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 없음’과 사회권

2010 제주인권회의

1. 들어가며



‘복지국가’는 시장(지배력)의 역할을 조절하기 위해 조직된 권력이 (정치와 행정을 통해) 최소한 세 가지 방향으로 신중하게 사용되는 국가이다. 첫째, 개인들과 가족들에게 그들의 노동이나 재산의 시장 가치에 상관없이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한다. 둘째, 그렇지 않을 경우(즉 방치했을 경우) 개인과 가족들의 위험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우연성’(예를 들면, 질병, 노령, 혹은 실업)을 최소화한다. 셋째, 지위나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에게 합의된 사회적 서비스의 범위에 따른 이용 가능한 최선 수준의 제공을 보장한다. (Briggs, 1961:288)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복지국가는 인간의 전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 불안, 취약한 상황을 국가의 재분배 시스템을 통해 줄여나가거나 최소화하는 국가이다. 복지국가의 이상을 완벽하게 달성한 국가는 없지만 민주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많은 국가들은 시민사회의 성장 여부에 따라 국가 책임의 ‘범위’를 조정하며 현실화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사회권은 복지국가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집단적으로 추구하는 민주주의 인권의 한 형태이다. 이는 ‘노동의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노동조건의 권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사회보장권, 가정에 대한 지원과 보호,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주거권, 식량권), 건강권, 교육권, 무상의무초등교육의 권리, 문화권, 과학권’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최근 30년간 세계 경제를 주도해왔던 신자유주의는 시장주도의 정치 경제적 질서를 만들며 모든 인간을 ‘노동자’나 ‘생활인’의 위치에서 ‘소비자’나 ‘투자자’의 위치로 바꿔나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생존과 좋은 삶을 위협하는 실업, 빈곤, 각종 위험에 대처하는 사회적 안전망을 포기하거나 시장에 맡김으로써 ‘사회’의 의미를 삭제해 버리는 독특한 형태의 자본주의다. 다양한 국가들이 다양한 버전의 신자유주의적 기획을 채택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질서에 담긴 세계관이 신자유주의라는 점은 공통적이다. 즉 이익이 나는 부분에만 투자한다는 신자유주의적 논리가 전 사회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공동적 삶’이나 ‘비시장적 가치’를 약화시키고 자본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철폐하며 노동을 유연화시켜 낸다는 것이다.


