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서른 살의 그대에게

중경삼림을 기억하지?


1994년이었던가? 네가 이 영화를 처음 봤던 게. 연거푸 두세 번 정도 보았을 뿐 아니라 해마다 한 번씩은 볼 만큼 좋아한 영화였지. 왕정문의 목소리로 부르던 <몽중인>,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밍>, 영화 속 주인공들의 분위기가 주는 그 나른함과 뻐근함을 너는 무척이나 좋아했지. 이 영화 때문에 너 왕가위 감독의 팬이 돼서 그 이전작인 <아비정전>부터 <타락천사>와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그리고 <화양연화>까지 보고 그랬잖아.


누구에게나 사랑의 만료는 고통이지. 경찰223(금성무)은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아서 기한 하루전날 모두 먹어버렸지.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는지, 있다면 얼마나 되는 것인지. 유효기간이 없는 사랑을 하고 싶던 그는 실연을 하고 온몸의 땀이 빠져나가버리도록 달리기를 해. 눈에서 나올 수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킬러(임청하)는 항상 검은색 선글라스와 우비를 함께 입었잖아. 언제 비가 올지, 언제 해가 날지 알 수 없다면서. 금발 가발을 쓴 채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그녀가 뭔가 너무 불편해 보였고 그 의도된 불편함이 그녀의 자학인 듯싶어 애련했었어. 스튜어디스와 헤어진 경찰633(양조위)은 밤마다 그녀와의 사연이 깃든 집안의 물건과 이야기를 나누지. 너도 슬프냐고. 그를 좋아하는 핫도그 집 알바생(왕정문)은 귀청이 떠나가도록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틀어놓고 그의 집에 몰래 들어가 그 물건들에 자신의 흔적을 새로 만들어 놓는 놀이를 하잖아.


그런데 네가 그랬지. 서른이 되어 그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그 강렬했던 슬픔이 느껴지지 않아서 당황했다고. 감각적인 영상과 대사, 몽환적인 음악, 매력적인 캐릭터들 모두 그대로인데 이제는 그 아프고 아련한 그 옛날의 가슴시린 느낌이 없어졌다고. 이제 그저 그런 날들이 이어질 것이라고, 이제 ‘잔치는 끝났다’면서 지나간 이십대를 애도했지. 그래, 네 생각이 맞았는지도 모르겠어.


그 후로 10년. 상큼했던 왕정문은 왕페이라는 이름의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로 남았고 지금은 스캔들 메이커가 된 듯해. 소년 같던 금성무는 이제 중견의 일본배우로 활동하더군. 마마스 앤 파파스의 가수는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폭로도 있었더라고.



가진 것보다는 결핍을 훨씬 크게 느끼기 마련이지


서른 즈음에 다른 사람들처럼 너도 자주 농담 삼아 나이핑계를 대곤 했지. ‘내 나이 돼봐’ 그러면서. 생각해보면 좀 웃겨. 너와 친하던 대학시절 친구들 말이야. 그 중 몇몇은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 그렇지만 지금 기억해봐도 네 친구들이 이념으로 자신을 단련해온 것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운동에는 다양한 속성들이 있어서 어떤 친구는 정의감에서, 어떤 친구는 잘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로, 또 어떤 친구는 선량함을 추구하기 위해서 활동을 했던 것 같아. 너는 또 어떻고. 넌 게으른 날라리였잖아.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선배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눈 오고 비 오면 학교에 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집안에서 뒹굴고, 공부는 우리 학교 도서관보다 남자친구 학교 도서관에서 더 많이 했던. 그런데 아이러니한 게 당시를 돌이켜보면 그 친구들과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이념에 대한 것이었어.


그리고 대학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지금 너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된 J말이야. 걔가 대학 때는 완전히 연극판에 빠져 살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나서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을 불태웠잖아. 대학원에 들어가더니 아이 맡길 때가 마땅치 않자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데리고 수업에 간다며 울면서 이야기할 때 정말 대단하다고 그랬었지. J는 지금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 대학원은 그만 뒀지만 다른 곳에서 인문학 세미나에 열심히 나가고 있어. 아무래도 너와 네 친구들 대부분이 이과생이다 보니 인문학자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잖아. 그런데 이 친구의 이야기가 인문학자들에 대한 환상을 많이 깨주더라. 물론 약간의 상황적 과장은 있었겠지만, 이 사람들과 모이면 세미나 주제 이외의 대화는 거의 돈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거야. 오늘 점심을 먹고 더치페이를 하는 과정에서 ‘누가 500원을 더 내고 덜 냈다’라든가, ‘택시비를 어떻게 나눌 것이냐’라든가 하는 소소한 금전적 문제에 상당히 민감해하더래. 그래서 살짝 당황된다고 하더라고.


