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나의 만화 이야기

사실 인권은 우리 모두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요? 그것을 인지하고 있느냐와 어떻게 인지하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중학교 때였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데 장래희망이 있었지요. 정말 그때는 진지한 심정으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온전한 사람,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 그런 말을 배웠을 때였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아마도 이런저런 고민이나 고뇌를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부처 같은(?) 그런 사람을 꿈꿨던 게 아닐까 해요. 그래서 장래희망에 ‘사람’이라고 적었지요. 뭐 대단한 걸 알아서라기보다는 아마도 그때쯤엔 누구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같네요.


어려서는 그렇게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머리가 크면서 국가도 알고, 가정형편도 알게 되니 문무를 겸비한 군인이 되고 싶어졌지요. 물론 한켠에는 여전히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고 싶었지요. 작가에 대한 꿈은 누나의 영향이 컸어요. 작가를 꿈꾸던 누나가 선별해 사 모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니 프랑스 무슨 문학상 수상작이니 하는 책들을 자연스럽게 읽게 되고 글쓰기에 대한 선망이 커졌지요. 그러면서 여전히 만화를 보고 그리며 조금씩 철이 들어가고 있었지요. 누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네요. 누나에게 이끌려 인천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고은 선생 강연회에 갔지요(강사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죠). 고3이었던가, 당시에 저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투철한 국가의식과 사명감’을 갖고 있었는데 강연 내용을 듣다가 너무 화가 나서 뛰쳐나왔어요. 왜곡된 국가의식과 사명감을 가진 고3 청년은 그 뒤로 누나와 싸우기까지 했지요. 나중에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덕분에 어릴 적부터 군인들하고 놀았지요. 그러다보니 군인이 문무를 겸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모형이라고 생각했었지요.



대학 학보사 생활과 군대에서의 녹화교육


대학에 들어가 보니 세상에나! 그동안 내가 배운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거짓투성이라는 사실에 많은 충격을 받았지요. 나중에 읽은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그 자체였지요. 다행히 만화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들어간 학보사에서 만화를 그리고, 취재를 하면서 세상을 보다 제대로 보게 되었지요. 그리고 장남 역할을 다하기 위해 선택한 경제학 공부가 세상 보는 눈을 조금 더 단련시킬 수 있게 해줬고 내 만화와 궁합이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지요. 내 만화가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고요.


앞서 얘기했듯이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릴 적부터 군인들하고 놀았지요. 어릴 땐 ‘군대체질’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고 스스로도 ‘군대체질’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본의 아니게 끌려간 군대지만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들은 먹기 꺼려하는 이른바 ‘짬밥’도 내 입에는 딱 맞아서 한때는 ‘여단먹보’라는 별명까지 가졌지요. 운동 좋아하고 밥 잘 먹고 총 잘 쏘고……. 아, 그러다가 소총사격을 하던 중 이명을 얻었는데, 그땐 그런 건 문제로 여기지 않고 군인정신으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참 어리석었죠.


그러다 선배의 권유로 참가했던 한 사건으로 군대에서도 계속 진술서를 쓰고 나중에 전출 간 부대에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셨다는 공보를 받고 공무휴가를 나오다가 그 길로 보안대에 끌려갔어요. 이른바 녹화교육이지요. 아버지의 사고는 거짓말이었고요. 그런데 어릴 적부터 군인들하고 지낸 탓에 크게 두렵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어르고 뺨치는 행태들이 너무 눈에 다 보여서 좀 웃기기까지 했지요. 내 잠재의식에는 군인들은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하면 해결해주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게다가 사실 그때만 해도 군인을 여전히 이상적 인간형으로 믿던 생각들이 남아있어서 정치군인들을 무척 혐오했고 그래서 연병장에 쭈그리고 앉아 보안대 장교 한 명이랑 토론을 했던 기억도 있네요. 전두환 집단의 정치행위가 옳다는 거냐? 조국에 인생을 바친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은 뭐가 되는 거냐? 뭐 이런 이야기들을. 조사해도 별게 없는지라 3박 4일 보안대에서 먹고 자다가 나머지 휴가기간을 반납하고 자대로 원대복귀를 했지요. 아마 그때 이후로 내가 군대체질이 아니라는 생각과 군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제대를 하고 바로 복학해서 짧은 병장머리로 학교를 다녔지요. 여전히 광주학살주범 전두환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라 학교에서는 거의 날마다 집회와 시위가 있었지요. 사실 복학을 하고는 그동안 미룬 공부를 좀 해 볼 생각이었지요. 군대에 있으면서 제일 하고 싶었던 게 공부였거든요. 제대하며 후임들이 만들어주는 전역패에 “공부하다 죽자!”고 써넣었을 정도였지요. 정말 그동안 밀렸던 공부한답시고 책을 뜯어먹다시피 하면서 도서관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점심 먹으러 나간 길에 친구를 만났어요. 수배생활을 하던 그 친구는 경찰에 잡혀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는데 온 몸이 멍투성이에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어서 차에서 내리고 있었지요. 그 친구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뭐 그런 생각이었지요.



