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의 월간지 현장에서 미래를

[117호]서구 신좌파와 계급중심적 노동정치의 위기

1960~1980년대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현장에서미래를 2006년 3월 117호

지상강좌/ 노동자정치학

서구 신좌파와 계급 중심적 노동정치의 위기:
1960~1980년대 프랑스,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송기철 / 한노정연 연구원


목차

1. 시작하는 말
2. 신좌파의 도전과 구좌파의 대응
- 프랑스: 1968년 5월 사건들과 공산당의 대응
- 독일: 서독: 비의회주의 저항에서 적록연합으로
3. 국가와 자본의 공세: 영국 조합주의의 실패
4. 노동계급의 구조적 변화와 신좌파적 의제들
5. 맺는 말



1. 시작하는 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서구의 좌파들은 거의 한목소리로 사회주의의 몰락과 노동계급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유로코뮤니즘의 주창자로 서구 최대 공산당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을 30년 이상 이끌었던 엔리코 베를링거는 1979년 좌파 역사에 있어서 한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10월 혁명과 함께 시작된 사회주의 발전의 단계가 역사발전의 원동력으로서 그 힘을 소진해버렸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대 폴란드 결의문, 1979년 12월 29일, Enrico, Perlinguer, After Poland, eds., and trans. A. Bronda, S. Bodington, Spokesman, Nottingham, 1982, 16 쪽. D. Sasson,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The New Press. 1996), 730 쪽에서 재인용.
한걸음 더 나아가, 서구의 이른바 신사회 운동과 신좌파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프랑스의 알랑 튀랑은 1983년 출간된 '사회주의의 이후'라는 책에서 “사회주의는 죽었다”라고까지 선언했다. Alain Turaine, L'Apres socialisme, (Paris: Grasset, 1983), 19 쪽, G. Eley,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Oxford: Oxford Uni. Press, 2002), 403 쪽을 참조.
1980년대 서구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은 이른바 제3의 길을 주장하면서 사회주의의 전망을 신자유주의에서 찾기에 이르렀다. 영국의 앤소니 기든스와 함께 신중도 정치를 주장했던 서독 사민당의 대표적 이론가인 페터 글로츠는 전통적 노동운동의 기본적인 원칙들의 패기를 요구했다. 그는 “좌파는 … 국가가 전체 경제를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과도한 확신을 떨쳐버려야 한다. … 시장경제에 대한 통제 계획의 일환으로 좌파는 소비자의 주권, 자유로운 투자결정, 자유로운 재산권의 행사, 분권화된 의사결정 과정을 지지해야 한다.” Peter Glotz, 'What Is To Be Done?' Socialist Affairs, Nos 1-2, 1988, 25-6 쪽. D. Sasson, 위글, 735 쪽에서 재인용.
고 했다.
미국의 사회사가 제프 엘리는 1960년대~1980년대를 지난 100여 년간 발전해온 전통적인 계급중심적 노동운동이 해체되는 과도기로 해석하고 있다. G. Eley, 위글, 397-404 쪽.
그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서구 노동정치의 토대가 되었던 노동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유기성(valencies)들이 변화했다. 소비자본주의, 탈산업화, 탈포드주의, 복지국가의 위기, 조합주의의 실패, 신자유주의, 신좌파의 도전, 신사회운동의 등장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실질적인 정체성, 즉 집단적 행동을 고취하고, 상이한 노동자 집단들을 동일한 연대로 묶어 내었던 사회주의 전통의 조직 신화를 퇴색시켰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서구의 이른바 신좌파 운동은 구좌파의 헤게모니와 동시에 1945년 이후 서구의 친노동적 기제들, 즉 대의민주주의, 관료주의적 복지국가, 소비자본주의, 조합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서구의 계급 중심적 노동정치가 흔들린 것은 신좌파의 도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신좌파의 등장 자체가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 관료주의적 복지국가, 포드주의, 조합주의의 위기의 표현이었고, 바로 신좌파의 도전을 통해 이러한 헤게모니적 기제들의 위기가 전후 계급 중심적 노동정치의 위기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렇듯 문화적, 사회적 결집력이 약화된 조직노동은 탈포드주의적 이행 혹은 신자유주의적 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국가와 자본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1960년~1980년대의 서유럽은 변혁, 위기, 그리고 반동이 교차했던 과도기였다.
이 글에서는 먼저 프랑스와 독일 신좌파들의 도전과 구좌파의 대응에 살펴본다. 신좌파의 도전이 1945년 이후 서구의 친 노동적인 사회적 타협의 보다 포괄적인 위기의 표현이었다면, 영국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위기에서 시작된 국가와 자본의 조직 노동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와 전통적 노동운동의 위기를 추적해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1960년대 이후 노동시장의 재편에서 신좌파가 제시한 의제들의 유의성들을 살펴봄으로써 계급 중심적 노동정치의 구조적 위기를 살펴본다. 아래 서술된 사실들과 과정들의 재구성과 데이터의 분석은 특별한 인용에 대한 언급이 없으면, 다음 문헌에 기초한 것이다. D. Sasson, Donald, 위글, 275-468, 497-593, 645-777 쪽; P. Anderson et al. ed., Mapping the West European Left (London: Verso, 1994), 102-129, 158-232 쪽; G. Eley, 위글, 341-365, 384-404 쪽.


2. 신좌파의 도전과 구좌파의 대응

신좌파 운동의 이념은 1950년대 말 시작된 영국의 반핵운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좌파 반핵운동과 시민불복종 운동의 선구가 된 직접행동위원회가 그 결정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영국의 직접행동위원회는 1960년 초 일련의 대규모 시민불종운동을 조직함으로써 국가권력과 충돌했고 의회주의적 통로만을 고수했던 노동당에 대해 점차 적대적이 되었다. 또한 이들 직접행동운동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에 반대해서 영국 공산당에서 탈퇴한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옥스퍼드 학생그룹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이른바 신좌파 클럽들과 연결되었다. 특히 이러한 과정에서 1966년 레이몬드 윌리엄스, E. P. 톰슨, 스튜어트 홀 등이 중심이 된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이른바 노동절 선언위원회(May Day Manifest Committee)를 결성하고, 신좌파의 정치적 노선을 표방하는 “노동절 선언”을 발표했다. 1968년 출판된 증보판 “노동절 선언”에는 영국 노동당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빈곤, 교육, 불평등, 언론, 경제, 국제 자본주의, 미국 제국주의, 기술격차, 다국적 기업, 냉전, 제3세계, 영국 산업의 쇠퇴, 국가의 역할, 노동조합 등 당시의 주요 현안에 대한 신좌파의 입장이 담겨 있었다. Raymond, Williams (ed.), May Day Manifest, 1968, Penguin, Harmondsworth 1968, D. Sasson, One Hundred Years ..., S. 407 쪽 참조.


