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똘끼’에 중독된 나와의 인터뷰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부터 좀 부탁드릴게요.
험험, 제 이름은 양미구요, 성은 ‘강’인데 양성쓰기에 별로 매력을 못 느끼는데다 제 이름이 성을 붙이면 좀 강한 느낌이어서 성을 뺀 이름만으로 활동명을 쓰고 있습니다. 별명은 ‘빨간거북’이에요. 천천히 볼 것 다 보고, 겪을 것 다 겪으며 빨갛게 가자는 뜻이지요. 제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별명 중에 젤 마음에 들어요. 지금 지역에서 비정규노동운동을 해 보겠노라며 꼼지락거리고 있지요. 서부비정규노동센터 준비모임에서 상임활동가로 있어요.



이전에 일반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홈쇼핑회사에서 10년 가까이 일했었죠. 1997년에 파견직 사원으로 입사해서 직접고용 계약직을 거쳐 2005년 퇴사할 때는 정규직 대리가 되어 있더군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처음 입사할 때는 전화상담원으로 들어갔어요. 주로 클레임전화 받아서 해결하는 고객만족센터라고 하는 곳이었죠. 그리고 주문접수 받는 상담원을 관리하는 팀장으로 있다가 경영지원본부의 전화상담 품질관리, 그러니까 모니터링부서의 팀장이 되었어요. 모니터링 평가 기준 만드는 것부터 평가, 팀원들 관리, 교육, 기획서 만들기, 자동주문전화시스템 만들기 등등을 하다가 CRM이라고 초단위, 분단위, 시간단위, 일단위, 월단위, 연단위로 콜데이터 분석해서 보고서 만들고 문제해결 방법을 고민해서 보고서 만들고, 그 결과로 직원들 실적관리하고. 뭐 이런 일 했었어요. 한마디로 나쁜 짓이죠.



돈도 많이 벌고 나름 회사에서 인정도 받은 것 같은데 왜 그만두셨어요?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입사하고 한 1년 정도 너무 힘들어서 그만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오죽하면 삭발까지 했을까.(웃음) 머리를 빡빡 밀고 출근하니까 다른 부서에서 저를 구경하러 오더라고요. 그런데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때 제 나이가 이미 27살이었는데, 다른 곳은 이곳보다 형편없는 조건이었거든요. 그 회사 입사하기 전에 다른 회사를 알아봤는데 사장이랑 단 둘이 일하는 곳이 많은데다 대부분 경리 일이었어요. 뭐, 정규직이고 뭐고 의미가 없을 정도로 저임금에 고용조건도 형편없고 사장이 시키는 일은 공적인 거든 사적인 거든 다 해야 하는 일자리들이요. 게다가 호적등본이니 연대보증서니 하는 것을 떼 오라고 하니 자존심이 상하더라고요. 그나마 이런 일자리는 나은 편인 경우도 있었어요. 뻔히 사기 치며 장사하는, 일종의 다단계 영업하는 사무실에서 저 같이 일자리 찾아오는 사람들 삥 뜯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아무튼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여성이 나이 먹어갈수록 일할 수 있는 곳이 참 없구나 생각했죠. 그전에 노동운동하겠다고 현장 들락거릴 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제가 막상 먹고살기 위해 일자리를 구할 생각하면서 둘러본 현실은 참 처참했었어요. 그때까지 노동권은 그냥 권리를 알고 내가 찾으려고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거든요. 권리를 찾는다는 것도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추어져야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노동조합은 대공장처럼 어느 정도는 규모가 있어야 만드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잖아요. 조그만 사업장이거나 하청회사의 경우에는 참 힘들죠. 아무튼 그래서 그만두지를 못하고 그냥 그 회사에 어영부영 적응하고 일중독자로 살았어요.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제가 일한 곳을 저희끼리 부르는 이름으로 콜센터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인원이 한 천명 되거든요. 거기서 현장팀장을 뽑는데 TO(정원 table of organization)가 생길 때 마다 한두 명씩 뽑아요. 실적이나 경력 같은 거 따져가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현장팀장을 거쳐서 경영지원본부에서 그 현장팀장들이랑 현장상담원들 실적관리까지 하는 사람이 되어있더라고요. 완전히 회사 부속품처럼 기계 인간이 되어서요.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는 그냥 정규직에 비해서 차별받는 게 억울하니까 정규직이 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정규직이 되고 보니까 일의 양이 장난이 아닌 거예요. 떨어지는 일을 감당하려니까 밤을 새우고서라도 해야 하는 거예요. 제가 또 일이 있으면 해야 하는 성격인 것도 한몫했죠. 그러면서 점점 삭막하고 못된 인간으로 변하더라고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일들을 해 냈어요. 감정이 없어지고 자신과 타인에게 잔인한 인간이 돼 가는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일중독자의 전형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회사, 집 이렇게만 살다가 많이 아팠어요. 출근하는 길에 그냥 픽……. 몸이 먼저 경고해 준거죠. 그 후로 일을 줄이고 뺀질거리면서 여행도 다니고 다시 사회문제에 관심도 가지고 하면서 조금씩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만들었어요. 그래도 그만둘 용기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제가 있던 부서를 외주화하면서 노조위원장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조합의 핵심간부들은 각자 자기 살길 찾아 떠나고, 그러면서 저도 그만뒀어요.



