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박해받는 이들, 밀어내는 대학

지난 4월 30일, 노동절 전야제 행사가 한 대학의 정문 밖에서 진행된 일이 있었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노동자들이 노동절 전야제 행사를 하기로 예정되었던 학교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렸다.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은 다름 아닌 그 학교의 학생 대표자들이었다. 어찌 보면 수다한 행사 진행과정에서 발생한 해프닝 수준의 사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사건은 나를 ‘경악’하게 했다.


이 경악은 빛바랜 노스탤지어의 영원한 매장일 수도 있다. 아카데미즘이라는 고상한 외피를 완전히 벗어 던진 지 오래된 대학이라는 공간을 여전히 사회와 소통하는 곳이라고 착각한 것. 혹은 진리와 양심, 정의와 평등을 탐구하고 실천하는 공간으로서 대학이 가진 고유의 기능을 계속 유지시켜주길 바라는 헛된 망상. 이 사건은 그런 사고들이 이제는 분수에 넘친, 현실감각을 결여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 소회로 이 사건을 정리하기에는 경악의 본질이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 소회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단념으로 정리될 수 있지만, 이 사건은 개인적 소회를 넘어 이 사회를 감싸고 있는 불길한 징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적어도 고난의 현대사를 통해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던 대학이 마침내 그 역할의 포기를 선언하는 상징, 더 나가 학문의 전당이라는 대학의 성격이 자본과 권력으로 종속되기를 희망하는 고립의 공간으로 전락했다는 확인으로서 이 사건은 의미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악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단초를 그들 학생들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다. 자신의 미래를 대학이라는 공간 혹은 그 대학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저당잡혀 있는 학생들에게 책임의 소재를 묻는 것은 어색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문제는 이 학생들을 이렇게 길들인 것이 무엇이었는지, 더 나아가 본분에 대한 성찰 없이 학생들로 하여금 자본과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서도 추호의 반성이 없는 대학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오늘의 숙제가 될 것이다. 노동자들을 내몰았던 학생들이 이 숙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노정에 동반자가 되어야 할 것임은 물론이다.



쫓겨난 노동자들


노동자들을 교문 밖으로 몰아냈던 학생들이 제기한 질문 중 하나는 이거다. 왜 하필 우리 학교인가? 그러나 이 문제제기는 매우 명료하면서 선정적일 수는 있어도 사태의 해결 또는 재발의 방지를 위해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질문은 원래 이렇게 제기되었어야 한다. ‘왜 이들이 여기까지 밀려 왔는가?’ 질문의 내용을 전도시킴으로써, 사안에 대한 판단은 대학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가 전제하라고 요구하게 된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이란 무엇인가, 또한 한국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반추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이 ‘진리와 정의’를 탐구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따른 개념정의의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격을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는 곳이라고 할지라도, 실재하는 오늘날의 대학은 이상적으로 논의되는 숭고한 가치와는 별개로 이미 자본이 요구하는 이윤창출기계를 제작하는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여기서의 교육은 진리와 정의를 찾는 과정보다는 어떻게 시장지상주의의 체제 속에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을 것인가가 주된 내용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대학이라는 곳이 가지고 있는 정의는 현실영합적인 차원에서 적정하게 바뀌어야만 하는가?


현실이 그렇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학은 사회구조를 개선하고 비판적 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본연의 취지를 잃지 말아 달라고 요구받는다. 지난 5월 초에 진행된 ‘세계시민포럼’에서는 빈곤, 질병, 환경 등 국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학의 참여와 기여가 강조되었다. 이 국제행사 참여자들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학이 자신의 담장을 허물고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는 매우 기초적인 사실이 재확인되었을 뿐이다. 결국 대학은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리와 정의를 탐구하고 완성시켜 나가는 근거지이며, 바로 이 차원에서 사회와 계속해서 소통과 교류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제 그 의무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대학이 사회와 소통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축적한 지식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지식의 축적을 위해 먼저 사회와 교류할 것을 요구받는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대학은 또 대학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무 중 하나로, 자신들이 배운 바 정의의 관념에 어긋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적극적인 해소책을 강구해야하는 의무를 진다. 그 해소책에는 이론을 통한 문제제기와 해법의 제시도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일 수도 있다. 이 행동은 결코 자신이 주체이기 때문이 아니다. 혹은 문제상황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도 아니다. 환언하자면, 대학생들이 자신을 ‘미래의 노동자’로 주체설정을 함으로써 노동자문제에 대한 행동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바로 대학생이라는 본연의 주체성, 즉 진리와 정의를 갈구하는 자로서 노동자의 문제에 연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앞서의 질문, ‘왜 이들이 여기까지 밀려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학은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스스로 답변해야 한다.


정연하고 일관된 논리의 전개를 생략한 채 결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기 때문에 대학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거리의, 광장의 주인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했고 급기야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낼 공간으로 대학을 찾았다. 그들은 피난처를 찾았던 것임과 동시에 연대의 손길을 마주하기 위해 대학을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귀결을 이해하기 위해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이 언급될 수 있다.


