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스멀스멀 다가오는 인권

1993년 2월생 내 아이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면서부터 발달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나는 많은 확인 작업(의사쇼핑, 복지관, 인터넷 자료와 많은 책자들)이 필요했다.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너무 힘들어 성격조차 까칠해졌던 나는 서울장애인복지관에서 아이가 치료교육 받는 시간을 이용하여 ‘장애아 부모동료 상담가 양성과정’에 합류했다. 스스로조차도 버거운 내가 다른 장애 엄마를 감히(?) 상담해준다기보다는 내가 너무 힘들어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1997년 6개월 과정, 다음해 1년 심화과정, 그리고 실습과정까지, 그러고 보니 상담만 10년이 넘었다.



#1. 장애아 엄마, 부모회를 만들다


3~4월 학교적응기간, 5~6월 스승의 날, 소풍과 수학여행, 체험학습, 7~8월 별 문제없는 방학(중고등학교에 가면 또 입장이 달라지지만), 9~11월 체육대회와 학예회, 수학여행과 체험학습, 11~1월 입학할 학교 선택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후 학교 측의 입학거부, 전학강요, 수업배제, 교내 왕따와 폭력, 담임교사의 무관심으로 퇴행하는 아이, 교직원의 언어폭력과 차별……. 분명 장애아 부모 내담자는 바뀌는데 매년 같은 시기에 같은 고민과 눈물의 상담내용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지겹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 내 특수학급에 들어간 장애아들의 교육차별, 인권침해는 입이 떡 벌어질 수준이었다. 2001년 하반기 시시콜콜한 많은 사연과 갈등, 우여곡절 끝에 지역부모회 해체만은 막기 위해 강동구에 위치한 지역장애아부모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고, 그때부터 통합교육의 문제해결을 위해 교육청 관계자들과 여러 장애단체들을 만나 통합교육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해결책을 강구하기도 했다.


그 당시엔 이미 한국장애인부모회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이 부모회는 특수학교 단위로 묶여져 있고 또 장애인의 문제를 복지 마인드로 풀어 가고 있었으므로 통합교육(일반학교 내 특수학급) 부모들은 기존 선배 부모회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거의 배제된 상태로 많은 어려움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었다. 따라서 통합교육 부모들은 지역 장애인 복지관이나 지역구 단위 활동을 하였고, 2002년에는 서울지역을 아우르는 ‘장애인 참교육 부모회’를 만들기로 하여 준비위를 거쳐 2004년 4월 정식 발족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기존의 한국장애인부모회(서울)가 존재하는데 왜 거기에 합류하지 않고 새로이 부모회를 만드느냐는 것이다. 나름 답을 하자면, ‘내 발등에 불 떨어져 뜨거워 죽겠다, 다급한 문제 먼저 해결해가면서 준비하자’ VS ‘작은 불똥 가지고 엄살이냐? 먼 산불이 더 크게 번질 터이니 먼 산불 먼저 꺼야한다’는 입장 차이, ‘떼거리로 폭도 같이 시위나 점거하는 과격한 방식은 아니다. 대화와 순리대로 해야 한다는 입장’ VS ‘대화와 순리에 따르는 방법도 시도하겠지만 그 방법이 안 된다면 투쟁을 불사하고서라도 문제는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문제해결 방법상의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에 함께하기 어려웠던 것이 그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2. 부모들 거리로 나서다


2002년 장애인교육권연대를 준비하던 도경만 선생님(특수교사)을 만나게 되면서 그간 부모 상담에서 느꼈던, 장애학생이기 때문에 발생되는 교육차별과 인권침해는 장애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고, 교육현장의 차별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법과 제도에 있다는 것에 완전 공감해버렸다. 특수교육이라는 명칭아래 장애인 교육을 독식하는 특수교육 전문가들에게 이 문제를 맡기지 말고 우리 장애부모, 장애담당 특수교사, 장애당사자들이 우리의 요구를 담아보자는 취지와 장애인교육은 이제 ‘진흥’이 아닌 실제적 ‘지원법’으로 문제 해결에 접근하자는 관점에 매료되어 서울지역의 ‘장애인 참교육 부모회’는 정식발족을 미루어가면서까지 장애인교육권 확보에 적극적으로 합류했다.


법안도 법안이었지만 당장 지역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던 나는 2004년 서울지역 특수교사 모임인 서울특수교육위원회 회의 날, 부모회 회원 몇몇과 무작정 회의장에 찾아가 강동지역에 통합교육을 하는 고등학교가 없어 장애학생들이 먼 타 지역으로 배치를 받거나 또는 특수학교전학을 강요받고 있으니 고등학교 증설을 위한 방법을 알려달라고, 방법만 알면 뭐든지 해보겠다고 간절히 청했다. 며칠 후 특수교사들도 함께 행동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장애인교육권연대를 결성했고, 그해 10월 10가지 요구사안을 들고 서울시 교육청 기습농성을 감행했다.


