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인권, 네 탓이로소이다

아마 그날은 아침부터 눈이 팅팅 부어있었을 거다. 고3의 중압감. 엄마와 진로 문제로 이야기하다 밤새 울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문이었는지 친구가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일차(십대 동성애자들의 문화 행사로 퍼포먼스와 이벤트가 있는 일종의 일일찻집)’에나 놀러가자고 했을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따라 나섰다. ‘그래, 오늘 하루는 신나게 놀아보는 거야.’


1년 만에 간 일차는 여전히 시끌벅적하고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전화를 건 친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낯선 사람들이 친구와 함께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기소개도 들었지만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건성으로 듣고 대충 대답한 뒤 원래 목적이었던 스트레스 풀기에 열중했다. 음악에 맞추어 몇 시간을 신나게 춤추고, 그것도 부족해 곧바로 친구들과 노래방으로 옮겨갔다. 그때서야 나는 친구에게 아까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어봤다. 친구는 자신도 우연히 만났다며 동성애자 인권단체 사람들인데 같은 레즈비언이고 또 삼십대라고 설명해주었다.


삼십대? 내 귀에 가장 놀랍게 들어온 단어는 삼십대 레즈비언이라는 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스무 살이 넘으면 모두 이성애자가 되는 줄 알고 있었다. 이십대 초반을 넘긴 레즈비언을 주변에서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지라 서른이 넘도록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호기심이 좀 발동하긴 했지만 노래 가락 속에 이내 묻혔다. 어쨌든 수능이 코앞인데 그 모든 것이 나랑 무슨 상관이겠는가 말이다.


노래방을 나와 잠시 쉴 겸 신공(신촌공원의 줄임말, 신공은 십대 동성애자들의 아지트로 일요일에는 100여명이 넘는 십대들이 모인다)으로 갔다. 혹시나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일차와 노래방까지 갔다 왔으니 깜깜한 밤이라고 상상하신다면 오해다. 십대들의 놀이문화는 일찍 시작하기 때문에 그땐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오후였고, 신공에 들어서자마자 아까 봤던 ‘그 낯선 사람들’이 금세 눈에 띄었다.


잠시 잊었던 호기심이 스멀거리면서 낯선 사람과의 대화를 두려워하는 내 마음과는 달리 몸은 이미 그들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일차에서 봤죠?”라고 먼저 다정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네주어서 나는 좀 더 용기를 내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자 일차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던 그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라는 도저히 외울 수 없는 긴 단체명과 청소년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뭐가 필요하고 힘든 건 없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등등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신공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설명들은 정확히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삼십대라는 연륜이 주는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가족과 진로, 고3 스트레스 그리고 외로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어느새 나의 깊은 고민까지 주절거리고 있었다. 경제적인 사정으로 십 년을 준비해 온 전공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 수능도 얼마 남지 않아 불안감은 커지고 진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걱정 등 차마 친구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던 이야기까지 다 쏟아냈고, 진심으로 함께 걱정해주고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그만 나는 다시 한 번 눈물까지 펑펑 쏟아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이 울었는지 조금은 놀랍기도 하지만, 인연이란 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날 이후 나는 센터 사무실에도 놀러갔고 또 자연스럽게 ‘퀴어뱅’이란 프로젝트의 자원활동도 하게 되었다. 퀴어뱅은 일요일마다 신공에 나가 청소년 동성애자들을 만나는 거리이동상담 및 실태조사 사업이었는데, 나는 배고픈 친구가 있으면 빵도 나누어주고, 설문지도 배포하는 일 등을 맡았다. 신공은 내게 중학교 때부터 그저 하루 종일 죽치며 ‘놀기만’ 하던 곳이었는데 그 곳에서 다른 새로운 일, 더군다나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나이 많은(?) 활동가들과 함께 활동하는 시간들이 두근두근 거리고 너무나 재미있다니! 그건 예전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정말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그해 겨울이었다. 2007년 10월 말, 정부가 ‘차별금지법’이란 걸 만드는데 거기서 성적 지향을 비롯한 7개 항목을 차별금지사유에서 빼버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이 곧 사실로 밝혀지면서 센터의 모든 활동가들이 엄청나게 분주해지는 것을 보았다. 성적소수자 차별저지를 위한 긴급 번개가 소집되고 100여명도 넘는 사람들이 불과 며칠 동안 홍보된 웹자보를 보고 모여 몇 시간동안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도 보았다. 또 다른 곳에서 활동하던 십대 동성애자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다. 정말 거대한 폭풍 속에 서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은 레즈비언/게이/트랜스젠더들이 있다니!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또 싸우려고 하다니!


어른 성적소수자들이 나누는 전문 용어들은 어려웠지만 그 자리에 모인 7명의 십대들은 우리도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목표엔 결코 어렵지 않게 의기투합했다. ‘차별금지법 대응 및 성소수자 혐오, 차별 저지를 위한 긴급 공동행동’ 내 십대팀을 결성해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거리에서 외치고,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영상물도 찍고, 대자보도 만들고, 신공의 친구들에게 동성애자 인권과 차별에 대해 알리는 홍보물을 만들어 돌리며 서명 받는 일 등등 지금 다시 떠올려도 감동이 밀려오는 시간이었다.


이 때, 얼마나 활동에 열중했던지 심지어 수능을 치는 날 OMR 카드에 본명이 아닌 활동명을 써서 제출했다가 시험이 끝난 뒤 교무실에 따로 불려가 야단을 맞고 이름을 고치기까지 했다. 어이없고 좀 부끄럽기도 한 사건이지만 나는 2007년 하반기, 그러니까 남들은 다 죽을 맛이라고 하는 고3의 가을과 겨울을 오히려 그 전보다 더 행복하게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활동을 하면서 나를 괴롭게만 했던 진로 문제가 자연스럽게 풀렸기 때문이다. 그건 부모님이 내게 던져 준 진로가 아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결정하는 경험이었다. 나와 같은 친구들을 위한 청소년 상담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그래서 대학도 사회복지학과로 망설임 없이 택할 수 있었다.


자, 여기까지가 나의 열아홉 살 때의 이야기다. 이렇게 십대 활동가로 시작해 대학생 활동가를 거쳐 이젠 처음 자원활동을 했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에서 상근활동가로 첫 월급도 받게 되었다. 봄이 오면 이젠 내가 ‘나이 든 낯선 사람’이 되어 신공에 나가 십대들을 만날 것이다.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쓰긴 하지만 솔직히 나를 인권활동가라고 해도 될지 어떨지는 아직 자신이 없다. 다만 가끔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대체 어떤 힘으로 무슨 깡으로 3년 동안 쉬지도 않고 쭉 달려왔는지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난감함을 느끼곤 한다. 그러니 이 모든 불가사의함을 인권이 내게 온 탓이라고 미룰 수밖에!


아차차, 활동 시작한 이후로 애인이 잘 안 생기는 것도 이놈의 인권을 만난 탓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