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주변부’ ‘패자’ 혹은 ‘피해자’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이들의 삶과 활동은 꽤 자멸적인 데가 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목도해야 했다.
다른 한편, 스스로를 사회적 ‘소수자’(여성)로 분명히 정체화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생존이란 ‘밑바닥’ ‘겨우겨우’의 의미에서의 생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대안 주체로 강하게 다시 태어나는 과정 속에서 급진적으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타진, 실험하고 열어나가야만 현실을 변혁하는 주체로 살아남을 수 있다. 이것은 자본이 끊임없는 ‘벤처’를 통해서 ‘수성’하듯, 진보 역시 끊임없는 비판과 개입, 자기변화라는 벤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전지구적 유연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신자본주의의 ‘변신’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과 비판, 개입의 작업 역시 또 다른 유연성과 자기변혁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다.

자본의 벤처질에 맞장을 뜨는 진보의 자기변혁:
여성들과 소수자들에게서

지금 여기 진보 진영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유연성과 자기변혁 능력으로 나는 여성들과 소수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섬세한 감응성을 가지고 볼 줄 아는 눈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꼽고 싶다. ‘소수주체들’에게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푸코가 말한 의미에서 “생산적인” 사회권력과 그것의 다양한 억압적,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주체들이 주변화되는 방식들. 보다 의미심장하게는, 이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에 기반해서, 자신들을 주변화하는 권력에 맞장을 뜨면서 이 억압적인 권력이 부과한 주변성을 강력하게(empoweringly) 저항의 거점으로 삼는 도발적 행동·교섭 능력.

[* 아비투스(Habitus):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획득되어진 성향,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의 체계.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가 창출하고 도입함.]

소수자로 살아가기를 적극적으로 선택한 이들이 나날이 실험하는 행동·교섭능력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내가 보기에 그것은 새로운 아비투스*를 벼리어내는 실천과 그것을 뒤받침하고 합법화해내는 이론화, 이데올로기 생산 및 유통 능력이다. 이론이 담당하는 것들 중 하나가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실천은 이론이 벼리어낸 해방적인 관점들과 세계관이 우리들 생활에 딱 들러붙게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남들을 불편하게 하고 그 불편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습관/아비투스를 자리잡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일상적) ‘문화 혁명’일 수 있으리라.
내가 여성과 소수주체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살아남아 발전가능한 변혁의 역능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시대 이들이야말로 사회변혁이란 언제나 자기변혁에 기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가장 잘 체현하는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비판에서 비젼으로: 페미니즘적 차원,
소수주체들이 제기하는 아젠다를 담보하자