“서울시 교육청 장애학생 교육은 죽었다”는 플래카드를 든 거리소복행진과 허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파르라니 삭발하고서 학령기 장애학생의 문제들에 대해 협상을 했지만 ‘성인 장애인 야학지원’이라는 한 가지 요구안만은 도저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모들이 농성중이면 엄마의 부재로 인해 아이들도 함께 고생하게 되는데 성인 장애인 야학 측에서는 미안한 마음에 9가지 학령기 장애아와 관련된 요구안은 협상되었으니 특수교사와 부모들은 농성에서 철수하고 자신들이 남아 투쟁을 계속 하겠다고 했다. 야학생들 대다수가 이미 부모들의 보호를 벗어난 성인 장애인들이었지만, 우리 학령기 장애아 부모들의 사안이 해결되었다고 그들만 두고 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내 자식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었기에 우리는 같이 들어 왔으니 함께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사들도 끝까지 같이 하겠다고 했다. 성인 장애인 야학지원만은 도저히 해결할 근거와 원칙이 없다며 교육청 관계자들이 통사정할 때, 우리는 기회의 평등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관한 헌법조항을 들이대며 원칙과 근거가 그렇게도 중요하다면 이미 협상한 나머지 9가지도 다 엎어버리고 원리원칙대로 재협상하자고 큰소리 쳤다. 지금 생각하면 이 무슨 무모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학령기에 배우지 못하고 성인이 된 장애인들이 내 자식 같아, 가슴이 뜨거워서 도저히 버리고 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가 장애인교육권의 중요성을 알리고, 지원법 제정의 필요성과 연대를 제안하는 전국순회를 하면서 지역부모들이 모여들고 지역교육청을 상대로 교육권확보투쟁에 나서 속속 승전보가 전해지자 전국의 부모들이 용기를 내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로써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는 2004년 한국장애인인권상위원회가 주관하는 장애인 인권상 단체상,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 단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2년부터 준비해온, 시대변화도 당사자의 욕구도 따르지 못하는 특수교육 진흥법(1977)을 대신할 장애인 등에 관한 특수교육지원법이 국회를 통과하던 2007년 4월 그날까지 심장은 까맣게 타고, 발등에 눈물 떨어뜨리며 길거리에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국회 앞에서, 교육청 앞에서 천막농성, 점거농성……. 그 과정에서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나와 같은 복제된 삶의 부모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니 많은 힘이 되기도 하였지만 반면 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정부, 국가에 대한 분노와 함께 과연 꼭 이래야만 해결되는가,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옛날보다 좋아졌다, 예산이 부족하다, 노력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가, 왜 투쟁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가 하는 서러움에 정말 많이 울 수밖에 없었고, 광화문 정부청사 앞에서 ‘활동보조인 예산 확보 투쟁’에 연대발언자로 참석했다가 그렇게 빡센 장애인교육권투쟁에서도 안 타봤던 일명 ‘닭장차’(연행자 후송차량)란 것을 타보기도 했다.


물론 슬펐던 일만 있는 건 아니다. 2004년 장애인 등의 이동보장법, 2007년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던 날에는 국회 앞 천막에서 활동가들과 얼싸안고 같이 건배를 하는 투쟁승리의 희열도 누려봤으니 말이다.



#3. 당사자주의? 내가 인권을 알고나 있었던 걸까


지적장애를 가진 초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 여러 차례 몹쓸 짓을 하고도 당당했던 통합담임교사와 학교를 2005년 9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고, 수개월 동안의 회유와 협박을 감내한 끝에 국가인권위원회 조정 권유를 받아들여, 조정위원회의 중재 아래 피해자 어머니와 부모회 회장이었던 나, 그리고 학교장과 가해교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특수교육 관련 전교사 직무연수 실시, 교장 주관 통합교육 부모들과 담임교사 간담회 실시, 교내행사 안내 및 교육지원 방법 논의 등 많은 요구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인 지적장애 아이가 사과 내용을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피해 당사자 아이와 그 부모에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심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피해학생 어머니에게 전화를 받았다. 담임교사가 교장실에서 부모가 동석한 가운데 피해 아이에게 사과를 하였다고. 그간 담임교사의 아동학대에 가까운 행위를 이 눈치 저 눈치보다 참다못해 진정한 후 수개월간의 긴 회유와 협박으로 힘들어하던 부모의 마음. 제일 큰 위안을 받았고 부모인 자신도 생각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고맙다고 했다.


