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삶이 내게 준 선물

1989년에 나는 대학 1학년이었고, 열아홉 살이라는 이유로(!) 이미 없어져버린 대학생 회수권 대신 동생의 중고생 회수권을 썼다. 그 89년에 우리 학교에는 ‘학원 민주화’를 위한 수업거부와 휴업, 도서관 철야농성이 있었는데 새내기였던 우리들은‘운동’이라든지 ‘운동권’이라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의 농성과 시위에는 제한적으로나마 참여했다. 특히나 친했던 여자동기들끼리는 “사회 민주화는 잘 모르겠지만 학원 민주화 싸움은 참여하는 게 옳다”는 말을 주고받곤 했었다.



생애 최초의 공적 폭력


내 안의 그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 바로 노동절이었다. 참여는 못했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연세대 430집회. 선배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연세대에 가고 싶었다. 모두들 며칠 전부터 집회장에 들어가 있어서 끈 떨어진 연처럼 수업도 없는 썰렁한 학교를 돌아다니다 기독학생회 선배를 만나 함께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넷이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다가 우연히 행선지가 같아서 합류하게 된 또 한 사람. 버스를 타고, 그리고 다시 갈아타고……. 내 안의 벽과 집안의 허락만 얻으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곳은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딘가에 내렸다. 독립문이 보이는 곳이었고, 선배는 산을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저 산을 넘으면 연대가 있나보다.’


낯선 동네였다. 산을 타듯 마을을 타고, 마을이 끝나갈 즈음에 정말 산이 나타났다. 모두들 굳게 입을 다문 채 앞만 보며 걸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긴장했을 것이다. 산을 거의 다 오르자 조금 마음이 풀린 선배들은 웃으며 잡담을 주고받았다.


“여긴 경찰이 없나 봐. 그런데 내려갈 때 있으면 어떡하지?”
“이렇게 힘들게 올라왔는데 그럼 너무 약 오르잖아?”


같이 있던 모르는 사람이 말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 난 이번에 잡히면 3년을 썩어야 해요.”


나는 몰랐지만 그 사람은 모두에게 유명했다.


“집행유예 기간인데 며칠 전에 로터리 파출소를 뽀갠 것으로 수배 중이거든요.”


앞서가는 그 사람 뒤에서 선배는 그 사람이 투쟁본부의 단과대 책임자라고 말해주었다.


정말 좋은 날씨였다. 이제 봄은 제철에 접어들어 햇살은 적당히 따사로웠으며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보다 훨씬 편안했다. 절 같은 게 보이면서부터 우리들의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러다 정말 땅에서 솟아난 것 같이 백골단이 나타났다. 청카바를 입은 그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타났다. 그때 선배들은 왜 뛰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심드렁해서였을 거다. 그들은 귀찮다는 듯이 여기서 뭐하냐고 그랬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절에 왔다고 그랬다. 그들은 다른 쪽을 가리키며 여기는 위험하니까 저~쪽으로 가라고 그랬다. 무성영화 같은 기억이다. 그것도 드문드문 끊겨있는. 어느 순간 수많은 백골단과 전투경찰들이 있었고 우리는 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짐승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숨을 쉬듯 오가며 때렸다. 어떤 남자의 머리를 움켜쥐며 “너 머릿속도 빨간 색인가 한번 깨뜨려 볼까?”라는 농담으로 차 안의 소수였던 자기 동료들을 웃겼으며, 지금은 없어진 <월간 노동자>의 기자는 “이것도 기자증이냐?”는 코웃음 한마디와 함께 사람이 저렇게 맞고도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맞았다.


나는…… 내 소지품에서는 중고생 회수권이 나왔다. 그들은 “얘는 보내야 해” 하면서도 나중에 사람 수가 맞아야 한다나 뭐 그런 비슷한 말을 하면서 앞에 앉혀놓았다. 나는 “날씨 좋아서 땡땡이 치고 놀러 다니는 뺀질이 고등학생”이 되어서 뺀질거리게 생겼다고 한 대 맞으며 그 모든 것들을 다 지켜보았다. 우리가 탔을 때 반도 안 차 있던 그 차 안에서, 그들이 채워야 하는 숫자가 될 때까지, 그 시간까지, 새로이 사람이 들어오면 행해지는 구타와 욕설과 비아냥과 특히나 여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모욕까지……. 나중에는 하얗게 질려서 구역질을 해야 했던 그 무기력. 분노라고 이름 붙이기엔 너무나 초라했던 비애.



그 창가에서 보았던 햇살


경찰서에 갔다. 넓은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수배 중이라는 그 사람은 창가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사람 옆에 앉아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자기를 보지 말라고 했다. 만약에 같이 잡혔다는 것이 알려지더라도 자기를 안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창을 보았다.


