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밀란 쿤데라는 “역사는 기억에 대한 망각의 투쟁”이라고 했다. 1944년 8월 어느 날, 단 하루 동안 2만4000명의 사람이 사망했다는 끔찍한 초유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곳, 아우슈비츠. ‘뻔한’ 책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이탈리아 작가이자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보낸 10개월간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록물과 글들은 수없이 많다. 프리모 레비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 쓴 종이 한 장일지라도 아우슈비츠의 아픔은 고스란히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굴뚝 뿐”이었던 삶을 살았던 그들이었기 때문에. 작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굴뚝의 불꽃을 보고 “저기서 타고 있는 건 우리야”라는 말을 했을 그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은 지금 프리모 레비를 다시 생각해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왜 자살하였는가?’ 질문을 던지고 싶다. 1943년 체포되어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45년 이탈리아로 돌아와, 1987년 돌연 자살한다. 약 40여 년 동안 그의 증언은 오로지 한 가지를 향한다. 이 책의 제목 그대로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수용소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인지, 가스실로 사람들을 넣고, 지방으로 비누를 만들며, 머리카락으로 천을 짜는 이들이 인간인지 구분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어쩌면 그는 죽기 전 40여 년의 시간 동안 변형된 대학살의 참극을 보았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 그 참극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끝자락을 놓아버렸던 걸까. 아쉽게도 프리모 레비는 우리에게 자신이 풀지 못한 숙제를 안겨주고 떠났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의 예견이 맞았던 걸까. 나는 아우슈비츠로부터 60년이 훨씬 지난 시간의 다른 공간에서 “우리가 불타고 있는” 그 불길을 보고 말았다. 사실 그 동안 나의 질문은 ‘이것이 인간이 할 짓인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 불길을 보고 질문은 ‘이것이 인간인가?’로 바뀌고 말았다. 한 정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가, 사회 구성원들이 수십 년 동안 기어코 외면해왔던 숙제들이 불길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지구 곳곳에서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학살은 불행히도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이렇게 끈질길 정도로 반복되는 역사 속에 희망은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감이 안 온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말할 용기는 내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만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가 ‘박물관’이 되어버린 것처럼, 현재진행형인 만행과 학살의 현장 또한 보이지 않은 벽돌로 만들어진 박물관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약 11개월 전 용산의 한 망루에서 솟아난 불길 또한 인간의 욕심에 또 역사 속으로 망각되어질지 모른다. 아마도 지속될 재개발의 현장 곳곳에서 우리는 ‘내 집값이 얼마나 뛰어오를까?’를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개발들을 통해 피눈물 흘린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혹시 프리모 레비는 40년 동안 ‘이것이 인간인가?’를 질문한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인간이냐?’하고 물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프리모 레비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진실에 대해 침묵하고 역사를 외면, 방관하는 우리 모두를 향해 ‘도대체 무엇이 인간인가?’ 하고 물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은어들 중 결코 사용하지 않는 말은 ‘내일 아침’이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던 ‘내일’을 살았던 그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프리모 레비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내일을 위해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은 왜 죽어야 했을까?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인권은 그저 허울 좋은 단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이유는 바로 그가 던진 질문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내일이 되면 다시 물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