노조도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싸울 생각을 안 했던 거예요?
제가 회사에 있으면서 아무래도 비정규직노동자였기도 하고 해서, 그 현실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게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비정규노동자라고 우리는 일반화해서 부르잖아요? 그런데 비정규노동자라고 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그야말로 비정규직이라는 거 밖에 없더라는 거죠. 제가 일했던 곳의 특성이 비정규직, 여성이 많았는데 기혼과 비혼이 섞여 있었거든요. 나중에 장애인의무고용제가 도입되면서 장애인 비정규노동자도 있었고요. 그런데 각자의 입장이 다 다른 거예요. 그냥 밖에 나와서 일하는 것이 자유로워서 좋다, 정규직이 되는 게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비정규직으로 일하면 일하는 시간만 맞추고 크게 책임질 일 없이 일하는 게 좋다는 거죠. 물론 월급이 적다거나 각종 차별은 싫지만,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들도 있었던 것 같고. 현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단위사업장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너무 잘 아는 거죠. 장애인의 경우에는 다른 비정규노동자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으로 입사를 했어요. 다른 이들은 파견직으로 입사하거나 간접고용으로 일해야 했는데 장애인의무고용의 할당량을 맞추기 위해선 회사에서 직접고용을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직접고용계약직으로 입사하는 거예요. 다른 곳보다 상대적으로 대우도 좋고 하니까 불만이 있어도 먼저 나서서 말하지는 못하더라고요. 개개인이 처한 현실이 이런데다가 그 결과가 어떨지도 다 아는데 싸우자고 하기가 너무 어려웠죠. 저는 정말 자기 현장에서 노조 만드신 분들 존경해요. 저는 그렇지 못했던 거고.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서라도 미친 척하고 싸웠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은 들어요. 그런데 제가 그동안 회사에서 해왔던 일들이 다른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잖아요. 그러다보니 그분들 볼 면목이 없어서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어떻게 되셨어요?
한동안 백수로 있었어요. 당시에 민주노동당 활동하면서요. 지금은 탈당 후 정당에는 적이 없지만요. 아무튼 그러다가 2006년부터 서울여성노동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죠. 제가 겪었던 일들이 여성노동운동에서는 이미 오랫동안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고 싸워왔다는 걸 이때 알았어요. 그런데 20년 동안 싸워왔고 법도 보완해왔는데 현실은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이 그렇게 느껴지던가요?
여성노동운동을 흔히 ‘빵과 장미를 위한 투쟁’이라고들 하잖아요. 예를 들면 직장 내에서 성희롱을 금지하는 법이 있지만 여성노동자의 고용상황이 대부분 소규모 사업장이다 보니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쉽지 않고 문제제기를 해서 싸움을 시작해도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은 거죠. 그런데 우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가 없잖아요. 결국 장미를 선택하고 빵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거나 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는 거죠. 우리에겐 빵과 장미가 다 필요한데 현실에선 결국 빵이냐, 장미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이런 식이다 보니 비정규노동 문제도 여성노동 문제도 결국 모두 ‘빵과 장미를 향한 투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 이후로 저는 ‘노동인권’이라는 말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노동인권이요?
네, 노동인권.