생활인과 만화가 사이에서


그러던 중에 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던 선배로부터 만화작업 제안을 받았어요. 주로 노동법과 노동조합법에 대한 만화선전물과 산업재해 문제를 다룬 소책자들이었지요. 그렇게 만화에 대한 단련이 지속되었지요. 내 만화수련의 반은 운동이 키워준 것이에요. 하지만 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생활문제를 고민하다가 취직을 했지요. 그러면서 친구가 이야기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에 빠져서 가톨릭 청년회 활동을 했는데 주로 편집부 일을 하면서 만화를 그렸지요. 그러다보니 주보에도 만화를 그리게 됐고 한편으론 여전히 노동자들 실태를 알리는 선전물을 그리며 지냈지요.


회사에 취직해서는 자본주의 톱니바퀴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절감했어요. 더불어 나 스스로도 업무를 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적응시키는 일이 생겼지요. 일테면 이런 거지요. 연말연시나 추석이 되면 관련사들마다 선물을 돌리는데 상대 회사와 적당한 선물을 주고받지요. 뭐 미풍양속이랄 수 있지요. 그러나 입사 첫 해에는 그것조차 참 어색했어요. 첫 해에 선물을 돌리러 가서는 그 어색함에 어쩔 줄 몰라서 선물을 지하주차장 차에 모두 놔두고 15층 정도 되는 건물 층층마다 있는 사무실들을 돌아다니면서 갖다 줬지요. 그러나 다음해에는 자연스럽게 한 회사 사무실에 모두 올려놓고 나눠주게 되더군요. 회사들끼리야 그렇다 쳐도 공무원들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은 큰 금액이 아니어도 찝찝했지만 그것도 곧 자연스럽게 숙달(?)이 되었지요.


더 큰 문제는 사내 여직원들에 대한 기업문화였지요. 어느 날인가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나서 상사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데 그 상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어요. “미스 아무개 엉덩이 봐라. 시집가면 애 잘 낳겠다.” 정말 질겁했지요. 대뜸 그런 이야기는 사모님한테나 하라고 하고는 자리를 피했는데 정말 우리 의식이 사회 속에서 이런 식으로 물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지요. 제 미래도 그렇게 규정당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끔찍했지요. 그래도 참고 열심히 지내려 애쓰다보니 마침 계열사에 사보가 생기면서 만화를 연재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지요. 그렇게 만화는 내게 작은 숨 쉴 공간을 만들어 주었지요.


여전히 꿈을 꾸고 있던 덕분일까, 기회가 왔어요. 지방 신문사에서 시사만화가를 뽑는다는 이야기를 후배에게 전해 듣고 지원을 했는데 덜컥 붙었어요. 한 달여간 본의 아닌 투잡으로 테스트를 받다가 회사를 옮겼지요. 시사만화가로 살아갈 길이 열린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간섭과 제약이 너무 많았어요. 지방신문이지만 중앙지 못지않은 시사만화로 언론사에 한 획을 긋고 싶었던 내 꿈은 왜곡되기 시작했지요. 청와대, 국방부, 안기부(현 국정원), 광고주까지 비판대상에서 제외하라는 이야기. 괴로웠지요. 내가 의도한 바를 표현하지 못하자 미칠 것만 같았어요. 마침 한겨레신문사에서 만화초대석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필명을 써서 그곳으로 보내기 시작 했지요. 그렇게 시사만화가의 삶은 뒤틀리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게다가 시사만화만 그리기로 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신문 거의 모든 지면의 그림을 내가 그려야 했어요. 나름 고향에 대한 애정을 갖고 열심히 하고 싶었는데 결국 지도까지 그리라는 편집국장과 싸우고 그냥 나와 버리면서 막을 내렸지요. ‘프리랜서’ 만화가가 된 거지요.



