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당신은 ‘요즘 아이들’이 걱정스러운가

한 무리의 학생들은 팬티만 입고 거리를 질주하고, 어떤 아이는 이 엄동설한에 바다에 던져졌다. 급기야 또 다른 학생들은 선배들에게 불려나가 알몸으로 기합을 받으며 졸업을 ‘축하’받았다. 홧김에 학생의 뺨을 때린 교사에게 학생이 발끈하여 배와 허벅지를 마구 공격하였다. ‘남자와 함부로 잔다’고 놀린 친구를 감금하고 폭행하여 숨지게 한 다음 그 시신을 한강에 버리는 일도 발생했다. 이 정도면 약하고 힘없는 친구에게 빵이나 운동복 배달을 시키는 ‘빵셔틀’같은 것은 애교에 속한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평소에 열렬하게 청소년의 인권을 옹호하던 친구조차 얼굴을 돌렸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대세는 강경한 일벌백계다. 그래도 철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 아니냐고 한마디 보태다가는 “요즘 청소년들은 이미 알 것 다 알고 하는 ‘인지범’들인데 무슨 사회와 교육 탓이냐”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요즘 청소년’들은 보수와 진보를 가르지 않고 공격받고 있다.


이들은 학교폭력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 중의 한 명이 학교폭력의 희생자였다. 당시 학급마다 한 명씩은 꼭 있던 깡패나 다름없던 급우에게 대들었다가 머리에 쓰레기통을 씌운 채 피범벅이 되도록 얻어터졌다. 그 친구는 며칠 후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나타났다. 하지만 혼자서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고 히죽히죽 웃고 다녔다.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정신에 이상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나만 이런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 <말죽거리잔혹사>만 보더라도 학교에서의 폭력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게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계도 엉망이다. 어떤 조사에 의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의 학교폭력은 하향안정세를 취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갑자기 400% 이상 급증하기도 한다.


두 번째로 이들은 학교폭력이 통계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청소년들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점점 더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애완동물을 괴롭히는 것 등을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동영상을 찍고 그것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을 예로 든다. 아마 과거에도 카메라가 있었으면 이것보다 더한 장면들도 많이 올라왔을 것이다. 시골에서 자란 나의 경험만 예를 들어보더라도 내가 심심풀이 삼아 죽인 개구리가 수 천 마리는 될 것이다. 어린 시절 나 또한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개구리를 잡아 돌로 쳐 죽이기도 하고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이기도 하고 철로 위에 올려놓아 죽이기도 하였다. 요새 유행하는 말대로 하면 나와 내 친구들 모두는 사이코패스들이다. 그 당시 우리는 그것이 재미있다고만 생각했지 개구리가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이전에도 그랬으니 그럼 괜찮다는 말이냐?’고 흥분한다. 전혀 괜찮지 않다.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학교폭력이 이슈화되는 방식에서 너무나 수상한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폭력의 문제를 그저 ‘폭력’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폭력을 다루는 언론들은 이 문제는 ‘형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도덕 혹은 인륜’의 문제로 가져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인륜의 문제로 가져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길가다가 취한 취객의 호주머니를 터는 낯선 사람의 범죄를 도덕적 범죄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절도일 뿐이다. 그러나 부모의 호주머니를 터는 것은 도덕의 문제가 된다. 그것은 단순하게 절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야하는 부모-자식이라는 관계를 훼손시키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어린이나 노약자를 잔인하게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것도 단순한 형사의 문제가 아니라 인륜의 문제로 취급한다. 인간성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기 때문이다.


범죄를 도덕과 인륜의 문제로 취급한다는 것은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유지되어야만 하는 관계를 단절시키거나 혹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하는 인간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학교폭력은 왜 도덕적이고 인륜적인 문제로 여겨지는가? 학교 안에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친구관계라고 하는 도덕적 관계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맺어지는 관계를 미리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도덕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친구를 때리는 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친구라는 인간이 지켜야 하는 관계와 우정이라는 인륜적 가치에 대한 훼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일반적인 폭력이나 형사사건과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사에 대한 폭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는 이데올로기와 상관없이 이런 진단에 대해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비분강개가 절대 묻지 않는 것이 있다. 정말로 학교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우정에 기반을 둔 친구관계인가? 학교에서 우정이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것이며 폭력적이고 위계적인 인간관계가 예외적인 것인가? 조금만 돌아보더라도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이 우정의 공간이기는커녕 엄청나게 권력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집이 잘살고 못살고, 힘이 세고 약하고에 따라 학교와 교실은 촘촘하게 위계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정’은 그 권력의 벽을 넘지 못한다. 우정이 아니라 권력의 공간으로 바라볼 때 과거와 현재의 학교폭력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 과거에 학교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그 폭력으로부터 면제되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현재에는 또 어떤 아이들이 폭력을 휘두르고, 희생자가 되고 또 그 폭력에서 면제가 되고 있는가?