새로운 아비투스 운운 하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의 소위 ‘진보’진영의 지리멸렬한 침체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비판이 변혁을 몰고 오는 비전이 되려면, 그것은 비판가와 비판 대상 모두에게 새로운 아비투스를 제공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이 벼려내야 할 아비투스란, 복잡한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에 기반한 유연성을 포함한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사적인 공간에서 처음 터져나온 “신세토로” 속에 담긴 도발적 담론/새로보기(re-vision 혹은 다르게 보기)들이 결국은 공적인 것이 된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반하여 벼려져야 할 아비투스이다. 예컨대, 공/사(=남/녀=정치/일상생활)를 분리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통합적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들을 비합리적인 것, 비정치적인 것으로 폄훼·무시하는 것은 또 다른 억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일 뿐이다.
소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유연성을 가장 큰 ‘덕목’으로 하고 날렵하고 영악하게 움직이는데 비해, 그것에 반대하면서 보다 해방적인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무리들(세칭 ‘진보’ 혹은 ‘좌파’)의 아비투스는 여전히 19세기를 휩쓸었던 계몽주의 훈장질을 못 벗어난 듯 하다는 것이 여성으로서 내가 관찰한 바다. 우리들 역시 ‘계몽’이라는 말뜻 그대로 빛이 늘 필요하지만, 계몽주의 훈장질의 문제점은 대중(과 여성, 소수자)=계몽대상이라는 등식이 은근슬쩍 그러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대중은 멍청한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이익에 충실했다. 그것이 때로 퇴보와 반동의 길이었을지라도.
‘진보’ 진영 내에 관찰되는, 새로운 아비투스와 계속되는 계몽주의적 비판의 길항 관계에는 물론 우리 나름의 역사적 맥락이 있다. 32년에 걸친 군사정권 파시즘의 영향력은 우리들의 일상과 사적인 자아, 공적인 제도, 사회 구조들까지 속속들이 파고든 지라, 87년을 기점으로 뚜렷이 성장하기 시작한 ‘민주’, ‘진보’ 세력 역시 사회적 탄압 속에서 바로 그 탄압의 논리와 아비투스를, 진보세력이 그토록 저항하던 그 아비투스를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적을 미워하면서 내 속에 내장하게 된 적의 아비투스. 근대적 파쇼정권에 맞서서 “행동의 통일”을 외치는 사이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에게 내장된, 상상력과 차이 억압이라는 아비투스. 진보 진영의 경우, 낡았지만 강력하게 내장된 이 억압적 아비투스는 여성 문제 및 소수 주체들의 문제에 대한 (의도적) 무시나 폄하에서, 또한 지난 해 민주노총 비리사건 등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 시대는 가부장적 전지구적 자본주의의라는 가속화된 착취 체제로 흘러가겠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해방적인 흐름들을 지속시키고 생성시키기 위해서는,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에 대한 비판보다 더 준열하게 자기 자신을 비판하고, 그러한 자기비판에 기반하여, 보다 급진적인 자기정체성과 아비투스를 벼려야 한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벤처를 통한 수성 방식은 ‘변혁’세력으로 하여금 끊임없는 정체성 재-급진화 작업과 그에 따르는 새롭고 해방적인 아비투스 계발 및 내장을 살아남아 발전할 변혁의 역능으로서 요구한다. 여기서 다시 기억해야 할 점은, 새로운 아비투스를 최소한 스스로에게도 내장시키지 못하는 비판이란 비판일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아무런 강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며, 최소한 아무런 ‘계몽’의 빛을 던져주지 못하는 그런 비판, 즉 과시용 비판이자 궁극적으로 무비판일 뿐이다.
지금 여기 급진/변혁 운동이 살아남아 발전가능한(viable) 여러 방법들 중에 내가 보기에 지금으로서 최선의 방법은 여성들과 소수자들의 (유물론적) 시각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것(re-vision)이다. 이것은 예컨대, 육체적으로 힘있는(physically abled 소위 “정상인”) 이들이 장애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면, 엄청나게 다른(radical)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아, 여성과 소수 집단의 주체들은 근현대 급진 운동의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다시 말해서, 페미니즘적 차원 그리고 소수주체들이 제기하는 아젠다를 담보하지 못하는 운동은, 살아남아 발전할 가능성(viability)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적으로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도발적이고 전복이며 (그리하여 근본적인 수준에서) 급진적인 시각은 딱히 (본질주의식으로) 소수자의 상황에 처해야만 가능한 시각은 아니다. 자기 계급을 배반하고 혁명적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수많은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을 생각해 보라.
이런 점에서, 적극적인 저항의 지점으로서 소수자(minority) 되기를 선택한 이들에게서 적극적으로 (상호)배워나가는 아비투스와 심성구조(mentality)를 벼리는 게 중요하다.
적당한 비판과 적당한 타협을 통해 주류의 “인정”과 “픽업”(간택)을 은근스레 욕망하는, 소위 자칭 개혁 신데렐라들과 “진보”세력 일부의 공모적 심성구조를 효과적으로 “주변화”시킬 수 있는 아비투스와 멘탈리티는 현재로서는 이런 적극적인 소수자(되기를 선택한 이들)에게 있다.

불협화음 속에서 소통하기, 편파성을 보편화하는
변혁이론의 이데올로기적 둔갑술

비판이란 적대의 선을 분명히 하여 남들을, 그리고 비판자 자신도 불편하게 것이라면, 협상이란 혼탁하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불협화음 속에서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이다. 협상이란 비판이 몰고 온 불편함이 짜증으로 ‘배설’되지 않도록, 즉 사회로 하여금 불편함을 감당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온라인 댓글이나 황우석 사건, 일상적으로는 남녀간의 젠더 (권력) 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여러 반응들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차이, 적대, 벽 등이 주는 불편함을 생산적으로 감당하여 보다 해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짜증으로만 반응함으로써 그 불편함이 주는 생산적이고 해방적인 (잠재)동력을 없애버리곤 한다.
협상이란 전투를 치르는 기술이 아니라, 일방적 폭력이 자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휴전 혹은 정전의 기술이다. 협상에 동원되는/필요한 기술은 경쟁력이 된다.
마지막으로, 비판 및 진보 이론의 정치적 힘이란 그 스스로를 혹은 그것이 만들어낸 개념들, 어휘들, 이데올로기들, 지식-주장들(knowledge-claims)을 “진리”로 유통시키는 이론 자신의 역능에 좌우된다. 보편성이란 객관적이고 부정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바로 편파적인 주의주장들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데올로기의 경지에 올랐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편성이라 부른다. 달리 말해, 이론의 정치적 힘이란, 이론이 특정 집단의 특수한 이해(관계)들을 보편화할 수 있는 이론의 능력에 달려 있다. 루이 알튀세르가 1970년대 쓴 어느 논문(「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데올로기가 그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성을 드러낼 때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이기를 멈춘다. 변혁이론은 이데올로기로 전화될 때라야 현실을 변혁하는 이론으로 탄생한다.
2006년, 살아남아 발전하고 싶은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역능은 무엇인가? 변혁 세력이 살아남아 변혁에 박차를 가할 동력과 영감은 어디에 있을까? 합리성과 진보의 이름으로 백안시되어 온 하위억압들에 대한 집단적 성찰과 자기비판, 이것은 최소한일 뿐이고 하나의 출발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