어떤 의미인가요?
글쎄요, 그냥 제 느낌인데요, 두 가지 측면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노동권이라는 말로만은 포괄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거랄까? 그러니까 보통 노동권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법적인 권리라는 뜻으로 환원되는 것 같아요. 더구나 사업장, 혹은 현장? 그러니까 일터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라는 것으로만. 그런데 앞에서 저의 경험을 돌아보고 여성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 또 이랜드투쟁 연대활동을 하면서 점점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노동은 인간이 삶을 이루고 유지하는 근간인데 노동문제를 현장에서의 노동,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는 것으로만 가두어 놓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 법적으로 보장된 노동권마저 협소하게 적용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더구나 그 노동권이라는 법적 보장조차도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더라고요. 이를테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임금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는 것이라든지, 노동자의 개념을 화폐로 상품화된 노동을 하는 사람으로만 한정한다든지. 그래서 노동권의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면 기존의 노동권에 대한 다른 말이 필요할 것 같았고요. 또 다른 하나는 ‘노동자가 누구냐?’ 란 질문에서 시작했어요. 그동안 우리는 ‘노동자’라는 추상화된 존재에 대해서는 권리를 얘기하면서도 그 추상화된 노동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종종 잊어버리고 있지 않았나 싶었어요. 예를 들면 노동자는 여/남성이자, 영세/무급/비/정규/노동자, 비/장애인, 한/부모, 청소년/성인, 동/양/이성애자 이런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앞에 나열된 조합으로 보면 개개인이 참 다양한 욕구와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데 말이죠. 이렇게 보면 각자가 생각하는 노동에 대한 의미와 가치부여 등등이 참 달라질 수 있겠다,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다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이런 것들을 다 고려한 노동권을 ‘노동인권’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거죠. 뭐, 정확한 표현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노동자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지금 하는 방식의 노동운동이 참 답답한 면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노동자라고 하고 떠올리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대공장/남성을 떠올리기 쉽고, 여성노동자라고 하면 70년대 ‘공순이’라고 불렸던 16~18살 꽃다운 나이의 방직공장 노동자를 쉽게 떠올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이미지에 여전히 갇혀 있으면 KTX승무원의 투쟁이나 이랜드투쟁의 여성노동자와 쉽게 연결하기 어렵게 되는 거죠. 그럴 때 이이들은 그냥 비정규직 노동자로만 남게 되요. 그런데 이게 또 모순인 게 비정규노동자라는 이미지가 없거든요. 그러니 기존에 해왔던 정규직노동자를 조직해왔던 투쟁의 방식, 80~90년대의 그 방식으로 여전히 이이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조직하고. 그러니까 정규직 노조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분들의 방식이 현장에서는 종종 반발에 부딪히는 것 같아요. 노동조합이라는 활동이 자기를 찾는 과정이기도 해서 그런 과정을 막 경험하고 있는 분들이 쉽게 수긍하긴 어렵지 싶어요. 그래서 저는 조직화 방식, 활동방식 모든 것이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바뀌어야 할 것이 많다고 느껴요.



마지막으로 인권이란 어떤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저는 사실 이 말이 젤 어려워요. 참 좋은 말인데, 인권이라는 말이 참 슬퍼요. 특히 인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현실이 슬프다고나 할까요?



아니, 왜요?
그러니까 저는 인권선언 이전에 인권이 없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인권선언이 만들어진 이유는 굳이 인권을 들먹이지 않아도 되던 시절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사회가 삭막해지고 사람들이 타인에게 무자비해지거나 잔인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보자는, 인권선언이라는 것으로라도 막아보려고 했던 게 아닌가 뭐, 그런 거죠. 마음이 삭막해지면 타인에게 잔인해지는 거니까. 자본주의가 사람들을 일중독자로 만들고 그러면서 사회가 삭막해지니까 ‘인권선언으로라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켜보려고 했던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결국 인권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인권이라는 말이 발견된 거죠. 그래서 슬퍼요. 인권이란 말을 발견하게 된 배경 때문에요.



그래도 인권을 실천하고 고민하면서 그것이 갖는 힘이나 즐거움, 기쁨 이런 면도 발견하게 되지 않나요?
(손뼉을 치며) 물론이죠! 인권운동이 없으면 어쩔 뻔 했어요.(웃음) 이렇게 삭막한 사회에서 한줄기 빛이라고나 할까? 저에겐 그랬어요. 보통 문제가 있을 때 ‘합리적’인 문제해결 방식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은 최선도 아니고 차선도 아닌 차악인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늘 저에게 답답함과 불만을 남겼어요. 더구나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건 늘 소수이거나 약자인 사람이 배제되는 방식이기 마련이구요. 그래서 저는 합리성이란 것은 가진 자, 지배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요. 반면에 인권이라는 건 합리성을 따지지 않죠. 그럴 필요가 없다고나 할까요? 그냥 ‘그 자체로 당연히’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권이에요. 그렇기에 인권은 약자, 소수자, 배제된 자들의 편이자 힘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늘 차악을 선택하게끔 하는 합리성에 대한 반발을 억누르며 회사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건 이 사회의 주류의식에 반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이른바 합리성으로 나를 억눌러 왔던 거죠. 인권은 제가 가지고 있는 비주류 혹은 ‘비정상’이라고 하는 감수성이나 모습을 긍정하게 했어요. 지금은 그것을 ‘똘끼’(돌+I 기질, 혹은 미친 기운?)라고 부르죠. 그리고 “진보는 상식이다”라고 하는 분들에게 진보를 뭐라고 개념 정의하든 간에 “진보는 똘끼다”라고 말해요. 저는 어떤 진보도 그 내용이 처음 등장할 당시부터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간절히 필요하기 때문에 방법을 찾게 되고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되니까 사회화의 과정에서 합리성의 옷을 입어 왔던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었던 건 인권이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저에게(아마 다른 많은 분들께도 그랬겠지만) ‘그냥’ 그것은 ‘인간이기에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는 인권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어떤 분은 그 말에 한술 더 떠서 “그러니까 우리 모두 생떼를 쓰자!”라고 하시더군요.(웃음) 저는 물론 완전 동의하죠.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네요. 저는 나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좋은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