프랑스: 1968년 5월 사건들과 공산당의 대응

“노동절 선언”이 출간된 1968년은 국제적인 격동의 해였다. 쿠바 혁명에 대한 열광, 중국의 문화혁명, 베트남 전쟁의 격화, 프라하의 봄, 미국의 흑인민권운동 등 전 세계적으로 급진주의 운동이 갑작스럽게 고양되었다. 서구의 신좌파 운동은 프랑스의 1968년 5월 사태를 통해 혁명적 학생운동과 총파업운동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대중적 급진주의 운동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학생봉기는 범 유럽적인 소요의 일환이었다.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의 대학생들은 체코슬로바키아식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경찰과 충돌했다. 스페인의 대학생들은 교육개혁과 민주주의를 위해 급진적인 노동자들과 반정부 지하단체들과 손을 잡고 프랑코 정권에 대항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캠퍼스점거운동으로 전체 고등교육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독일의 대학생들은 서 베를린에서 개최된 반전국제회의를 통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분노를 터트렸다. 4월 11일 발생한 독일 사회주의 학생회의 지도자였던 루디 두취케에 대한 암살미수 사건은 즉각적인 국제 연대를 낳았다. 그밖에도 영국의 대대적인 반전시위, 벨기에 그리고 스웨덴 대학생들의 급진화는 베트남 사태, 대학의 학내문제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비판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범 유럽적인 급진주의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프랑스의 1968년 운동의 중요한 전개과정을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미 1967년부터 학내문제와 반전시위 등으로 술렁이고 있던 프랑스 대학에 혁명적 봉기의 불꽃을 당긴 것은 3월 말 파리 근교의 낭트르 대학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였다. 3월 22일, 6명의 낭트르 대학 시위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 반대 집회 후 체포되었고, 분노한 학생들은 총장실을 점거함으로써 이에 항의 했다. 마오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그리고 트로츠키주의 학생 그룹들은 좌파의 분파주의를 뛰어넘는 공동투쟁전선을 결의함으로써, 이른바 3월 22일 운동이 탄생했다. “공식적인 지도자도 없고, 공동의 이론적 입장도 없으며, 정치적 신념은 다르지만 행동에 나서고자 하는 공통된 의지와 모든 결정은 총회가 내린다는 데에 대한 협약으로 하나가 된” 운동이었다. R. Frase, et. al. 1968: A Student Generation in Revolt, (New York: Pantheon, 1988), 189, 쪽, G. Eley, 위글, 343, 쪽에서 재인용.
강의 거부, 대학 폐쇄, 주동자 징계 등 학생들과 당국간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1500명의 대학생들이 “노동계급과의 연대에 대한 요구와 함께 자본주의적이며 기술 관료적인 대학, 노동 분업, 이른바 중립적 학문을 단호하게 배격”한다는 내용의 3월 22일 운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D. Caute, The Years of Barricades: A Journey through 1968, (New York: Harper and Row, 1988), 88 쪽. 위글, 재인용.

직접행동과 총회민주주의를 통해 분파주의를 극복한 3월 22일 운동은 노학연대로까지 발전하면서 더욱 역동적이 되어갔다. 연이은 시위와 점거농성, 연대투쟁은 학생단체, 학과 모임, 이웃 모임 등 지역 행동위원회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운동의 공식적인 입장은 기존의 전국 단위의 협회들에 의해 대변되었는데, 정부와의 공식적인 협상 창구로 5월 3일 전국대학생 연합회와 교수노조 대표, 그리고 낭트르 대학생으로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부상한 콘-벤디로 구성된 3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연일 시위들이 이어졌고, 국가는 폭압적인 대응으로 치달았다. 5월 10일 금요일 라디오를 통한 정부와 3인 위원회간의 협상이 결렬되었고, 그날 밤 마침내 파리 시내에서 바리케이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진짜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건들을 쌓아 바리케이드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아마 어리석은 행동이었겠죠.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바로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프랑스 역사에서 바리케이드에 대한 이미지는 1830년, 1948년 그리고 파리 코뮨의 영웅적인 민중봉기의 순간들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리케이드는 상징이며, 빈민과 노동자들이 왕과 반동세력의 군대들에 맞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방어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Fraser, et. al, 위글, 211 쪽, G. Eley 위글, 346 쪽에서 재인용.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바리케이드 전투가 일어난 그 다음날 콘-벤디트는 라디오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촉구했다. 그때까지도 공산당은 극좌파들을 도발자이라고 비난하고, 급진적인 학생들을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사이비 혁명가들이라고 지칭하는 등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면서 공산당의 평당원들도 당연히 시위 대열에 동참했고, 공산당 계열의 CGT(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이하 CGT)도 마지못해 다른 노동조합들과 함께 하루 동안 항의 총파업에 참여했다. CGT의 의장이었던 조루쥬 세쥐는 신좌파와 구좌파의 단결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5월 13일, 80명만이 참가한 시위행진의 선두에 콘-벤디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드골이 집권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고,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드골의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다. 시위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퐁피듀 수상은 경찰을 철수시켰고, 학생들은 다시 개방된 소르본 대학을 해방구역으로 선포했다.
프랑스는 1936년 인민전선의 반파시즘 투쟁 이래 선진 자본주의 사회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광범위한 사회적 동원에 휩싸였다. 변혁의 불꽃은 학생들로부터 노동자들에게로 튀었다. 5월 13일, 낭트에서는 학생들과 CGT 노동자들에 의해 주청사가 점거되었다. 이튿날에는 2000명의 수다비시용 공장 노동자들이 회사 경영진을 감금하고 공장을 점거했다. 크레옹, 플랑, 르망, 그리고 블로네-블랑코의 르노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도 궐기했다. 주말에는 파리의 노동자 구역, 노르망디, 그리고 리옹을 중심으로 파업이 더욱 확대되었다. 도시교통, 철도, 가스, 전기, 우편, 병원, 연안 여객 등 공공부문을 포함하여 자동차, 항공기, 기계, 석탄, 화학, 그리고 조선 등 전 산업에 걸쳐 파업이 일어났다. 항공관제사,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 직원들과 같은 전문 기술직 종사자들도 작업을 거부했다. 5월 18일에는 200만 명이 파업에 참여했으며, 120개의 공장들이 점거 상태에 있었다. 월요일이 되자 파업노동자의 수는 400만 명에서 600만 명으로 불어났고, 다음 날에는 800만 명에서 1000만 명에 육박했다. 총파업을 촉발시킨 낭트의 수다비시옹 공장 노동자들의 활동은 노동자, 농민, 대학생들로 구성된 파업 위원회가 5월 27일 시청을 접수하고, 지사와 시장을 교체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대중적 차원에서는 두개의 운동이 하나가 되었던 반면에, 구좌파의 지도부는 조심스럽게 두 운동의 분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공산당은 5월의 사건들에 휩싸인 산업 현장의 당 조직들을 지키는데 전력했고 외부로부터 유입된 혁명적 변화에 대한 상상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럽에서 가장 낮았던 프랑스의 노조 조직율은 20%에도 채 못 미쳤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공산당은 외부적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고자했다. 그들은 5월 한 달 동안 임금인상과 함께 대중적인 좌파정부의 수립을 통한 공화국의 수호라는 자신들의 노선을 고집스럽게 반복했다.
5월 18일, 개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혼란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드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폭력 사태는 계속되었다. 증권 거래소 방화와 경찰서들에 대한 공격과 함께 다시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투석전이 벌어졌다. 낭트와 리옹 같은 도시들에서는 국가 권력이 통제력을 상실했다. 마르세유는 총파업 중이었다. 그런 가운데 5월 24-25일 양일간 진행되었던 노사대표들과 퐁피듀 수상간의 협상에서 최저 임금의 35% 인상, 전체 임금의 10% 인상, 주 40시간제 확대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CGT의 세쉬는 결정적인 돌파구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CGT의 상징적인 아성이었던 빌랑코의 르노 자동차 공장의 파업노동자들은 극적으로 이 합의안을 거부했다. 다른 곳들에서도 노동자들의 반대가 잇달았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은 삶의 질의 변화였다. 즉 자존심과 공동결정, 그리고 일상사에 대한 더 많은 자율권, 이른바 오토게스티용autogestion, 즉 자주관리였다.
자주관리는 1968년 5월 프랑스의 노학연대의 이념이 되었다. 그것은 공장 중심의 노동자 통제, 자율경영, 협동조합, 회사의 법인화 대한 요구와 참여적인 의사결정, 회계공개, 분권적 경영, 전반적인 노동조건의 개선을 통한 경제 민주화를 추구했으며, 관료적인 국유화와 CGT식 조합주의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다는 점에서 반국가주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1945년 이후의 좌파에 대한 거부였다. 그것은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에 회의적이었으며, 자유주의적 절차주의가(선거투표, 의회주의적 대표제, 법치주의)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를 보장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오토게스티용은 대의민주주의의 헤게모니 원칙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반관료주의, 지역적 자율성, 상시적 총회민주주의, 일상의 정치는 3월 22일 운동의 이상이었다. 콘-벤디는 프랑스 신좌파의 이념이었던 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 후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구조들을 바꾸어야만 했다.” 그러나 1968년, “우리는, 혁명의 과정은 일상적인 삶에 있어서의 변화의 총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었다. …. 우리는 후세의 삶을 위한 변화, 혁명을 위해 죽은 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위한 변화를 제안했다.” G. Eley, 위글, 352 쪽에서 재인용.

