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어느 넝마주이가 생각하는 사진과 인권

미리 말씀드리자면, 나는 인권에 관한 생각으로 사진을 찍어 본 적도, 글을 써 본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에게 인권’이라거나, ‘인권이 내게로 왔다’는 원고를 주문하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일을 핑계로 원고청탁을 정중하게 거절하였으나, 거절이 거절이 되지 못하고, 석 달의 유예기간을 부여받아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가뭇없이 석 달이 흘러버렸음을 깨닫고 원고와 씨름하는 시름에 잠깁니다.


나는 나를 말할 뿐입니다. 나를 생각할 뿐입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관찰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게 내 작업이자 직업입니다. 나는 어슬렁거리며, 우리사회가 흘려놓은 넝마들, 허나 내게는 고민스럽고 자꾸 시선이 박히는 그런 장면들을 머릿속에 주워 담고, 사진기에 주워 담고, 수첩에 주워 담아, 내 안에 머물게 했다가 그것을 다시 넝마로 엮어 밖으로 흘려보내는 가련한 넝마주이인 셈이죠. 나는 성경을 줍지 않듯(그것은 너무 깨끗한 성수이자 역겨운 오수이므로) ‘인권’이라 명시된 넝마를 줍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은 적절치 않은 필자가 적절치 않은 얘기를 떠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어지는 두 개의 생각은 이미 써 놓았던 것을 재수록 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첫 번째는 청소년 인문학 모임인 ‘인디고서원’의 <인디고잉>을 위해 썼던 것이고, 두 번째는 <씨네21>에 썼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앞의 두 장면을 다루는, 사진에 대한 고민을 덧붙인 것입니다.



생각1. 안개 속의 망연자실


눈앞은 순식간에 뿌연 안개로 가득했어요.


펑펑 터지는 폭음도, 군홧발 소리도, 비명과 울부짖음도 내 귀엔 멀게만 느껴지더군요.


나는 망연자실했던 것 같아요. 조금은 겁도 났겠죠. 그래도 그냥 서 있을 수밖에 없더군요. 눈앞의 안개는 내 머릿속까지 파고들어 오만가지 생각을 불러왔다 지우길 반복했어요. 오만가지 생각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이, 눈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어요. 안개 속의 아수라장. 대체 뭘까, 이 상황은…… 안개 속의 이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정녕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어느새 거의 20년 전의 일입니다.


동두천에서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며 삶을 이었던 윤금이 님이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벌거벗긴 채 난자당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던 사건이 발생했지요. 학생이었던 나는 대자보에 붙은 그 참혹한 사진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습니다. 혹시 조작된 사진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참담했습니다. 미국인이 한국인을 잔인하게 죽여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극한의 모습이었기에 참담했습니다.


최소한의 진상규명과 그에 따른 응분의 책임이 따를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의 수사당국이 보여준 모습은 무능력과 수수방관, 눈치 보기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구조적으로 주한미군의 범죄를 수사하거나 처벌할만한 권한을 갖지 못했습니다. 한미간에 맺어진 ‘주둔군지위협정’(SOFA) 때문이었지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각층에서 SOFA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상식적인 얘기가 불순분자의 선전선동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고통 속에 숨져간 윤금이 님의 추도식이 탑골공원에서 열렸습니다. 숙연한 자리였지요. 부디 하늘에서라도 그 한을 푸시길 바라며 뼛가루를 공원 안 나무 아래 뿌리려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방에서 최루탄이 날아들었습니다. 눈앞은 순식간에 최루탄 안개로 가득했죠. 백골단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때리고 잡아가고 흩어놓았습니다. 뼛가루와 최루탄 가루가 섞여 안개가 되는 그 형국에 나는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겁니다.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체 왜 이래야 하는 것인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지더군요. 우리 사회가 연출했던 그 황량한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어떤 신문에 피켓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실려 아주 민망했던 기억도요.