그를 피해서 저만큼 떨어진 다른 창으로 바라보았던 바깥세상. 건물 그림자만큼의 어둠과 금을 그으며 햇살은 저기 저만큼서 찬란한 밝음을 쏟아내고 있었고, 마치 초등학교 근처에서 듣는 것 같은 소란함이 아련히 들려왔다. 무심히 걷는 사람들. 바로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어떤 이는 일상을 살아가고 어떤 이는 탈출을 꿈꾸고 있었다. 그 사람의 움직임에 집중되었던 그 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의외로 끝은 빨리 왔다. 사복을 입은 어떤 아저씨가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간다.” 그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주위에서 소곤거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외곽에 버린대.”


그러면…… 이제 그 사람은 안전하겠다. 휘경여고라고 쓰고 주민등록번호를 쓴 내 이름 밑에 동대문상고라고 쓰고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쓴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똑같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되어서 함께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경찰서를 떠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그 사람과 같이 앉았다. 창은 가려져 있었고 머리를 숙여야 했으며, 머리가 조금이라도 들리는 사람은 까만 막대기로 맞았다. 그리고 차는 떠났다.


그 사람이 소곤거렸다. “…… 밖으로 나가지 않아.”


정말 차소리는 더 많이 들렸고 차는 천천히 움직였으며 그 때부터 나는 울었다. 아까 본 창밖 햇살을 생각하며 울었다.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시간. 탈출이 가능했을 것 같은 그 순간을 놓치고 이제 그 사람은 햇살로부터 격리가 되는 것이다. 길고 긴 시간 동안.


기억난다, 종로경찰서. 담장은 높고도 단단했고 다시 들어간 곳은 열려진 창도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커다란 홀이었지만 그 곳에서 여자들은 따로 모여 있어야 했다. 얘기도 할 수 없었고 할 얘기도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우리들은 탁자에 있는 휴지로 사랑운을 점쳤다. 휴지로 심지를 만들고 아래 위를 묶은 다음 하나의 고리가 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없이 할 수 있는 건, 생각 말고는 그런 것 밖에 없었다. 일찍부터 시작된 그 날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갔다. 네모난 양은도시락에 담겨있는, 간장만 넣었을 것 같은 상추조림에 푹 퍼진 보리가 들어있는 밥을 먹었다. 그것은 점심이었을까, 저녁이었을까? 그리고 조서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그냥 약수터에 물먹으러 갔다라고 썼던 것 같고, 세미나 한 책을 쓰라고 해서 옆에 언니 걸 보고 ‘꽃들에게 희망을’이라고 쓴 기억밖에(나중에 선배들은 그럴 땐 ‘세미나가 무슨 말인지 모름’이라고 쓰라고 했다). 그리고 TV에서 보던 것 같이 타이프를 치는 사람 앞에 앉아서 얘기를 했다. 한 명씩 한 명씩 그렇게 조사를 받는 동안 그 사람은 또 다른 어떤 이와 함께 철창 안에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그는 계속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입모양…….
‘…… 연락’


집에서 오빠가 데리러 왔다. 엄마가 두부를 주셔서 먹고 학교에 전화를 했고 다음날 처음으로 거리에 나갔다.



평화가 주었던 충격


오빠나 언니들 덕분에 세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았다. 어느 성탄절에는 교회에서 밤을 새고 돌아와 보니 집안이 휑했다. 오빠와 언니들이 샀던 『중국의 붉은 별』이나 김남주의 시집 같은 것들을 경찰이 싸그리 가져가 버려서이다. 행방불명이었던 셋째 언니가 며칠 만에 경찰서라고 울먹이며 전화를 했을 때 엄마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화를 감추지 못한 채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86학번인 셋째 언니는 두 번의 연행을 거친 후 변해갔다. 언니는 빛나던 사람이었다. 항상 활기에 차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 활기를 나눠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변해버렸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언니는 휴학을 한 채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나한테 학생운동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빛을 송두리째 뽑아가는 블랙홀 같은 것.


대학에 들어가서, 아니 들어가기도 전, 신입생 교양시간에 영화를 보고 『껍데기를 벗고서』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에 황홀해했다. 건강하고 열정적인 선배들을 보며 내 마음과 몸은 활기로 가득 찼다. 하지만 언니도 이런 시간을 거쳤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바짝 긴장됐다.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 같다는 불안감, 그 길 끝에 우울과 은둔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첫 걸음부터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생전 처음 학교 바깥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힌 것이다. 국가권력의 끝자락을 만났을 뿐이었는데도 그 무자비함과 잔인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1989년 4월 30일 아침, 나는 그 사람이 잡힌 사실을 직접 알려야 할 것 같아서 학교에 갔다. 학교는 텅 비어 있었고 선배언니가 단과대 사무실에 갔다 오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언니를 따라 버스를 타긴 했지만 솔직히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다니는 길마저 막아섰고 산까지 다 둘러서서 막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는 생각뿐이었다.


‘언니, 다 부질없는 일이지 않아?’


마흔 살의 내가 열아홉 시절의 일을 적고 있다. 긴 세월이 흐른 후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2003년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반전 평화집회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 내가 너무 오래 쳐다봐서인지 그가 나를 봤고 그래서 그냥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긴 시간이 지났어도 나는 그 사람을 알아봤다.