구좌파와 신좌파는 서로 몰이해를 넘어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변화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의회주의와 경제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전형적인 구좌파였다. 공산당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 파업운동이 불붙자, 공산당의 조직력이 힘을 발휘했다. 퐁피듀의 임금인상안이 거부당하자 공산당은 더욱 큰 목소리로 정권교체를 촉구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대응은 수동적이었으며,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구조적 원인이 있었다. 프랑스의 노동조합은 조직율이 낮았고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다. 이러한 취약성 때문에 CGT는 모든 것을 의회주의적인 책략에 걸었던 공산당의 정치적 노선에 동조했다. 공산당이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고, 혁명적 열정에 등을 돌렸던 반면에 미테랑은 당연히 대중적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흡수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호간의 기회주의는 연합전선의 전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행태는 반사적인 것이기도 했다. 구좌파는 야당으로서의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직접적인 행동과는 무관하게 의회주의적 겉치레만으로 억눌림을 당하는 사람들의 대변자로서의 입지를 지키고자 했다.
공산당의 의회주의 전략에는 3가지의 치명적인 흠이 있었다. 첫째, 그들의 의회 동맹세력들이었던 사회주의 정당들은 우왕좌왕했다. 둘째, 공산당이 제시한 좌파 연합에는 학생들이 배제되어 있었다. 공산당은 극단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질서 정당임을 자처했다. 셋째, 이 두 가지 요소는 드골에 대한 대안으로서 공산당에 대한 신뢰를 감소시켰다. 질서 영역에서 공산당은 결코 그와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드골 정부는 무력화되었고, 국민의 다수가 변화를 희망하는 상황에서도 공산당은 이러한 힘을 포착하는데 실패했다. 파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조차 자율경영, 구조개혁, 사회와 대학개혁 프로그램과 같은 공허한 문구는 단지 임금인상 요구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중운동과 기존의 좌파 지도부간의 간격은 이제 확연히 드러났다. 전자는 전국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반 중앙집중주의라는 이상은 국가의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무기력한 것이었다. 후자가 추진했던 범 좌파 정권의 수립은 정파간의 이해 차이로 인해 지지부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골은 반격을 가했다. 5월 30일, 군부의 지지를 확인한 그는 라디오를 통해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짧고 위협적인 발표를 했다. 그는 재선거를 위해 의회를 해산했고, 전체주의적 공산주의에 대항한 “시민행동”을 맹세했다.
공산당과 CGT가 취했던 태도를 볼 때,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가 급격히 냉각한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들은 양분되었다. 시위 노동자들과 일자리에 복귀한 노동자들 사이에는 적대감이 들끓었다. 좌파 진영은 정상적인 정치가 다시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측과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측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집권 연립정부는 6월 23일에서 30일 사이 실시된 선거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제 5 공화국의 선거체제와 (드골주의파에 대한 지지율은 40%였지만 그들이 차지한 의석 규모는 60%에 달했다.) 질서 확립이라는 반공주의적 수사에 좌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좌파 정당들은 총 102석을 상실했다. 정부여당은 전체 485석 가운데 358석을 획득했다. 5월의 사건들을 주동했던 21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선거권이 없었다.
1968년 이후 프랑스 좌파 정당들 사이에서 주도권은 공산당에서 미테랑이 이끄는 사회당으로 넘어갔다. 1971년 새롭게 창당된 미테랑의 통합 사회당은 1974년 자주관리주의자들과 합당에 성공했고, 신브레즈네프주의로 급속히 사양길을 걸었던 공산당과 일시적이나마 공동 프로그램에 합의함으로써 1981년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서독: 비의회주의 저항에서 적록연합으로

기존의 노동정치에 대한 신좌파의 도전은 해당 국가의 정치구조, 특히 주류 사회주의 정파들 간의 세력관계, 경제적 조건, 그리고 조합주의의 성격 등 여러 가지 변수들에 따라 상이하게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조합주의는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본은 유달리 권위주의적이었다. 반면에 패전 독일의 경우, 냉전주의, 성공적인 경제재건, 좌파 진영내의 사민당의 헤게모니는 강력한 사회적 조합주의를 형성시켰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보다도 강력한 전후 노동정치의 벽에 부닥친 서독 신좌파의 도전은 테러리즘적 유혹,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거쳐 독자적 정당 건설로 귀결되었다.
서독에서도 1968년 급진적 학생운동과 주류 좌파 간의 대립은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사민당은 재무장, 핵무기배치, 그리고 비상조치법에 반대했던 초기의 좌파 비판자들을 체계적으로 주변화시켰다. 사민당은 당내 학생조직에 대해서조차 철저하게 근시안적으로 대했다. 독일 사회주의 학생회 (Sozialistische Deutsche Studentenschaft: 이하 SDS)는 이미 1960년 축출되었고, 후계조직인 사민주의 고등교육연합회도 1969~1970년 좌경화함에 따라 당 밖으로 쫓겨났다. 1969~1972년 학생운동은 폭력화되었고 이러한 고압적인 태도에 의해 더욱 불붙었다. 특히 베를린 시의 집권 사민당 시장들은 경찰의 불법적인 행동을 방조하고, 학생들을 중상 비방함으로써 시민들의 반 SDS 히스테리를 부추겼다. 가두 투쟁, 도발적인 반 부르주아적 저항문화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저항적 급진주의는 반격을 불러일으켰다. 학생운동의 직접행동 형태, 즉 비의회주의 반대운동(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 APO)은 1949년 헌법의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기초한 사민당의 의회주의에 대한 반기였다.
기존의 정치체제에 대한 거부감은 반파시즘과 반권위주의로 표현되었다. 사민당은 1966년 12월 과거 나치 당원이었던 K. G. 키징어가 이끄는 기민당과의 대연정에 참여했는데, 이는 사민당의 얼룩진 성격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학생운동의 불복종문화는 독일의 전쟁세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침묵의 벽을 무너뜨렸다. 당시 15세였던 한 소년의 증언이다.

(나는) “격앙되어 집에 돌아와 그것에 (학교에서 들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대한 이야기: 역자) 대해 말했죠. 이에 대해 아버지는 무턱대고 1945년 이후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무조건 나치 과거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부했습니다. 동유럽의 공산체제는 현재 존재하는 것이고 과거는 과거라는 식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한 번도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고, 우리 사이에 무언가 거리감이 생겼고, 나중에 그것은 나와 나의 형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 간의 거리감으로 확대되었습니다.” Fraser, et. al., 위글, 87 쪽, G. Eley, 352 쪽에서 재인용.