암튼 결혼하고 이사를 가고, 애 낳고 살면서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네 동기들이 재작년부터 1년에 두어 번씩 모임을 갖기 시작했어. 나도 연락은 받았지만 왠지 썩 내키지 않는데다가 이런저런 핑계거리까지 생겨서 한 번도 가지는 않았어. 갔다 온 한 친구가 내게 전화를 하더니 “애들이 생각보다 사회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 자식들 이야기나 남편 이야기하다 갈 줄 알았는데 뜻밖이던데?”하더라고.


우리는 어느 시기에도 어떤 결핍이 있고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



서른의 네가 상상하지 못했을 일들


네가 약국을 그만두고 대학원에 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네가 공부를 오래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그냥 너는 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렇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더 놀라운 것은 네가 이삼년 뒤에 소위 ‘활동’이라는 걸 하게 된다는 거야.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가끔 나는 너와 무엇이 달라졌기에 네가 이전까지 상상도 못했을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물론 나이가 더 들었어. 네가 좋아하던 한 시인이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너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 네가 애도한 이십대의 감성이 아름답지만 얄팍한 것이라면 세월은 너를 기쁨과 고통에 대해 더 폭넓은 공감을 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지.


너는 활동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HIV감염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삶의 사소한 것들이 주는 소중함을 배우게 되었어.


또 하나의 깜짝 놀랄 일은 내가 개를 키운다는 거야. 너는 개를 참 무서워했지. 집에 가다가도 개가 서있으면 꼼짝없이 서있거나 다른 길로 뛰어 돌아가곤 했잖아?


강아지 한 마리를 우연한 기회로 키우게 된 지 2년이 넘었어. 처음 데리러 갔을 때 이건 낯가림이라고는 없고 집에 데려와서도 오자마자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걸 보면서 성격은 참 좋은가보다 생각했는데, 곧 소위 ‘우다다’라고 하는 광란의 질주를 선보이고 한시도 가만있지 않는 걸 보고 저 개가 혹시 미친 거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더군. 사료는 씹어 먹는 게 아니고 흡입하는 거라는 걸 알게 한 이 강아지가 알고 보니 소위 ‘3대 지랄견’ 중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대단한 견종이라더라. 수많은 전설들이 인터넷에서 검색되는데, 인상적인 평가는 이 견종은 ‘뇌가 근육’이라는 거야.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간다는 거지. 이 견종 강아지를 길러본 한 지인은 ‘하루에 자전거에 묶어 2시간쯤 돌리면 데리고 살만은 하다’고 하더라고. 껌 씹듯이 휴대폰을 씹어주시고 숨겨놓은 사료를 찾아내서 온 바닥에 흩트려 놓고 먹거나, 겨울밤에 이불을 수도 없이 빨게 만드는 것 정도는 정상 범위인 거지.


그래도 어렵게 키워놓으니 정도 그만큼 듬뿍 들게 되는 것 같아. 이제 강아지는 내가 챙겨야 하고 행복하게 같이 공존해야 하는 소중한 존재가 되었어. 개와의 공존은 소수의 인간들이 얼마나 지구를 독점하고 자연에 대해 횡포를 부려왔는지 생활로 경험하게 만들더라. 여름철 계곡에 자신의 자녀와 다른 집의 강아지는 절대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은 과연 진리일까? 그 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고 그 ‘인간’은 보편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일까?



보편적이고 상대적인, 참 어려운 이야기


얼마 전에 몸이 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일이 생겼어. 이전 같으면 안 그랬겠지만,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다른 환자들에게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를 걸고 혹은 내게 건내오는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듣게 되더라고.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 가장 절망적인 것은 더 이상 쓸 치료약이 없게 되는 상황이야. 대부분의 신약이라는 것이 기존의 의약품보다 획기적인 효과가 있지도 않으면서 제약사는 그런 약을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높은 가격을 매겨 천문학적인 돈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환자들은 그러더라고. 기존 약이 아닌 ‘다른 약’에 희망을 걸 수 있다는 것으로 다른 모든 불합리함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거지.