나는 자주 그 사람 꿈을 꾸었다. 장면은 항상 같았다. 탈출을 시도하던 그 창가. 어떨 때엔 내가 창문을 넘기도 했고 또 어떨 때엔 그 사람이 넘다가 잡힐 것 같아 내가 소리를 치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항상 다리는 굳어 있고 혀조차 굳어 있어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린 내게 그 사건은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89년 4월 30일, 선배 언니를 따라가서 본 거리 풍경도 내겐 충격이었다. 선배 언니가 신촌 근처라고 말해준 그곳은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화장을 한 여자들,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들, 팔짱을 낀 커플들. 세상에, 아니 세상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남쪽의 어느 도시에서는 민주노조운동 때문에 식칼테러가 일어나고, 경찰들은 노동절 집회에 참석하고 싶어 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개 패듯 사람을 때리고, 또 어떤 사람은 창살에 갇혀 몇 년을 살아야 한다는데 이렇게들 즐거워도 되는 거야? 눈썹 하나 까딱 않은 채 잘 돌아가는 세상, 그 백색의 평화가 절망스러웠다.



삶이 내게 준 선물


그렇게 한참을 혼자 우울해하고 혼자 절망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어떤 사람이 “진군, 진군, 총 진군!”이라고 외치며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봄나들이 나왔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긴 시간이 지난 후, 나는 그 순간을 삶이 내게 준 선물로 기억한다. 서울 지리를 모르고 가두투쟁 경험이 없었던, 그런 나만이 받을 수 있었던 선물. 서울에 익숙해진 후 그 곳을 다시 알게 되었다. 아현동 가구거리, 그 곳은 평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의 가두투쟁을 거치면서 인파 속에서 우리 편을 알아보게 되었다. 화장한 얼굴 너머, 정장 차림 너머의 진심을.


전생 같은 기억이다. 그 날 이후 20년의 시간이 흘렀다. 삶이 그렇게 귀한 선물을 주었으나 나는 그다지 열심히 살지는 못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직업적 혁명가를 꿈꾸며 가출을 하기도 했고, 그 다음 몇 년 동안은 갈 길을 몰라 헤매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헤매던 몇 년 동안 나는 세상의, 그리고 내 안의 바닥을 보았다. 지독한 헤맴 속에 있는 나를 안타까워하던 오빠가 “네가 하고 싶은 일에서부터 시작해 봐”라고 했을 때 처음엔 선뜻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돌아본 세상엔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한낱 사치로 여겼던 산행과, 여행과, 음악이 가득 찬 락카페, 책들로 가득한 개가식 도서관, 귀여운 아이가 있는 편안한 가정……. 세상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너무나 많이 있었고 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젊은 여자일 뿐이었다. 긴 시간을 사람들 사이를 떠돌며 비틀거리다 나는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치열함이나 감동의 징검다리를 딛고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혁명을 꿈꾸는 것은 한판 싸움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견디고 즐기며 묵묵히 시간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이제 한쪽 발만이 아닌 ‘스스로의 욕망’과 ‘삶의 의미’라는 두 발로 굳건히 서야 한다는 것을.


내가 일하는 푸른영상에서는 요즘 4대강 사업에 대한 다큐멘터리 <강>을 만들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좋은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가장 좋은 한 가지를 꼽는다면 누군가의 자리를 이해하기 위해 온 마음을 기울일 수 있다는 점이다. 20대의 나는 지나치게 말이 많았고 지나치게 속단했다. 그리고 자주 그 날의 그 선물을 잊었다. 화장한 얼굴과 정장차림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그었던 열아홉 시절의 속단을 나는 그 뒤로도 자주 남용했다. 하지만 삶은 번번이 내게 그 선물을 상기시켜준다.


4대강 사업에 찬성하여 땅과 집을 다 내준 일흔 넘은 어르신이 파헤쳐질 강과 뽑혀나갈 나무들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뚝뚝 흘릴 때, 주름진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들 때까지 말을 못하고 흐느낄 때 그 눈물을 보며 생각한다. 89년 4월 30일에 보았던 화장이나 정장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입장만을 가지고 함부로 선을 긋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이는 것 이면의 진실을, 한 사람을 몰아쳐가는 시스템의 모양새를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지나치게 낙관하거나 깊이 절망하는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이런 얄팍한 나를 좋아하진 않지만 매사에 무덤덤한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리고 믿는다. 소소한 문제에서부터 삶의 향방이 결정되는 큰 문제까지,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던져지는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역사에 있어서도 그리고 개인사에 있어서도 맞닥뜨리는 문제는, 그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면 풀 수도 있다는 것을. 시간이 걸리고 지루하고 지독한 혼돈에 빠지더라도 그런 자기가 한심해 보이고 세상이 자기만을 남겨두고 성큼 나아가는 것 같은 생각에 빠지더라도 모든 문제의 해답은, 어떻게 할까, 뭘 할까의 대답은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내 두 발을 굳건히 땅에 딛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