그러나 1968년 절정에 달했던 직접행동은 갑작스럽게 붕괴했다. 4월에 일어난 루디 두취케에 대한 암살기도는 전국적인 폭력사태를 유발했고, 5월에는 비상조치법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이 일어나지 않자 노동자와 학생간의 동맹에 대한 희망이 급속히 수그러들었다. 규율과 “당 건설”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했다. 하지만 무수한 마오주의 조직들 이외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스파르타쿠스파, 합법화된 공산당 학생조직, 수많은 절충주의적 급진 마르크스주의 지역조직들, 페미니즘 단체들, 무정부주의적 반문화주의와 대안주의 집단들이 난무했다. 이러한 파편화는 우호적이었던 광범위한 대중들과 비정치적인 학생과 젊은이들을 급진주의자로부터 격리시키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중도 좌파 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잠깐 동안이나마 민주적 개혁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석유 위기로 인해 촉발된 경제불황, 브란트 수상의 사임과 완강한 보수주의자인 헬무트 슈미트의 수상직 승계가 이어졌다. 1972~1974년 이후 반 테러정책과 공직자들에 대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헌법준수 서약이 실시되는 등 정부정책은 다시 보수화했다. 사민당은 1968년의 열정을 결집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좌파는 다시 분열되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과 달리 독일의 급진주의 세대는 기존의 좌파정당들로 복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독의 경우, 비의회주의 좌파와 집권당이 된 사민당 간의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여기에는 테러리즘을 둘러싼 극한 감정적 대립과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의 활성화라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1970년대 서독의 환경운동은 시민적 자유를 위협하는 대규모 핵에너지 개발계획 반대 활동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환경운동과 평화운동으로 인해 사민당의 민주적 신뢰성은 실추되었고, 비의회주의 행동은 활력을 되찾았다. 사민당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시작된 시민발의들은 극단주의자의 소행으로 죄악시되었다. 시위자들은 풀뿌리 민주주의에 환호했던 반면 정부의 대응은 권위주의적이었다. 1968년 투쟁 때와 같은 갈등이 생생하게 재현되었지만, 상황은 현저하게 다르게 전개되었다. 과거의 대립에서 SDS는 고립되었고, 광범위한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은 사민당에 편에 가담했으며, 비의회주의 반대운동은 적군파(RAF)를 포함한 테러리즘과 폭력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제 반테러리즘의 명목 하에 비의회주의적 행동을 반 헌법적 범법행위로 몰아세운 것은 시위자들을 참여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전국적으로 결집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1980년대 평화운동은 독일이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최대 규모의 사회운동으로서 믿을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한 사회계층들이 참여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독일의 평화운동은 범정파적, 범계층적, 범세대적 풀뿌리 민주주의운동이었다. 운동의 중심은 일주나 격주에 한번씩 20~50명의 회원이 정기적 모임을 가졌던 6000여개의 지역단체들이 우동의 중심이 되었다. 참여 단체들 간의 관계는 비위계적인 네트워크의 형태를 뛰었다. 평화운동은 일상사의 정치화 속에서 1969년의 반문화적 가치를 실현했던 대안운동으로 점차 확대되어 나갔다. 규율, 생산성, 경쟁, 그리고 상업화된 사회적 관계의 규범들을 거부하고, 실험과 즉흥성, 그리고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뮌헨, 그리고 쾰른과 같은 대도시들의 대안 공동체를 선호하는 생활방식들을 뒷받침하는 무단주택점거운동과 코뮌들, 자조단체들, 상담소, 병원, 교육센터들, 디자인과 미술작업실, 영화관, 책방, 인쇄소, 식당, 카페, 대안적 사업체들, 서베를린의 일간지 타게스차이퉁(일명 TAZ)과 같은 대안언론들이 생겨났다. 1982년 서베를린에서만 하더라도 1500개의 자조단체들이 있었고, 이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대안프로젝트 수만도 11,500개에 이르렀다.
이러한 신사회운동의 활성화와 풀뿌리 민주주의에 힘입어 서독의 신좌파 세력들은 전국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다. 특히 사민당의 고집, 성장정책에 대한 슈미트 정부의 집착, 완강한 핵에너지 사용 정책, 철저한 준법주의 정책, 무비판적인 나토(NATO) 정책 등으로 인해 새로운 정치활동의 장이 열렸다.
1978~1979년 생태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지방의회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1979년 6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 “녹색 무지개 정치연합 (Bunte Politische Union - Die Grünen)”이라는 이름으로 출마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임박한 연방의회 선거를 위해 친환경적이고 사회적인 풀뿌리 민주주의와 비폭력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1980년 “녹색주의자들”이 - 당이란 이름은 의도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 정식으로 출범하였고, 점차 당의 기본정책과 구조에 대한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그 무렵 우익 환경론자들은 떨어져 나갔고, 서베를린,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브레멘과 독일 서부지역 출신 좌파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환경과 평화문제들에 대한 합의는 남성동성애자들의 권리, 주 35시간제, 이주자문제, 낙태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녹색당의 출범은 1953년 이후 매우 안정적인 3당 체제였던 서독의 정당체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정당의 의회진출은 의석수가 아무리 적다하더라도 중요한 정치적 재편을 의미했다. 1980년 처음 참가한 연방의회 선거에서 녹색당은 겨우 1,5%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녹색당은 서베를린과 함부르크 주 의회 선거에서는 각각 7,9%와 7,7%를 획득했고, 니더작센주와 헤센 주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 1984년 실시된 다음 연방의회선거에서 녹색당은 연방의회에 진출했고, 총 11개 주 가운데 6개 주에서 5%의 최저 득표율을 넘어섰고, 수많은 기초 단체선거들에서 10~15%를 득표했다. 함부르크와 헤센 주에서는 적록연립정부의 구성도 가능해졌다. 불과 2년 만에 환경론자들, 68세대들, 급진좌파들, 실망한 사민주의자들이 독일 정치와 좌파의 지형을 변화시킨 정치적 연합을 구축했다.
녹색당 지지자들의 직업과 교육, 그리고 세대별 배경을 살펴보면, 이른바 1968년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성운동은 중요한 교량 역할을 했다. 1987년 녹색당 의원 중 여성이 다수를 차지했고, 1년 임기 당 지도부는 모두 여성들로 구성되었다. 녹색당의 정책은 반권위주의, 지배와 소외에 대한 비판, 참여와 직접행동, 전복적인 정치 스타일 등의 비의회주의 반대운동의 이상들의 요약이었다. 대안적 생활방식에 대한 반문화적 신념은 여성주의적 의식의 고양만큼이나 이러한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녹색당은 중앙집권적인 정당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비의회주의 반대운동은 최초의 신 사회운동이었다.
녹색당은 신좌파와 구좌파의 대립의 결과였다. 그들의 도약기는 평화운동의 절정기와 일치했다. 환경론자들과 평화주의자들 사이의 이른바 환경 평화연합, “에코-팍스”(Eco-Pax)는 자연스러운 국면이었다. 1980년 크레펠트에서 개최된 포럼에서 발표된 미사일 배치 결사반대 선언문에 반년동안 80만 명이 서명했고, 그 후 1년 동안 서명자의 숫자는 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평화운동이 절정에 달했던 1983년 10월에는 4개 도시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총 100만 명이 참석했고, 일주일 동안 개최되었던 각종 행사에 참석한 사람의 숫자는 총 200만~400만 명에 달했다. 연방의회가 미사일 배치를 의결한 후 운동은 수그러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4년 가을에도 여전히 40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미사일 기지들을 둘러싸는 인간 띠를 형성했으며, 이듬해 부활절 행진에는 45만 명이 참석했다. 이러한 엄청난 동원은 녹색당이 선거에서 거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고, 연방의회 진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83년 사민당 정권의 붕괴 이후, 사민당은 지방 정부 차원에서 어쩔 수 없이 적록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신좌파와 구좌파의 불가피한 정치연합을 마지막까지 거부한 세력은 사민당의 우파, 즉 조직 노동운동의 보스들이었다. 베를린 자유대학의 원로 정치학자인 리히하르트 뢰뵌탈의 주장에 따르면 “당은 둘 중 하나, 즉 산업노동자 중심의 계급정치를 재확인 할 것인가 아니면 신사회운동을 선택할 것인가 명백히 해야 한다. 둘 다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G. Eley, 위글, 422쪽에서 재인용.
사민당의 기본가치위원회 공동의장이자 당의 원로였던 그는 1980년대 독일 사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조직 노동운동의 목소리를 대변한 사람 중 한명이었다.