그 사건 이후 꼭 10년 만에 두 여중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압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사고였죠. 사고는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발생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그런 조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우리 수사당국은 10년 전 모습 그대로 무능력, 수수방관, 눈치보기로 일관했습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SOFA는 달라진 게 없었고,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사건처리는 멀기만 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게 6월인데, 촛불이 들고 일어선 건 겨울이 다 되어서였습니다. 길을 가던 아이들 두 명이 죽었는데, 아무도 유죄는 아니라니 어떻게 조사를 해야 그런 결과를 낼 수 있는지 의아할 따름인 당국의 모습에 촛불이 불붙은 것이지요. 탑골공원 앞에서 학생이었던 나는 광화문에서는 기자로, 혹은 사진가로 ‘여중생 사건’의 긴 여정을 기록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의 모습이 내 사진기 속에 담겼죠. 그들은 답을 알고 있어서 거리로 나온 게 아니라,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었기에 거리로 나왔을 거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지난 필름들을 들춰보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20년 전 찍히는 입장이었던 나는 10년 뒤 찍는 입장에서, 반복되는 역사를 필름에 담았다.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고, 그때 내 필름에 담겼던 어떤 학생이 나와 같은 기록자가 되었을 때, 우리 역사는 다른 장면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어떤 분은 왜 그렇게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느냐고 질타하지만, 그것은 아직 내가 의문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의문을 내 안에서 소멸시키기보다는 나누어야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가끔 반복되는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역사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작은 긍정 하나는, 역사의 순환과 전진이 ‘의문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생각2.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아이들은 친구의 열네 살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한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단짝이었던 미선이와 효순이는 피를 나눈 자매만큼이나 우애가 깊었다. 동갑내기 아버지들이 다니던 학교를 동갑내기 아이들이 이어 다녔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둘은 줄곧 함께였다. 미선이는 노래를 잘했다. 커서 가수가 되고 싶었다. 오빠 것 말고 자신만의 카세트를 하나 갖고 싶어 엄마를 조르곤 했다. 효순이는 그림을 잘 그렸다. 커서 화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운동을 잘했던 터라 여군이 되고픈 꿈도 꾸었다. 공부 1등할 자신은 없어도, 엄마 도와 고추 따고 비닐하우스일 하는 거라면 척척해내는 씩씩한 아이였다.


때마침 월드컵경기가 온 나라를 달구고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도 달아올랐다.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고, 붉은 손수건을 흔들며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느라 목이 쉴 지경이었다.


그날도 미선이는 빨간 월드컵응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생일잔치에서 배불리 먹고, 시내에 나가 신나게 놀 생각이었다. 친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두 아이는 오지 않았고, 오지 못했고, 결국 생일잔치는 열리지 못했다. 2002년 6월 13일 아침 10시 45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수레너미길에서 벌어진 ‘그 일’만 없었더라면, 시골소녀들의 지저귐으로 가득했을 생일잔치였다.


공무 중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아무도 공무 중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한 적이 없는데도, 공무 중이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미군의, 미군에 의한, 미군을 위한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사고 가해자들은 모두 무죄평결을 받았다. 예의 ‘공무 중’이라는 면죄부가 발행되었다. 사건 조사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던 한국정부는 재판과정에도 아무런 참여를 하지 못했다. 능력이 없었고, 의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SOFA(주둔군지위협정)가 구조적으로 모든 일을 가로막았다. 미군을 위한 안락한 소파였다. 불평등한 소파를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소위 ‘좌파’ 혹은 ‘빨갱이’들의 철없는 주장으로 치부됐다.


교복을 입은 아이가, 아스팔트에, 오토바이가 쌩하고 달리는 아스팔트 위에 서 있다. 얼굴이 없다.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얼굴 없는 아이가 하얀 장갑을 끼고서,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두 아이의 얼굴을 들고 있다. 아이들 얼굴 위로는 검은 선이, 아스팔트 바닥 위로는 하얀 선이 내달린다.
얼굴 없는 아이는 대학생이라고 했다. 동생들 볼 낯이 없고, 이렇게라도 해야겠기에 교복을 입고 나왔다 했다.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살았더라면 자신들의 얼굴을 든 언니와 같은 스물두 살.



생각3. 사진의 당위와 함정


맑스는 프랑스대혁명의 상황을 분석한 「루이 보나빠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이렇게 썼다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


무엇을 희극으로 보아야 하고, 또 무엇을 비극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목격했던 숱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어떤 상황임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것들은 비극적 희극인 동시에, 희극적 비극이곤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짊어진 분단과 폭력의 아이러니죠.


윤금이 님의 죽음과 두 소녀의 죽음은 분단체제의 무능력과 무감각, 저열함을 남김없이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사건에서가 아니라, 그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사회적 장치에서 그 초라함이 낱낱이 드러났던 것이죠.


아울러 그 죽음들은, 사진이라는 공명정대한 매체, 아니 공명정대할 거라고 착각하는 매체, ‘현실의 목격’이자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신화를 지닌 ‘사진’의 사용과 전파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논란과 반성을 불러왔습니다.


이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하며, 이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모든 당위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장면을 마구(!)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죽은 이의 몸을 드러낼 때, 정말 드러내야만 한다고 생각할 때, 앞서야 하는 고민은 충격과 자극이 아니라, 죽은 이의 삶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유가족이 동의했다는 사실이, 죽은 이들의 몸을 유인물로, 대자보로, 거리로 실어날라도 된다는 변명이 될 수는 없지 않나요? 윤금이 님의 참혹한 몸에 수의를 입히고, 뇌수가 흘러내린 소녀의 머리에 예쁜 꽃모자를 씌워 주는 건, 그분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눈물 흘렸던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사진이, 기록이, 예술이, 선전이, 타인의 고통을 어디까지 중계하고, 어디에서 삼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생각들이 있을 테지만, ‘일단 멈칫!’, 정지가 선물하는 깊은 숨만으로도 우리는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권을 따로 떼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지만, 굳이 머리를 쥐어 짜 본다면, 결국 인권이란 건 ‘나도 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의 자각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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