본 발표문은 지난 30년간 세계 경제를 주도해 왔던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가 국가의 위치를 어떻게 변화시키면서 복지국가의 이상을 후퇴시키고 있는지를 분석하려는 시도이다. 사회권을 ‘국가의무에 기초한 접근(state-obligation)’으로 바라보고자 할 때, 신자유주의 기획 하에 있는 국가의 성격 변화를 인식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적 연대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왜냐하면 국가의 사회적 기능은 후퇴하고 문화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강화되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사회권’은 가장 정치적이고 시급한 의제가 되고 있고, 확보하기 힘든 인권의 영역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2. 신자유주의적 기획과 ‘국가 없음’의 상황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1년 의회 연설에서 “부유층에 대한 거대한 세금감면을 통해 투자자들이 설비와 사업 확장에 돈을 투여할 것이며, 그에 따라 고용이 창출되고 결국 이러한 효과가 노동계급에게 이익(trickle down)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국가 발전의 주도적인 세력을 부유층으로 상상하는 신자유주의 기획은 이명박 정부의 집권 이후 ‘부자 감세’나 ‘기업인 우대’, ‘민주적 시민사회 억압’이라는 강력한 기획을 통해 더욱 현실화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논리와 ‘강력한’ 집권자에 의존하는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결합된 현재의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는 겉으로 보기에는 ‘책임 있는’ 국가를 표방하지만 국가의 역할이나 지향점은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좌편향’이란 문화적 레토릭을 통해 근원을 알 수 없는 구시대적 편 가르기를 강화하면서 시민사회의 ‘문화적 피로감’을 누적시키거나 정치적 표현이나 시위에 대한 ‘소송’이 급증하면서 ‘표현의 공포’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전시체제를 방불케 하는 군사작전들을 통해 경제적 주변자들을 몰아내고 억압하는 물리적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통치 체제는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투쟁하여 만들어 낸 탈냉전, 민주주의, 인권, 시민 사회의 공동체적 아젠다를 위협하면서 우리의 일상을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물리적, 경제적, 문화적, 상징적 폭력들 앞에서 사회권의 확장을 상상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자유권의 위축은 사회권을 공공적 아젠다로 발화하는 것조차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국가가 휘두르는 공포 조성 전술이 활발하면 정치적으로 혼돈스럽거나 위축된 개인들이 많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 사회권은 공공적 이익을 함께 만들어낸다는 신념을 가진 민주적이고 소통적인 개인의 자발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시대적 맥락은 매우 위협적인 환경이 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라 불리는 이러한 새로운 통치 질서 하에서 국가의 성격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197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부와 정치적 자유를 효과적으로 연결시켜왔다.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신자유주의가 대중적 동의를 얻게 된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슬로건이 관료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개인들에게 매력적인 언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의 문화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개인이 가지는 선택의 자유, 정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추구할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역사상의 다른 어떤 시기보다 ‘개인’의 자유를 역설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문화이데올로기가 호명하는 개인은 보편적인 휴머니즘에 근거하여 ‘인격’을 가지는 개인이 아니라, 사유재산을 가지고 시장경제에서 적극적인 행위자로 활동하는 개인이다.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많은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이를 지키고 증대하고자 하는 경제엘리트와 자산가들의 권력을 확장시켜왔다. 