1970년대 일본에서 어린이들을 사로잡았던 <도라에몽>과 네이버 웹툰에 연재되었던 <3단합체 김창남>과 같은 학교폭력에 대한 만화를 비교해보면 그 권력관계를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도라에몽>도 교실폭력에 대한 만화이다. ‘비실이’라고 하는 힘은 없지만 돈이 많은 집 아이와 ‘퉁퉁이’라고 하는 공부 못하지만 힘만 좋은 친구가 연합하여 ‘진구’라는 공부도 못하고 힘도 없는 아이를 괴롭힌다. 사실 이 만화에 등장하는 도라에몽의 발명품이나 도구들은 대부분 매일 학교에서 얻어터지는 아이들이 자기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런 것들이다. 재밌는 것은 이 만화에 등장하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다. 이들은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며 가끔씩 ‘정의의 편’에서 때리는 아이와 맞는 아이 사이를 중재한다. 그리고 이 ‘공부 잘하는 아이’의 중재에 양쪽 모두 권위를 승인한다.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공부 잘하는 아이를 건드리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3단합체 김창남>과 같은 만화에 등장하는 오늘날의 권력관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중재자도 아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이야말로 힘이 센 아이들과 잘 사는 아이들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 반에서 가장 덜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는 못살고 공부 못하고 못생기고, 무엇보다 덜떨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교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급격한 변화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폭력은 정당화된다. 무엇보다 학교 안에서 권력자의 삼위일체가 말하는 것은 학교폭력은 우정에 대한 도덕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문화/육체 자본의 삼단합체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이것이 ‘덜떨어진 존재’에 대한 폭력이라는 문화적 양상만이 전면에 부각될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학교라는 공간도 계급에 의해 권력화된 공간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현재의 학교폭력이 화장실 뒤편이라는 감추어진 공간이 아니라 거의 라이브로 인터넷에 중계된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과거의 폭력과 현재의 폭력 사이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다. 폭력이 가장 공포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힘이 센 아이들이 언제든지 화장실 뒤편으로 나를 불러낼 지도 모른다는 것이 가장 큰 공포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폭력마저 구경거리가 되는 순간에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폭력이 아니라 보이기 위한 폭력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모든 것을 구경거리로 만들라고 강요하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맛있는 것도 사진으로 찍어 남에게 보이기 위해 먹고 여행도 즐기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미니홈피를 통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한다. 폭력 또한 이 거대한 구경거리의 사회에 포획되어져 있다. 우리는 이미 동물원에 갇힌 존재이다.


청소년 폭력의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계급과 모든 것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동물원이 된 사회라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감춘다. 사실 이것은 서구에서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사회가 보수화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를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연결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그랬다. 1970년대 말에 대처주의가 대중적 공감을 얻고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청소년들의 일탈행위에 대한 좌파의 정책적 무능을 틈탄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학교가 폭력과 마약의 통제 불가능한 무정부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법과 도덕의 질서를 강력하게 세워야 한다고 보수적 미디어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어 그들은 청소년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신 나간 좌파들이 무분별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학교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궁극적으로 국가를 위기로 빠뜨렸다고 비난하였다. 공격의 처음 대상은 청소년이었지만 애초부터 대처주의의 목표는 교원노조와 진보 전체였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진보의 가치 자체였다. 그 결과 영국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였다.


30년이 지났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진보는 이 사태에 대해 영국의 무능했던 진보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소위 진보적인 매체라는 곳을 살펴보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고 학교와 가정에서는 어떤 존재들이고 이들의 또래집단은 어떻게 조폭처럼 되었는지를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듣고 분석하는 작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폭력에 대한 감수성과 인성교육의 붕괴에 대한 하나마나한 개탄을 단순 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보수주의가 노리는 것이다. 무능한 진보를 등에 업고 모두가 ‘요즘 청소년’들을 걱정하게 하여 도덕에 대한 위기의식과 규율에 대한 공감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다음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이들을 버렸다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으로 전교조와 공교육의 무능을 집중적으로 지목하여 파상적인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결과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수월성 교육의 강화이다. 성공적 학생 관리를 명목으로 특혜를 받고 있는 학교에는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있던 지원을 줄이고 더 많은 제재와 처벌이 주어질 것이다. 교사는 무능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아이들은 사회의 보호와 권리 바깥으로 내팽개칠 것이다. 이렇게 무법지대로 추방된 아이들은 도덕의 이름으로 영구히 쓰레기 취급을 받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이다. 짐작이 아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 보수주의의 도덕과 규율의 정치에 수수방관하거나 놀아나고 있다. 단언하건데 위기에 빠진 것은 청소년의 도덕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진보의 정치적 역량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엄기호 |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