3. 국가와 자본의 공세: 영국 조합주의의 실패

영국의 경우, 신좌파의 도전은 노동정치를 비켜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영국에서도 신좌파의 영향은 영국 노동운동의 변화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났다. 앞서 살펴본 프랑스, 독일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영국의 신좌파와 계급 중심적 노동운동과의 관계에는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 영국에서는 프랑스와 독일과 달리 국가와 신급진주의 세력들의 직접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의 대중적인 신좌파 운동은 비정치적인 반문화운동과 여성운동, 평화운동, 환경운동 등 이슈 중심의 신사회운동으로 분화의 길을 걸었다. 둘째, 영국에서는 다른 서유럽국가에서도 신좌파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70년대의 장기적 불황이 충격적으로 찾아왔다. 따라서 영국의 경우, 구좌파의 조합주의는 일찌감치 시험대에 올랐고, 조직 노동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공세는 서유럽의 그 어느 국가들에서보다 격렬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급진적 학생운동이 1960년대 자본의 황금기 말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노동계급의 전투성과 극적인 결합을 시도했던 반면에, 영국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조합주의의 실패와 대처리즘으로 인해 급격히 소진되어 버렸다. 전후 사회적 합의의 위기는 신좌파의 도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지국가의 위기와 조합주의의 위기를 통해 전후 영국의 노동정치에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1945년 이후 영국의 조합주의는 케인즈주의의 확고한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노조 지도자들은 국가적 성장정책의 책임 있는 참여자가 되었다. 거대한 조합들은 철저하게 과두적 조직처럼 운용되었다. 노동조합들은 조합원들을 자발적으로 감시했으며, 철저하게 반공주의적이었으며, 순응과 인금인상에 주력하는 경제주의적 문화 속에서 반대파들은 철저히 억눌림을 당했다.
상황은 급진적인 공장대표자들이 통제에서 벗어남에 따라 바뀌게 되었다. 중재절차를 통해 봉쇄되었던 파업이 1963년 이후 급증하기 시작했다. 1963~1970년 사이 파업률이 두 배 이상 증가했던 것은 현장에 대한 주도권이 노동조합본부와 상근간부에서 현장대표로 넘어간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61년부터 1978년까지 현장 대표의 숫자는 9만 명에서 25만 명으로 급증했다. 동시에 공공부문의 노동조합이 엄청나게 팽창했다. 전국공공연맹(National Union of Public Employees: 이하 NUPE)의 조합원 수는 20만 명에서 70만 명으로 증가했고 중앙과 지방공무원연합회(National and Local Goverment Officers Association: 이하 NALGO)의 조합원 수도 27만4,000명에서 78만2,000명으로 불어났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보건의료 서비스 부문의 노동자 숫자는 37만 명에서 130만 명으로 증가했고, 조직률은 10년 사이 38%에서 74%로 늘어났다. 이로 인해 온건하지만 투철한 계급의식과 노동당에 충실한 고전적 산업들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기반을 둔 기존의 합의들은 도전을 받았다. 현장대표들은 전투적이고 효율적인 협상단위를 배치함으로써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의 관계에 새로운 폭발력을 불어 넣었다. 동시에 공공부문의 노동조합은 사용자인 국가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64~1970년과 1974~1979년에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정치적으로 총연맹(Trade Union Congress: 이하 TUC)의 집중된 중앙의 권위에 의존한 국가적 조합주의를 강화했다.
이러한 조합주의의 야심 찬 형태가 총연맹과 함께 추진한 이른바 자발적 소득정책이었는데, 1966년 제정된 물가와 소득에 관한 법률은 이 정책의 실패에 대한 입법적 대안이었다. 이 시도 또한 1967년 실패로 끝났다. 비공식적인 파업들이 끊이지 않았고,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이 주도한 인금인상 투쟁으로 말미암아 합의주의 정책은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다. 1969년 노동조합들은 파업에 대한 국가적 규제안마저 거부했는데, 이로 인해 노동당은 격심한 내홍을 겪게 되었다. 1970~74년 보수당 정부의 실패로 인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헤롤드 윌슨 수상과 새로운 노동당 후임 수상이 된 제임스 캘러헌은 또다시 노동조합의 협력을 구했는데, 이번에는 운수노동조합 위원장이었던 잭 존슨이 구상한 “사회협약”(Social Contract)을 통한 시도였다.
사회협약은 4단계로 나누어진 임금억제, 즉 저임금 그룹에 유리한 일률적인 임금인상에서 시작하여 단계별로 인상률이 낮아지는 임금억제방안을 제시했다. 노동조합들은 이 합의를 준수했지만 그 후 1978년 4단계는 5%라는 비현실적으로 낮은 인금인상에 묶여있었다. 임금억제 정책에는 1978년 11월 2달간의 파업을 종식시키기 위해 포드 자동차 회사가 임금을 16,5% 인상함으로써 구멍이 뚫렸고, 뒤이어 17~20%의 임금인상을 이룩한 트럭운전사들의 전국적인 파업이 발생하였다. 공공서비스 노동조합들은 일일간의 파업을 단행했고, 병원 종사원과, 청소부, 공무원, 공원묘지 직원들의 파업으로 시민들은 엄청난 불편을 겪었다. 이러한 “불만으로 가득한 겨울”로 인해 캘러헨 정부가 붕괴했고, 1979년 5월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함으로써 보수당은 향후 18년간 집권하게 되었다.
사회적 협약이 실패한 것은 정치적 개혁의 이득을 얻어내지 못한데 있었다. 정치적 성과와 결부되지 않은 소득정책은 단지 일방적인 임금억제로 전락했다. 운수노동조합위원장이었던 프랭크 큐진스는 협조와 사회주의적 발전을 연결시키면서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언급했다. “우리가 사회주의정권을 수립하고 경제계획정책을 쟁취했을 때, 임금을 억제해야 한다고 조합원들을 설득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고 그것은 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될 것이다.” G. Eley, 위글, 389 쪽.
이렇게 본다면, 사회협약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협약은 히쓰 수상의 1971년 노사관계법의 폐지와 노동조합 권리의 증진, 산업민주주의화 방안들을 담고 있었다. 가격통제와 공공투자, 국유화, 자본통제, 복지국가의 강화를 통한 과감한 케인주주의와 식품과 교통비 보조, 공공주택의 확대, 개선된 사회복지서비스, 공정한 사회적 재분배, 연금생활자와 저소득계층에 대한 지원 등이 제시되었다. 잭 존스는 이 프로그램을 절실하게 필요한 사회적 이상주의와 윤리적 추진력을 갖춘 대안적인 경제 전략으로 평가하면서 지지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위기관리만 염두에 두었다. 1975년 6월에 실시된 유럽경제공동체 가입에 관한 국민투표와 1976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위기 이후 노동당의 좌파는 완전히 열세에 몰렸다. 노동조합, 노사관계, 성차별금지, 작업장내 안전과 건강, 고용보호에 관한 몇 가지 법안들이 통과되었고, 청년실업해소를 위한 정책들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가 불황에 손을 들고 좌파를 일소하기 전의 밀월과 같은 것이었다. 1978년이 되면서 협약에 제시된 것 중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켈러헨은 1978~1979년 일상생활의 엄청난 혼란을 가져온 파업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필요했던 모든 도덕적 권위를 포기한 상태였다.
아무런 정치적 대가도 얻어내지 못한 채 노동조합들은 잘못된 경제주의로 복귀하고 말았다. 쿠진스는 “그 어느 누가 요구하던 간에 우리는 결코 임금억제를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위글,
“자유로운 단체협상”은 영국노동운동의 마그나 카르타였다. “임금과 봉급수준의 법적인 강제”는 “자유인과 자유사회의 자유협상에서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정부가 민주주의에서 그와 같은 기본원칙을 빼앗는다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산업 협상은 법적인 규제의 대상이 아니다: “자유로운 노동조합운동을 법을 통해 통제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민주주의는 실현할 수 없다.” 그것은 “전체주의의적인 통제의 시작”이다
노동조합주의자들의 고집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도 사회정치적 성과는 필수적이었다. 전후 생산성 향상과 경제재건이라는 구호들이 민주주의의 강화, 복지국가, 생활수준의 향상, 공공선이라고 하는 비전과 조화를 이루었던 것처럼 드높은 진보적 논거들이 명확히 제시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파에서 좌파에 이르기까지 아마도 모든 조합주의자들이 커다란 문제없이 임금억제를 감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노동조합은 결사적으로 원칙적인 입장으로 복귀했다. 단호한 우파였던 한 노동조합 대표가 1974년 파업에 던진 물음이었다. “일주일에 5일 갱도에서 석탄을 파는 광부의 임금이 얼마나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장관자리에 앉아 있는 저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사회에서 법을 파기하는 저들은 누구인가?” 위글, 390 쪽.