이를 위해 신자유주의는 시장논리의 결과적 불평등을 줄이려는 복지국가의 간섭에 제동을 걸고 ‘작은 국가’를 역설해왔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주장하는 ‘경쟁적 자본주의’는 자유의 확장이 시장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개인의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경제적 자유를 얻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지불능력이 없는 자는 ‘정치적’ 자유를 가질 수 없다는 역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엄기호가 “포위, 점거, 파괴라는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행정이 국방화된 것” 같다고 묘사한 용산참사 사건이 벌어졌던 동일한 시간에, 이명박 정부는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건설, 에너지, 무역 등의 분야에 대해 유럽과 우즈벡, 카자흐스탄 국가들과 경제협정을 맺었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의 와중에도 한국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정말 ‘잘 나가는’ 나라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주요8개국(G8) 확대 정상회의와 아프리카 순방 중에 ‘왜 한국처럼 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어찌 보면 한국사회의 경제침체와 민생문제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한국이라는 국가 내부에는 ‘국민’이라는 동일한 범주로 묶어 낼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FTA처럼 국가 엘리트들 간에 맺어지는 협정이 어떤 이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의 위기로 다가오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대박 신화를 낳는 희망의 징조이다. 2009년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한, 용산참사에 대한 무응답과 적극적인 자원외교라는 두 사건은 국가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국가가 특정 국민이 가져야 할 삶의 권리를 경제 활성화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앞세워 박탈하거나, 특정 국민의 요구에 귀 기울이지 않고 혹은 아예 말을 걸지 않는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급변하는 ‘국가’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정치는 “개인주의, 선택, 시장사회, 자유방임, 경제에 대한 최소한의 정부개입”과 “비경제적인 영역에서 강력한 정부, 사회적 권위주의, 훈육된 사회, 위계와 복종, 민족의 예찬” 등의 요소들을 조합하여 도출된다. 국가 기능의 많은 부분이 민영화를 통해 기업으로 이전되어 국민의 대다수를 소비자로 변화시킨 상황에서 국가의 정당성과 통치성은 사회적 퍼포먼스나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리차드 세넷(Richard Sennett)은 미국 신경제 아래 국가의 성격을 ‘컨설팅 국가’로 명명한다. 국가도 기업의 컨설턴트처럼 ‘사람들의 구체적 경험에는 관심이 없고, 개혁이나 변화란 이름으로 통제는 강화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자”처럼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더 이상 사람들의 삶의 위기를 공공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복지정책이나 긴급구조에는 관심이 없고, 마치 기업처럼 “여기저기 집적거릴 뿐 한 가지에 몰두하지 않는” 성격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가 엘리트는 지난날의 부재지주처럼 권력을 갖되 대중의 삶에 예속되지 않는 글로벌 엘리트의 태도를 취함으로써 노동, 실업, 복지 등과 같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회피하기 일쑤다. 그들은 오히려 보여주기 식 정책에 기대어 국가 이미지와 브랜드를 높이는 작업을 통해 마치 국가의 글로벌 위상이 높아지게 보이는 기업의 홍보 전략처럼 국가를 운영한다는 비판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이명박 정부는 신 글로벌 외교를 주창하며 한국의 ‘국격’을 높여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여 기존의 3배가 넘는 경제 지원금을 약속했고 UN을 도와 세계 분쟁지역에 군대를 파견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같은 시간 한국 정부는 유엔 경제·사회·문화 권리위원회가 이주자의 노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주노동자정책을 신중하게 재검토해 달라는 권고안을 ‘한국 상황을 잘 모르는 처사’라며 반박했다. 한국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G20 회의의 안전을 위해, 테러리즘을 막기 위해 2만 명 이상의 미등록 이주자가 강제 추방되는 상황이나 청년 실업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채, 글로벌 책무, 그린 테크놀로지, 글로벌 환경 문제, 세계 평화 등에 기여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선언은 일종의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이런 사회적 퍼포먼스는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데는 기여할지 모르나, 정작 자국 영토 안에서 벌어지는 복잡하고 시급한 구조적 문제들을 회피하고, ‘미끄러지는 기술’을 통해 사회적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반 이주자 정서를 확장시킴으로써 동질성의 신화를 강화하고, 이주자를 외부의 희생양으로 삼는 폭력을 발휘하고 있다.