흔히 민주화의 성지로 ‘명동성당’을 꼽기도 한다. 적어도 성당이나 사찰 등 일부 종교시설이 한국의 민주화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할만하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오늘날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대학이 수행한 역할 역시 평가해야 한다. 즉 굴곡의 현대사를 경유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대학은 사회에서 박해받고 소외된 사람들이 찾는 ‘소도’(신성불가침의 지역, 삼한시대 제사를 지내던 곳)의 역할을 해왔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대학은 어느 정도 공권력이 함부로 침탈할 수 없는 곳이었고, 대학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대학의 기능을 음으로든 양으로든 인정했으며, 이런 배경을 통해 살인적인 정권의 폭력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대학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대학의 역할이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장 오늘날의 상황만 점검해보더라도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앞으로 전개될 예정인 시민사회의 집회, 노동자들의 집회는 모두 불법이고 불허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정치적 내막은 차치하고라도, 현행법의 체계만으로 볼 때도 집회의 불허는 그 자체로 위헌적 행위다. 그런데 이처럼 헌법체계의 골간을 무시하는 행위가 법집행을 담당하는 검찰과 경찰에 의해 이루어진다. 더불어 정권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탄압의 강도는 과거 군사정권의 시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권력과 자본에 의해 곳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는 어디일까?


진리와 정의가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서 대학은 바로 이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 대학은 사태를 바라봄에 있어 ‘왜 우리 학교인가?’라는 질문을 ‘왜 이들이 여기까지 밀려왔는가?’라는 질문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시장에 저당잡힌 대학


이렇게 사고가 전환될 때 학생들이 제기하는 또 다른 질문에 대답이 가능하다. 노동자들을 교문 밖으로 밀어냈던 학생들이 제기하는 문제 중 하나는 이거다. 왜 ‘우리 학교’에 ‘남’들이 들어오는가? 즉 학교의 ‘주인’인 학생이 허락하지 않는데 왜 남들이 우리 학교를 제 것인냥 사용하려 하는가?


이 문제제기의 본질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들을 학교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이 철저한 주인정신의 뒷면에 이 사회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생각이 미처 자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주인이라는 주체적 사고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상기해야 할 것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것의 주인인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획이 정리되어 있는 담장 안에서 등록금을 납부함으로써 그 담장 안의 공간을 독점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학생들의 주인의식은 사고의 곤궁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극도로 결핍된 형태로 발현되는 주인의식은 실상 노예의 의식이다. 바로 그 사고방식이 비인간적 경쟁구도를 조성하는 기득권 세력의 요구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구성원들이 대학의 주인으로 안주하는 사이, 자본과 권력은 사회의 주인으로서 군림한다. 그리고 그 사회구조는 대학의 성격을 결정한다.


십수년 전, 어느 재벌 총수가 이렇게 투덜거렸다. “요즘 대학생들은 채용해도 쓸 데가 없다.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워가지고 오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뭐 애프터서비스도 안 되고….” 재벌 총수의 이 한마디는 대학 교육체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각 대학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산학협동체계 구축이며 영어교육 강화며 졸업인증제 실시며 온갖 그럴싸한 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장친화적 교육체계를 구축했다.


그런데 재벌총수의 이 발언은 대학교육 자체에 대한 무지함과 동시에 말 그대로 ‘날로 먹겠다’는 고약한 심보를 여실히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자기가 필요해서 사원을 뽑았으면 그 필요에 맞는 인력으로 만들기 위한 비용은 자신이 부담해야 한다. 비용으로 투여되는 시간과 자본은 어차피 신규채용인력이 앞으로 창출하는 이윤으로 회수되는 것. 그걸 왜 학생들이 제 돈 들여 학교 교육과정에서 다 배워가지고 나가야 하나? 게다가 대학교육이라는 것이 그처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기술교육으로 한정될 거 같으면 차라리 중세 유럽의 길드에 번성하던 도제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날로 먹겠다’는 재벌 총수의 발언에 벌벌 떨면서 시장일체형, 자본종속형 교육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학이 가지고 있는 시공간적인 상징은 완전 탈바꿈하게 되었다. 어느 전임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선언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대학교육은 시장으로 넘어갔음을 대학들이 몸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시장에 대한 대학의 굴종은 곧장 대학의 구성원인 학생들의 인식구조는 물론이려니와 이들이 만들어나갈 미래까지도 변형시켰다. 대학이 진리와 정의의 탐구를 위한 장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함에 따라 학생들 역시 장래의 비판적 시민으로서가 아닌 자본과 시장에 종속하는 예비 ‘사원’이 되기를 강요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대학생은 끝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자본과 권력에 양보한 채 대학의 주인이라는 자족감만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끝내 오늘의 대학생들은 자신들을 인턴세대로 몰아가고 있는 이 사회구조에 순응하면서 저들이 요구하는 ‘스펙’을 맞추기 위해 불철주야 토익책을 들여다보아야만 하는가? 이 공허하기까지한 의문에 대한 답은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다. 이 사회의 주인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다. 이 자각을 통해 대학은 결국 자신의 담을 허물고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결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Etienne Balibar)가 역사는 장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은 곧 역사는 그 시대를 사는 청년들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시대의 주인은 흘러간 과거를 향수처럼 껴안고 사는 기성세대가 아니라 장막에 가려있는 미래를 제 손으로 만들어나갈 청년들이다.



다시 본분을 기억하며


대학은 ‘닫힌계’가 아니다. 대학이 ‘소도’의 역할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그 역할을 종식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와 정의는 대학의 본분이며, 이 본분으로 인하여 대학은 언제나 해방의 전진기지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역할은 임무완수의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노동자를 비롯한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이 교문 안으로 몰려들 수 있을 때, 그리고 대학이 그러한 현상의 본질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문제로 껴안을 수 있을 때, 진리와 정의를 탐구하는 공간으로서 대학은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실공히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대학의 위상이 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학의 담장을 허물고, 그럼으로써 대학이 다시금 저항의 공간으로서, 해방구로서 사회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고민 없이 대학이 시장에 종속된 위치에 만족하는 이 상황을 외면하는 한 교육의 미래는 물론이려니와 사회 전체의 미래 역시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