자본과 국가는 현장대표자운동으로 표출된 새로운 노동운동의 급진주의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첫 번째 것이 총연맹에 더욱 의존적인 된 국가적 조합주의의 강화였다면, 두 번째 대응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근간인 전국적인 산별협상체제에 대한 공격, 즉 공장과 기업단위의 협상이었다. 노조의 권력을 중앙간부에게 재 집중시키는 것이 현장대표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면, 현장대표들을 경영진에게 내던지고 규정으로 둘러싸이게 만드는 또 다른 방식이 있었다. 한 현장 조사에 따르면 1970년대 명문화된 내규를 갖춘 작업장의 수가 전체의 50%에서 80%로 늘어났다. 1974년 현장대표가 일반화되면서 이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생산성과 직무평가제도 마찬가지 기능을 했다. 회사단위의 협상은 기술자노조와 일반 운수연맹과 같은 산별노조의 힘과 현장대표의 역할 모두를 약화시켰다. 최종적인 합의들에서 해당 노조들은 임금, 연금, 자사주식, 개인보험등과 같은 사내혜택의 대가로 파업제한 조항들을 포함하여 경영권에 양보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협상모델은 거대기업들을 국가적인 노사관계체계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나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갈등과 단호한 정치적 의지가 필요했다. 현장대표들과 거대조합들에게는 너무 많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1979년 이후 마가레트 대처 수상 정부시절 바로 이러한 것이 단행되었다. 경제계와 중산층의 여론에 힘입어 대처는 문자 그대로 노조와 전쟁을 벌였다. 1980년, 1982년, 그리고 1984년 제정된 고용 관련 법률들에 의해 파업권과 그 밖의 권리들, 그리고 노조의 선거와 의사 결정에 제약이 가해졌으며, “자유로운 단체협상”에 대한 정의가 법에 의해 협소해졌다. 그 중심에 있었던 것이 1984~1985년 광산노동자 대파업이었는데, 1972년과 1974년의 파업들로 히드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던 바로 이 과격한 거대노조를 파괴하는 것이 대처 정부의 목표였다. 대처는 광산을 폐쇄하고 파업노동자들에게 대대적인 경찰력을 투입함으로써 충돌을 불사했다. 분규는 영국을 누가 다스리느냐가 걸린 전투가 되어버렸다. 파업이 민주주의의 시험대이며 노동운동의 생존이 걸린 것이라고 주장했던 광산노동자들에 대해 노동운동과 영국 노총의 대응은 냉랭하기만 했다. 1985년 3월 파업이 패배로 끝이 났고, 그 이후의 노동자 투쟁들은 - 1985~1986년 인쇄공들에 대한 공격과 1992~1993년에 단행된 마지막 남은 광산들의 폐쇄 - 단순한 피날레에 불과했다.
1970년대 꾸준히 증가한 영국의 실업률은 1984년 대처정부 때 13.2%로 급증했다. 노조의 조합원 수는 초기에는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1953년부터 1968년까지 변동이 없었던 조직률은 1974년 50%를 넘어섰고, 1979년에 55.4%에 전체 조합원의 숫자가 1,350만 명에 이르면서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그 이후 조직률은 급격히 떨어지면서 1990년에는 전체 노동력 중 37.7%가, 숫자로는 990만 명만이 조합원이었고, 1997년에는 조직률이 30%에 불과했다. 몇몇 노동조합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광산은 1993년 사실상 사라졌고, 대처의 수상 당선 5년 만에 일반운수연맹은 조합원의 29%를 잃었으며, 다른 거대 노조의 조합원 수는 24%에서 절반정도 감소했다.
대처리즘의 승리는 영국의 조합주의가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였다. 영국의 조직노동이 경찰의 곤봉에 의해 수세에 내몰린 채 실업, 법적인 탄압과 그리고 광산노동자의 파업에 의해 손발이 묶이면서 1967-1968년 이후 총연맹 내 진보세력의 중심축이었던 기술자노조와 일반운수연맹 모두가 우경화했다. 양 연맹과 함께 영국의 3대 산별연맹에 속했던 전기배관공노동조합(Electrical, Electronic, Telecommunications, and Plumbing Union: 이하 EETPU)도 회사의 이윤을 최우선시 하고 연대라는 보편적 윤리를 무시한 채 최상의 협상결과만을 추구하는 등 크게 변화했다. EETPU는 국가의료보험에 대한 노동계의 한결같은 입장을 배신하고 개인의료보험에 대한 협상을 벌였다. 1985~1986년 인쇄공 파업이 일어났을 때 EEPTU는 파업의 금기사항들을 깨면서 대체인력의 투입을 받아들였다. EEPTU는 상업노동조합의 선구자가 되었다. “자유시장은 노동조합에게도 존재한다고 한 간부가 말했다. 가장 잘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위글, 391 쪽.