버틀러(J. Butler)와 스피박(G. Spivak)의 대담에서 개념화된 ‘국가 없음’의 의미를 떠올려보자. 자유시장주의에 입각한 전 지구적 ‘관리국가’는 국민국가 내의 재분배, 복지, 그리고 헌법주의에는 관여하지 않고 전 지구적 자본의 유통을 위한 관리자 역할만을 수행하려고 한다. 이는 국민국가 내에서 국가가 국가의 기능을 하지 않는 ‘국가 없음’의 상태를 만든다. ‘국가 없음’이란 민족이나 국민 같은 호명에 의존하면서 특정 주체들은 국가에 적법한 주체로 엮지만, 사회 주변부나 이주자처럼 다른 주체들은 적극적인 권력의 행사를 통해 국가 밖으로 내치고 추방하여 권리를 박탈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국가 없음’은 국가가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재분배와 복지 기능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이라는 호명을 받은 주체들마저도 ‘국가 없음’의 상황을 경험하게 되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국민 중 일부분이 국가 내의 협상을 위한 파트너가 아니라 비가시화된 ‘잉여적 존재들’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국가 하에서는 국민들 내부 안에 배제의 공간이 확장되고 그로부터 ‘찬탈’을 위한 폭력이 활성화된다. 이런 점에서 재력의 여부에 따라 국민을 분리하여 위계적으로 범주화하고 그에 맞게 정치적 자유의 허용 범위를 결정하는 금권정치가 부활하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죽임’을 당한 도시 철거민들에게 행사되는 국가폭력은 ‘국가 없음’의 상황을 잘 보여준 예이다. 한국 내에서 잉여적 존재들로 규정된 도시 빈민, 노동자, 성노동자들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몰아내고, 이들의 삶의 역사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신중산층의 소비 및 주거지가 무심하게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는 지불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겐 ‘투기’를 통한 부자 되기의 탐욕을 거래하며 “국가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배제된 자들에 대한 정책은 더 많은 국가의 간섭, 개입, 감시를 요구하고 이는 곧 신보수주의 혹은 권위주의와 연결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현시킨 미국과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신자유주의는 신우파와 보수주의 문화 담론과 연관을 맺으며 서로를 강화시킨다. 레슬리 호가트가 분석한 것처럼 신자유주의와 신우파는 복지정책과 사회보장 지출로 발생된 의존적 문화(dependency culture)를 공격하며, 도덕적 타락이 경제적 퇴보의 원인이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전통적인 핵가족을 방어하며, 국가가 아닌 가족이 더 많은 책임,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와 신우파는 ‘반페미니즘’을 표방하며 싱글맘을 ‘복지도둑’이라 매도하고, ‘여성을 양육을 전담하는 어머니로만 규정하는’ 등 반 성평등적 입장에서 낙태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학자금 대여를 확장하는 것이나 무상급식과 낙태를 반대하는 흐름은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국가가 시장에 많은 것을 양도한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기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하는 방법은 국가가 가진 문화적 이데올로기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가는 신자유주의 시대 개인이 가진 경제적 불안이나 사회적 지위 하락에 대한 공포 등의 상태에 있는 국민들의 삶에 장기적인 안목과 기획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이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자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바우먼은 신자유주의 기획 하에서 안전과 안보의 개념이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국내 출신 하층계급과 불법이민자들을 잠재적인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동시에 국가는 선량한 국민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노라는 약속을 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해나간다. 국가가 복지 정책에서 후퇴할수록 안전과 안보에 대한 문화적 논리는 강화된다. 천안함 사태를 통해 강화되는 안보 논리 또한 이런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강력한 권위주의와 친화력을 갖는다. 1997년 IMF이후 한국정부는 기업형 행위자로 부상하여 규제철폐, 민영화, 일상의 금융화를 주도해왔다. 옹이 지적한 것처럼 동아시아의 신자유주의 개혁은 강력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국가의 통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또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와 강력히 결합하여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 정부는 최근 ‘서민’을 정치의 대상으로 환기시키며 ‘서민정치’를 앞세우고 있다.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으로 대표되는 실제 서민들의 생존권에는 무심한 정부가 서민을 살리고, 서민형 생계 범죄자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마련하고, 서민의 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획기적인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제안하고 있는 점이 그 예이다.