만화가 조직과 인권운동사랑방


드디어 만화만 그리며 살게 됐어요. 그러나 그것만이 내 삶이 될 수는 없었지요. 민족미술협의회 만화분과에 가입하고 만화가들 모임을 찾아다니면서 올곧은 만화를 그리고, 만화만 그리는 만화가가 아닌 만화활동가가 되고자 여기저기 뛰어다녔어요. 거기서 만난 만화가들과 모임을 꾸리고 사무국장으로, 편집장으로 활동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만화로 내 삶을 꾸리면서’ 문제에 봉착했어요. 직장을 갖고 있었을 때 내 만화는 그냥 그려줘도 괜찮았지요. 생계와는 무관한, 그것은 운동이고 활동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고료’를 받아야 했어요.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팍팍한데 무작정 고료만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 내 나름대로 고민을 하면서 몇 군데 단체들을 떠올렸어요. 한 군데만 골라서 활동가로 만화작업을 하고 나머지는 적더라도 고료를 받자. 그런 원칙을 세웠었지요. 그 중에 하나가 인권운동사랑방에서 발간하는 팩스신문 <인권하루소식>이었어요.


일인일단. 한 사람의 작가가 하나의 단체 활동을 하자, 그런 거지요. 평소 후배들에게도 만화가로만 매몰되어 살지 않기 위해서 만화로 활동할 수 있는 한 단체를 정하기를 권하고 있었지요. 그것이 만화창작자로서 올곧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권운동사랑방의 만화활동가였던 거지요.


때는 1997년 여름. 당시에 청소년보호를 빙자하여 만화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지요. 만화의 미음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화 한 장면만 가지고 트집을 잡고 이두호, 이현세, 배금택 등 대표적인 만화가들이 검찰에 고발되어 치욕스런 날들을 보내고 만화계는 여기에 대응하느라 바빴지요. 그 소식을 <인권하루소식>이 표현의 자유 문제로 다루면서 당시 사무국 일을 보던 내게 글을 부탁했고 글과 함께 만평을 보내면서 그 기회에 나는 <인권하루소식>에 계속 연재를 하고 싶다고 제의했지요.



다시, 실천하는 만화활동가로 서기 위해


그렇게 시작된 만화사랑방 연재가 어느덧 14년째네요. 그동안 만화조직 활동가로, 시사만화가로 살아오면서 만화운동과 운동만화를 아우르려고 애써 왔지요. 특히 정치와 예술을 분리하려는 움직임들에 맞서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실천하고 싶었어요. 뭇사람들 속에 예술이 있음을 믿고 그 속에서 만화창작을 하려고 했지요. 물론 둘을 아우르려다보니 여전히 힘들고 서툴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었지요.


요즘에는 ‘말보다 실천’이라는 생각을 깊이하고 있어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즐겁게 실천하는 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그럴 때 대중들에게 믿음을 얻을 수 있고 그들 속에서 함께 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요. 눈앞의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고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치는 정치꾼 같은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실천이 없으면, 찬란한 공치사나 내뱉으며 인권을 짓밟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요즘은 내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실천을 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특히 ‘용산학살현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리며 민중들과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지요. 그래서 요즘은 내 작은 재주인 만화가 많이 쓰이기를 바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캐리커처를 그리고 있어요. 물론 날마다 그림공부 삼아 크로키도 하고요. 가끔은 술에 취해 얻은 용기로 그림 그린 사람에게 그림을 주기도 하지요. 나름 민중미술을 실천하는 것이란 생각을 갖고 하는 거지요. 하, 하, 하.


얼마 전에는 찾아가는 문화예술활동 차원에서 문화연대 활동가들과 함께 ‘콜트콜텍악기노조 지원 캐리커처 행사’ ‘전철연 후원의 밤 캐리커처 행사’ ‘MBC지키기 촛불문화제 캐리커처 행사’를 했어요. 또한 서울민족미술협회 작가들과 함께 헤이리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행사’에 가서 캐리커처 그리기도 했지요. 그런 것들이 내 삶을 행복하게 하고 우리 삶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고 믿고 있어요.


이런 모든 것들이 인권운동사랑방과 인연을 맺고 만화사랑방을 연재하면서 인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현장에서 멀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들이 아닐까 싶어요. 아, 하지만 ‘인권’을 생각하면 여전히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더 열심히 만화사랑방을 그려야겠지요. 그게 내가 삶 속에서 인권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