2006년에는 농성 중 엄마를 만나러 온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경찰병력으로 막았던 교육청이 협상 내용이 담긴 민원회신문 한 장 줄 터이니 농성을 접어달라고 했다. 경찰병력에 에워싸여 우리 아이들이 놀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현장 저편에서 팔짱끼고 미소 지으며 방관하던 교육청 관계자들의 태도, 교육권을 요구하는 부모들을 떼쟁이로 취급하고 학생들을 함부로 대했던 교육청이 달랑 민원회신문 한 장으로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최소한 교육감이 직접 사과하고 더불어 민원회신문이 아닌 협상 조인식을 하자고 요구하며 버텼고 결국 받아들여졌다. 부모가 떼쟁이라서 얻어가는 동냥이 아니라 조인식을 거친 아이들의 당당한 권리가 적힌 협상문으로 우리 아이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엄마의 작은 마음으로 버텨낸 것이다.


활동보조인 제도화투쟁이 한창이었던 2005년 하반기 ‘당사자주의’라는 용어는 뜨거운 감자였다. 장애인 부모는 ‘부모’일뿐 장애 당사자가 아니라는 주장과 당사자의 관점에서 당사자주의 운동을 하는 당사자라는 주장 사이에서 장애인교육권 투쟁을 하는 부모들은 실망감과 더불어 자신들의 위치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한번은 이 용어를 전파시킨 연세대 고 이익섭 교수를 만났다. 당사자주의는 장애 당사자만이 가진 것인가? 그렇다면 당사자주의는 자기사고와 의사표현이 가능한 장애인들만의 것이 아닌가? 지적장애와 발달장애의 복지문제에서 당사자주의는 어디서 누가 찾아야 하는가? 부모나 활동가는 당사자주의를 가질 수 없는 것인가? 나는 따져 물었었다. 그때 이 교수는 당사자주의는 장애 당사자의 것만이 아니며 누구의 관점으로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중요하다며 장애 당사자들에게 상처받은 내게 많은 안타까움을 표하고 같이 있는 시간 내내 나를 찾아 챙기고 위로해 주셨다.
당시 ‘당사자주의’논쟁이 뜨거웠을 때 인터넷 신문 에이블 뉴스에 실렸던 나의 기고에 댓글이 달렸다.


“너는 잘 못하니까 내가 해줄게, 부모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넌 가만있어! 몸도 불편한 애가……. 나의 부모는 그랬다. 당신도 내 부모와 똑같아! 뭘 대신 하겠다는 거야?”


내게 상처와 담금질을 함께 준 댓글이었다. 장애부모들이 갖는 당사자주의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채찍 같아 나의 골수에 박혀버린 그 댓글.


내 아이의 선택권과 자기결정권에 있어 나는 얼마나 아이의 뜻에 부합할 수 있을까? 아이가 못 미더우니 부모가 대신한다는 생각은 오만이나 월권 그 자체가 아닐까? 내 아이의 선택권, 자기결정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내 아이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책임질 수 있고, 결과에 문제가 생긴다면 해결할 능력이 있는가? 지적· 발달장애인의 자기옹호 훈련이나 자기결정권 능력을 배양시키는 활동이 부모운동에는 절대적이거나 필수조건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얼마나 준비시켜야 지적· 발달장애인들이 당사자운동을 주도할 수 있을까? 장애 당사자의 인권이 잘 지켜지게 되려면 어디부터 무엇을 시작할까? 내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민이다.



#4. 스멀스멀 나에게로 다가오는 인권


2009년, 2개월 동안 3번에 걸쳐 시퍼렇게, 또는 붉게 피멍이 들어오는 아들(중3)의 몸뚱이를 보며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불안 증세들을 보이기도 했다). 담임교사와 특수교사를 만나 아들 학급에서 장애인식교육을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어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이 폭행당한 흔적들의 사진, 장애는 어떻게 발생되는가에 대한 사진과 자료, 법정 장애인과 장애 유형별의 특성(특히 발달장애인의 특성), 우리 집 가족사진 등을 첨부하여 장애를 가진 아이도 우리에게 소중한 아이이며 사랑하는 가족의 일원임을 보여주고, 우리 아들이 잘하는 일들도 사진으로 첨부(장애인이 아무 일도 못하는 게 아니라는 점)하는 등등 우리 아들을 모델로 장애인식 파워포인트를 준비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 아이와 대화할 때 유의점으로 ‘경계심을 풀 수 있도록 다정하게 이름 먼저 불러주기’‘대화는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때로는 반복적으로’‘우리 아들은 큰 목소리를 무서워한다-자신에게 화내는 것으로 인식하여 공격성을 보이므로 조용한 어투 사용하여 대화하기’ 등등 구체적으로 발달장애 아들과 사귀는 방법도 나열했다.