살고 싶다는 순수한 바람이 제약회사의 돈줄이 되고 전략이 된다.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쓸 수 있는 새로운 약을 개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들기 때문에 약값은 비쌀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럴 듯하게 들리잖아. 그렇게 개발자의 이익을 보태주기 위해 특허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환자들의 순수한 바람을 거쳐 합리화되는 거지. 그런데 이렇게 비싼 약은 어떤 사람에게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구원이 되지만, 가난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 큰 절망이 되곤 하지. 약이 있는데도 죽어야 하니까 말이야.


예전에 병원에 입원한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어. 병원에서 보통 다인병실은 보험이 되고 상급병실은 보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상급병실료는 환자들에게 상당한 경제적 부담이 돼. 그런데 병원에서 입원한 환자에게 다인병실 부족을 이유로 들어 상급병실에 입원을 시키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 그래서 다인병실의 확보필요성을 알아보는 질문으로 ‘입원하시게 되면 어떤 병실에 입원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지. 내 예상은 사람들이 보험이 되는 다인병실을 원할 것이라는 거였지만, 응답은 의외로 ‘상급병실에 입원하고 싶다’는 것이었지. 경제적 여유만 된다면 누구나 상급의 좋은 병실에 입원하고 싶은 거야.


더 좋은 약, 더 좋은 치료에 대한 욕망은 너무도 정당한 거야. 그런데 그런 욕망이 소수에게 착취됨으로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도록 만드는 구조가 있다는 것이 문제지. 그래서 그냥 얼핏 볼 때는 사회적 인간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실현할 때 다른 사람의 권리와 거의 ‘언제나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


고통이 보편적이고 상대적인 것처럼 욕망도 그러하지. 인권운동이 어려운 것은 인권이란 누구나 누려야 하는 보편적이면서도 그 실현은 절대적인 모양일 수가 없기 때문인 것 같아. 아직 명확히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항상 두 개가 대립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어.


지금의 내게 의약품 접근권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 왜곡과 착취 없이 완벽히 실현되는 거야. 가장 크게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욕망의 충돌 혹은 인권의 충돌이 아니라 그것을 충돌하게 만드는, 그래서 비극을 가져오는,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인권침해야. 참 어려운 이야기지.


네가 10년 전에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르겠어. 내가 너였을 때 ‘정의’는 사람들이 ‘공평한’ 치료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공평함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 너는 선량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살았어.


그러나 네가 만들어준 기회가 여러 가지 일들을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보게 되고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만은 분명해. 내가 가진 지금의 생각이 오로지 활동으로 인해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지.



여전히 사는 것은 쉽지 않아


스물에는 서른이 되면 뭔가 인생이 잘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른의 네가 어려웠던 것만큼이나 혹은 그 보다 더 많이 마흔에도 삶은 복잡해 보이는구나.


너와 나의 관계만을 본다면 사람은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 너처럼 나도 뭔가 대단한 목표 같은 것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아. 그냥 선량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거지. 다만 나는 이전과는 다른 경험 속에서 살게 되었고 8할의 바람 속에 2할의 무언가를 채운 것은 그것인 것 같아.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인권의 구현이라는 게 어려운 것이다 보니 현실적으로 많은 타협이 구체화되고 있어. 선진국에서는 강력하게 특허를 앞세우되 개발도상국에 대해서는 느슨하게 하는 것 같은 그런 대안들 말이야. 이런 것들은 다른 대우를 함으로서 평등해지는 원칙에는 부합하기 때문에 이의를 달기 힘들어. 현실적인 대안인 것처럼 보여. 그럼에도 찜찜한 이 기분은 무엇일까?


그래도 분명한 것은 바람이 나를 더 키워준다는 것. 그리고 경험이 그 내용도 더욱 풍부히 채워줄 것이라는 것. 보이는 게 달라지다보면 결국 판단도 달라지겠지.


10년의 새로운 시작에 서서 네가 문득 생각나는구나. 인생은 정말 네가 생각하지 못했던 식으로 흘러가기도 한다는 것을 네게 알려주고 싶었어.



2010년 2월, 10년 후의 그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