이와 같이 대처식으로 변한 노동조합의 기풍은 전후 조합주의적 합의의 발판이 한번 무너지면 과격한 경제주의가 얼마나 쉽게 반좌파적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전체 단체협상 중 절반이 회사별, 혹은 공장별로 단일 사용주와 체결되었다. 단체 협약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의 규모는 1984년 68%에서 1990년 51%로 줄어들었다. 거대 산업노조들은 전 산업 차원의 집단주의를 포기하는 대신에 가장 많은 이윤을 내는 업종의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회사단위의 협상을 채택했다. 이러한 새로운 모델과 대조적으로 전국적인 협약들은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들, 노동조합이 취약하거나 노동시장의 조건이 불리한 노동자 집단들에게 적용되었다.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회사 안에서, 이상적으로 사업장 단위로 협상하는 것이 문제를 가장최소화 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의 전국적인 힘을 완전히 투입할 수 없었던 반면 사용자들의 중요한 통제력은 유지되었다. 회사단위의 협약은 전국적인 임금률이 아니라 지역적인 성과를 강조한 것이었다. 전체 급여에서 상여금과 성과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졌고, 기본급은 전체적으로 낮아졌다. 전체 단체협약들 중 이와 같은 급여체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대 15%에서 절반정도로 높아졌다. 기업들은 직접고용 노동자들을 높은 임금과 고용이 보장된 핵심적인 기간노동자층으로 감축한 반면에 그 나머지를 고용과 임금, 노동조건이 더욱 악화된 외주노동자들로 채웠다. 기간 노동자들은 회사연금과 의료보험, 여가 시설, 자사주제도, 협의방식 등등을 통해 회사와의 일체감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구좌파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거대 산업노동조합들이 상업적 노동조합주의와 분파주의로 뒷걸음질 치고 있을 때 점차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진보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처리즘과 함께 개인주의와 시장이 환호 받던 시기 EETPU의 상업적 노동조합은 기술자노동조합과 같은 다른 숙련노동자조합들을 끌어들이면서 현대화의 선구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캘러헌 정부의 배신과 대처의 복지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분노하고 있던 저임금 노동자들은 다른 식으로 대응했다. 공공부문의 노동조합은 급성장하고 있었고, 좌경화했다. 이는 지역 노동운동 조직들을 (노동운동조합 위원회들과 노동조합 지부들) 활성화했다. 영국의 경우, 신좌파와 노동운동은 지역 차원에서 결합되기 시작했다.
이들 노동조합은 지방정부에 대한 보수당 정권의 공격, 복지와 사회보장의 삭감, 병원 폐쇄, 서비스의 민영화로부터 공공부문을 앞장서서 지켜나갔고 NUPE는 노동당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NUPE는 급진적인 노동운동의 관심이 전통적으로 적었던 최저임금제를 우선과제로 삼았고, 동일임금, 차별금지, 아동보육법, 다른 여성노동자와 관련된 이슈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사회적 대표성을 강조했다. NUPE는 행동과 참여 그리고 민주적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정치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공공부문의 노동조합들은 EETPU의 상업적 노동조합에 반대하면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임금과 수당, 노동조건, 안전수칙, 작업장의 권리에 관한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로비를 펼치는 등 노동자 연대를 되살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산업노동조합에서 좌파의 힘이 약화되면서 진보주의는 공공부문으로 옮겨갔다. 실제 NUPE와 같은 노동조합들은 보다 광범위한 정치전선에서 활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그들은 시장을 위한 상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위한 서비스들을 제공했다. 공공부문의 종사자들은 EETPU가 선택했던 것과 같은 개인적 급여체계와 사내 혜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처한 노동시장을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즉 사회보장과 일자리를 위해 복지국가가 필요했다.