작성된 파워포인트 파일을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사)한국제나가족지원센터 김명실 소장에게 보내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 빠진 부분은 없는지 조언을 부탁했다. 소장님이 지적한 부분은 ‘무서워한다’였다. 아이를 유아적으로 취급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유아적-연약한, 어린, 보호해야 할 대상 등등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기에 자기 주도적 개념인 ‘싫어한다’로 바꾸라는 것이다. ‘내가 엄마로서 우리 아이를 그렇게 골수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옆구리를 강타당한 느낌(헉, 김경애 정신 차려!)이었다.


혹시 여러분은‘차이’와 ‘차별’의 의미가 다르듯 이런 사소한 단어, 용어가 일반적 상상이상으로 훨씬 더 강하게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과 이미지형상 세뇌를 강제한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나이 먹어 이런 걸 알고 나니 사는 게 더 어려워진다).


“우리 아이들은 의사표현을 못하잖아요(안 되잖아요).” 대부분 지적 장애와 발달장애 부모들이 흔히들 하는 말이다. 맞다. 내 아이도 아직 의사표현이 정확히 잘 안 된다. 그러나 현재 ‘안 되는 것’과 미래에도 ‘못하는 것’의 차이는 너무 크다. 교육권 투쟁을 계기로 부모운동의 붐이 일기는 하였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혹시 부모들이 내 아이를 두고 ‘안 되는 것’과 ‘못하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당사자주의’에 대한 개념 정리도 없이 부모운동이란 것을 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투쟁사는 이러하다. 이력이 화려하고 대단하다고들 한다. 준비 없이 뜨거운 가슴하나만으로 뛰어들어 나 자신 모두를 고스란히 태웠다. 그리고 에너지가 고갈되어 현장 속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으로 심신이 너덜너덜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스스로를 보듬고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지자 나를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미술심리치료를 받고 지방으로 이사하면서 투쟁현장을 과감히 떠나 쉬기로 했다.


나를 쉬게 하면서, 나를 돌보는 시간을 보낸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의 투쟁사는 인권에 대한 ‘앎과 깨달음’에 의한 용기였다기보다 단순히 차별에 대한 분노의 무모한 표출이었고, 장애아 엄마로서 사는 내 삶의 고달픔에 대한 서러움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힘든 아이들을 괴롭히는 일들에 대해 그것이 작위든 부작위든지 간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투쟁 현장 속에서는 하나의 목표가 세워지면 그것을 위한 전투가 있을 뿐, 조직 안에서의 자기선택권은 사실상 찾아먹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대의를 위해 개인적 속내들은 감춰야 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조직이 결속되고 행동하고 유지되니 말이다. 그래서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권리에 대해 체계적으로 알지 못하고 부대끼는 감정만으로 무모하게 부딪혀 투쟁한 결과, 결실은 있었으나 심신이 피폐해지더라는 것.


투쟁시간 속에서 생긴 ‘대의’나 ‘다수결의 폭력’ 같은(?) 경험과 나의 고민들을 정리해보고, 이제 삭발, 길거리 삼보일배, 거리행진, 전투경찰과 몸으로 부딪히는 일, 길거리 농성, 단식 같은 자학적인 투쟁은 너무도 아프고 슬퍼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 다시 싸움을 한다면 세련되고 전략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흔 중반을 팍 꺾어 먹어 갱년기를 맞이할 이 나이에 법학공부를 시작했다.


나이가 대수인가? 세상의 꿈꿀 자유는 내게도 있지 않은가? 사법고시 도전이 로스쿨 때문에 삑사리나면 또 어떤가? (사실 이도 헌법소원중이다.) 내게 법률지식은 남아있을 테니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남을 도울 수 있는 힘도 되겠지.


나는 ‘김경애’다. 딸, 엄마, 며느리, 여자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부터 나는 ‘김경애’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살았음을 우리 아이가 알게 했다. 타인의 인권을 통해 나의 인권을 알아가고 이 나이에 성장을 꿈꾸고 있으니 나는 ‘너와 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권을 장애인 교육권을 통해 배운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과거가 대단한 사람(?)에서 현재 무식한 사람(?)이 되어버린 나에게로 이제야 스멀스멀 ‘인권’이 다가오고 있다.


인권이란 놈은 자세가 낮을수록 더 잘 보이는가보다. 낮은 곳에서는 너무도 절실해지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