4. 노동계급의 구조적 변화와 신좌파적 의제들

상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197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의 유로코뮤니즘식의 개방화, 미테랑의 집권으로 이어졌던 프랑스 사회당의 외연화, 그리고 앞서 다룬 힘들게 성사된 독일의 적록연합, 그리고 영국 공공부문의 사회적 노동조합운동 등 1970~1980년대 서유럽 노동정치의 변화는 신좌파적 의제들의 정치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다음에서는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류 좌파정치의 변화의 기저에 있는 노동계급의 구조적 변화와 노동시장의 재편을 살펴봄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과 관련된 신좌파적 문제의식을 검토해본다.
1960년대 이래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에 대한 확고한 가정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탈산업화, 탈포드주의 등에 대한 논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전후 재건기까지 여전히 팽창했던 유럽의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1960년대 접어들면서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서유럽 11개국 중 영국과 벨기에의 산업부문 고용자 비율은 거의 50%로 가장 높았으며, 스페인은 25.1%로 낮은 편이었다. 서독과 스웨덴은 상위 수준이었고, 이탈리아는 하위 수준이었으며, 그 나머지 국가들, 즉 오스트리아, 덴마크,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는 중간 수준이었다. 1973~1974년 이후 쇠퇴의 폭이 가팔라졌다. 영국의 경우, 산업부문의 고용 비율은 49.2%에서 30.2%로 격감했고, 노르웨이에서는 32.1%에서 17.7%로, 스웨덴에서는 40.6%에서 30.2%로 감소했다. 제조업도 마찬가지로 급격히 위축되었다. 영국의 제조업 일자리의 비중은 32.4%에서 18.8%로 급감했고, 벨기에는 32.1에서 17.7%로, 노르웨이는 26.7%에서 14.3%로, 스웨덴은 28.3%에서 16.8%로 감소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같이 지속적으로 건실한 경제조차 위축되었고, 여전히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제조업 고용비중도 31.1%에서 19.8%로 하락하였다. 오직 경제 개발도상 국가였던 포르투갈과 그리스의 낮은 제조업만 고용수준이 유지되고 있었다.
같은 시기 서비스 부문은 소매업과 사무직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숫자와 함께 확대되었다. 감독, 경영, 그리고 행정직이 급격히 성장했고, 연구와 교육, 그리고 통신 분야들에 기술 전문기능이 확산되었으며, 공공기관들이 팽창했다. 서비스와 산업 부문이 모두 1950년대 근소하게 성장했던 스웨덴의 경우, 1960~1980년 사이 서비스 부문의 고용 비중이 전체 고용의 61%로 급증했던 반면에 산업부문의 고용은 34%로 감소했다. 덴마크도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즉 1950년대 근소하게 증가했던 양 부문 간의 고용 격차는 그 이후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1950년 서비스부문의 고용비중은 30%정도로 안정적이었고, 산업부문의 고용은 37%에서 46%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비율은 1980년 역전되었는데, 서비스부분이 54%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산업부문의 고용비중은 37%로 감소했다. 이러한 양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보편적인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선진화될수록 더욱 더 커다란 구조적 변화가 일어났다.
1960년 이후 본격화한 이러한 노동시장의 변화의 함의는 심각했다. 첫째, 석탄, 철강, 철도, 조선, 하역, 기계설비, 섬유산업과 같은 “구”산업이 쇠퇴하고, 자동차와 같은 “신”산업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경제가 탈산업화되었다. 둘째, 컴퓨터, 제약, 전자, 항공 분야의 하이테크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자리들은 대부분 식품과 요식업, 의료, 그리고 상업과 정보서비스 분야에서 생겨났다. 셋째, 이러한 새로운 작업, 즉 파트타임, 비보호, 불안정, 지리적인 집중, 저임금, 그리고 비노조 작업은 기존의 노동운동의 문화와 제도의 손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있었다. 넷째, 이러한 부문의 노동시장은 전형적으로 여성화되었다. 즉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일자리의 대부분이 파트타임이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사회적 개인적 서비스직들이 복지국가와 관련된 공공직과 함께 급속하게 증가했다. 이 영역은 1960년 이후 서유럽 국가들에서 확대되었다. 베네룩스 삼국과 스칸디나비아의 경우, 1992년 경 이 부문이 차지하는 고용의 비중은 31~38%에 육박했다.
탈산업화의 극단적 사례인 영국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79년 선출된 마가레트 데쳐 수상의 보수당 정부는 무차별적인 탈산업화 정책을 실시했다. 집권 4년 만에 영국의 산업 부문의 고용 비중은 34%로 하락하였다. 1978~1983년 사이 자동차산업에서 17만9,000개, 섬유산업에서 17만3,000개, 철강산업에서 11만개, 석탄산업에서 5만1,000개, 조선 산업에서 4만2,000개, 기계설비산업에서 2만3,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성장산업들에서 조차 일자리의 감소가 일어났다. 항공 산업에서 2만1,000개, 그리고 전자산업에서 1만1,000개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영국 북부, 웨일스, 중서부, 북아일랜드에서는 산업 부문의 전체 일자리 중 28% 이상이 소멸되었고, 스코틀랜드, 나머지 북부지역에서는 23~27%, 동중부와 런던, 그리고 남서부지역에서는 18~21%가 사라졌다. 1974년 30만 명이었던 철강산업의 노동자 숫자는 1983년에는 18만3,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00만 명이었던 자동차산업의 노동자 숫자는 겨우 29만 명에 불과했고, 광부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1947년 국유화된 석탄광산 경우, 합리화, 일시해고, 탄광 폐쇄로 말미암아 1950년 69만 명이었던 광부의 숫자는 20년 후에는 8만7,000명으로 줄어들었고, 1989년에는 6만 명에 불과했다.
영국에서도 서비스부문으로의 이동은 두드러졌다. 1963~1983년 산업부문의 고용규모가 49%에서 34%로 축소되었던 반면 서비스 부문의 비중은 48%에서 64%로 증가했다.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산업부분에서 22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진 반면에 170만개의 일자리가 3차 산업, 주로 호텔과, 요식업, 상업서비스, 의료와 교육 분야에서 새로 생겨났다. 영국 노동시장에 대한 구조조정은 철저하고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졌고,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였다. 1979년 이후에는 3차 산업의 일자리도 타격을 입었다. 복지국가의 공공부문의 고용은 정체되었다. 1971년부터 1981년까지 공공지출에 대한 공격과 함께 이 분야의 일자리의 비중은 27.3%에서 23.7%로 감소하였고, 1992년에는 25.5%로 약간 상승하였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파트타임으로 남성보다는 여성들에게 돌아갔다. 고용기회들이 런던에 집중되고 남부의 대도시들과 북부의 황폐화된 산업지역간의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지역적인 고용격차가 확대되었다.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곳에서는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았다.
따라서 산업부분의 숙련 작업에서 서비스부분의 화이트칼라노동으로의 전환으로 인해 남성보다 여성에 대한 선호, 파트타임작업, 실업의 증가, 지역간의 엄청난 격차, 새로운 컴퓨터 기술에 기반 한 첨단산업들과 구 제조업 중심지 산업경제의 몰락과 같은 또 다른 변화들이 일어났다. 탈산업화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의 모습이 달라졌다. 1939~1945년 사이 처음 시작된 산업시설의 도심탈주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다. 1951년부터 1976년까지 제조업 중 부문별로 40%에서 60%가 도심을 떠났다. 1980년대 클라이드사이드, 타인사이드, 티사이드, 리버풀, 맨체스터, 리즈-브래드포드, 런던의 이스트앤드와 테임즈강 남부와 같은 주요 도시경제 구역들에서 산업공동화가 일어났다. 반대로 농촌 지역들이 혜택을 입었다. 1960~1981년 사이 농촌지역 제조업의 일자리가 24% 증가했다. 그러나 런던, 다른 대도시들, 중소도시들에는 일자리들이 급감했다.
유서 깊은 다양한 산업들이 사라져갔다. 전통적인 대량소비시장, 사치품소비, 특수제조업과 함께 건축, 교통, 통신과 관련된 거대한 기반시설을 갖춘 수도들이 쇠퇴했다. 하역시설, 조선소, 해운업, 무역과 관련된 부대산업을 거느린 항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탄광, 철도차량제작소, 제철소에서부터 중공업설비, 전문화된 경공업, 그리고 섬유산업에 이르기까지 과거 19세기식의 공업도시와 산업 크러스트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탈산업화와 함께 노동계급의 사회적, 문화적, 지역적 인프라들도 사라져갔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재편은 서유럽 노동계급의 구조에 어떠한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는가? 많은 분석가들의 주장처럼 계급노동 자체가 소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에 종속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임금노동은 오히려 대안적인 생계 수단의 부재로 더욱 더 보편화되고 있다. 소멸하고 있는 것은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전통적인 조직노동의 중심에 있었던, 계급의식이 투철하고 온건한 남성 산업프롤레타리아이다. 이러한 “역사적” 노동계급의 쇠퇴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연대를 가로막거나 복잡하게 만드는 노동시장의 양극화, 여성화, 자유화이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 간의 분열, 고임금 정규직 노동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빈민, 성별, 연령, 지역별 격차와 대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은 계급적 유대를 크게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서유럽의 좌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변화를 지지했던 신좌파는 기존의 당 모델에서부터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당연시해왔던 가정들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들은 “세계는 단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변화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S. Hall, M. Jacques, eds., New Times; The Changing Face of Politics in the 1990s, (London: Lawrence and Wishart, 1991), 11 쪽, G. Eley, 위글, 403 쪽에서 재인용.
새로운 사회적 질서는 “동질성, 표준화, 근대적 대중사회를 특징지었던 규모의 경제와 조직들보다는 오히려 다양성, 차별성, 파편화에 의해 특징지어 지고 있다”는 것이 신좌파의 인식이었다.

5. 맺는 말

제프 엘리가 강조한 것처럼, 노동계급이 임금소득자라는 하나의 동질적인 범주에 불과했던 적은 결코 없었다. “어떠한 자본주의 단계에서도 노동계급은 항상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실질적인 단위, 즉 인식된 공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정치적 위상을 갖춘 단위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것은 항상 성별과 나이, 연배, 숙련도, 훈련, 작업 유형, 종교, 언어, 인종, 국적, 거주지와 그 밖의 차이점들에 의해 구분되는 공동체와 직업의 복합체였다. 그것은 오직 창조적이고 지속적인 노력들을 통해만 정치적 목적의 집단체가 되었다.” 위글, 397 쪽.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대에 있어서 사회적 사실로서의 계급은 어떻게 사회정치적 인식으로서의 계급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 신좌파적 의제들이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좌파의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두개의 1968년의 유산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의 부활이었다. 다른 하나는 직접행동, 공동체의 조직, 참여의 이상, 소규모의 비관료주의적 형태들, 풀뿌리 운동에 대한 강조, 정치의 일상화와 같은 비의회주의 정치의 부활이었다. 1945년 이후 서구의 노동정치는 과거 운동으로서의 계급정치의 많은 것들을 상실했다. 최소한 19세기 말 산업화 시대 노동자 계급의 일상의 정치와 1920년대 비의회주의적 정치와 직접행동 같은 것들이 그러한 것이다. 대안적 사회에 대한 상상력은 묻혀버린 이러한 주체성의 재발견을 통해서만 다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김수행 안삼환 정병기 홍태영 공저,『제 3의 길과 신자유주의』, 서울대 출판부, 2003.
Anderson, Perry/ Patrick, Camiller Mapping the West European Left (London: Verso, 1994).
Eley, Geoff,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Oxford: Oxford Uni. Press, 2002).
Sasson, Donald, One Hundred Years of Socialism. The West European Left in the Twentieth Century (New York: The New Press.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