한국이라는 국가는 이러한 점에서 여전히 ‘부권적 권위주의’의 성격을 지닌다. 즉 개인화된 자유를 낭만화하고 작은 국가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모델과는 달리, 강하고 보호주의적인 국가를 상정하려고 한다. 통치자는 항상 ‘서민’을 걱정하고, ‘서민’을 먹여 살리는 문제를 고민하는 가부장의 모습으로 자신을 재현한다. 이에 내재한 성별 이데올로기는 대통령을 생계부양자로 설정하고, 대통령의 ‘능력’ 여하에 따라 집안 경제가 일어나듯 국가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 전근대적 믿음 체계를 결합한다. 이 모델은 서민이라 불리는 지배 대상이 실제로 경험하는 실존적 위기들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든 국민을 ‘서민’이라는 동일한 범주로 종속시켜 낮은 수준의 사회적 서비스를 공급하고자 한다. 또한 부권적인 성격으로 인해 시민을 ‘서민’이라는 비-정치화된 범주로 규정하고 시혜적인 방식으로 호명한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담지자인 ‘시민’이 아니라 서민으로 호명된 자들은 이로써 무력하고 수동적인 서비스 수혜자로 동질화되고 있다.


시민들이 획득해야 할 노동권, 주거권, 사회권 등의 ‘권리’를 낮은 수준의 서비스로 대치시킴으로써 국가의 재정은 지불능력 있는 개인들의 부의 축적을 용이하게 하는데 쓰이고 있다. 낮은 수준의 ‘서민용’ 서비스는 ‘퇴출의 공포와 추락’에 시달리는 불완전고용이나 반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지 못한다. 또한 ‘서민’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적 표현을 하는 순간에 이들은 곧 ‘서민’이 아닌 불순하고 불법적인 대상으로 간주되어 버린다. 이러한 통치체제는 1970년대의 유교적 부권주의의 문화적 모델과 신자유주의적 모델을 결합시켜, 시민들의 적극적인 생존권에 대한 물적 보장은 제공하지 않은 채 이들을 단지 온정주의적 대상으로 남겨두고 있다. 국가의 영토 구분이 희미해지는 글로벌 경제 체제 하에서 자국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 민족주의와 민족 담론이 강화되고 있는 것 또한 신자유주의에서 일어나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국가없음’의 상황은 국가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 연결되기 보다는 전통적 공동체로의 회귀를 조장한다. 국가는 ‘안보’개념이나 반 이민자 정서의 조장을 통해 내부를 단결시키며 국가 정당성을 획득한다.



3. 신자유주의 기획과 민주적 시민사회의 위치


신자유주의 정책은 시장을 강조하고,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보다 우위에 있다는 교의이다. 신자유주의 철학에서의 자유란 ‘국가나 사회, 타자로부터 강제나 간섭이 없는 상태’에 대한 자산가의 열망을 반영한다. 무엇보다 경제 주체를 사유하는 방식에 있어 ‘개인 대 국가’의 이분법을 강조함으로써 그 사이를 이어주는 정치경제적 주체로서의 시민사회의 역할과 가능성을 누락시키는 논리다. 사회권은 ‘집단적’이며 ‘공동적’으로 확보될 권리이므로, 타협과 연대라는 방법론을 기반으로 구축되는 권리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문화 논리가 일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적 시민사회의 확장을 통한 사회권의 확장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불확실성과 불안을 제거 또는 억제하면서 발전해왔고, 이런 점에서 사회권의 확보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공공의 권리이다. 신자유주의적 기획은 과거의 집합적 성과물을 무효화하고 공공재를 민영화하여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수비르 신하는 신자유주의는 표면상으로는 국가를 후퇴시키고 그 기능들을 시장에 재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만 시민사회를 ‘개조’하는데 있어서도 새로운 통치 기술을 발휘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자유주의적 정부나 글로벌 사회가 시민사회를 개조하는 과정은 한편으로 시민사회를 NGO와 동일시하고 이들에게 막대한 발전기금을 지출하고 정책을 입안하거나 이행하는데 있어서 이들을 합류시키는 ‘포함’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대적인 시민사회의 형태들을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 행위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선언하는 것이다. 현 정부 하에서 보수주의 집단들이 NGO로 등록하여 사단법인화하는 현상 또한 신자유주의적 기획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사적 재산으로부터 이득을 얻을 권리 등을 강화하는 ‘이해 당사자’나 ‘사용자 그룹’이라는 탈정치화된 집합체를 확장시킴으로써 공동의 책무 개념을 삭제한다. 돈에 대한 거리낌 없는 욕망이 공공연히 표출되고 사회 구성원이 ‘투자자’로 자신을 인식하며 재테크의 기술을 학습하기 위해 시장에 뛰어드는 상황에서 즉각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회 운동의 비전을 갖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IMF 이후 복지제도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개인들 스스로가 메워야 하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개인은 불예측적인 미래를 위해 금융 소비자로 편입되면서 개별적 생존 전략에 익숙해지고 있다.


동시에 촛불 정치나 지방 선거를 통해 국가의 정치 엘리트들을 지역의 차원으로 끌어내려 내부 위기를 관리하는 데 헌신하게 하고, 지역민의 삶의 위기를 해결하도록 하는 시민들의 정치적 행동이 발휘된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성공 시대’라는 구호를 가지고 등장했다. 국민들의 ‘경제적’ 기대는 컸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자리 잡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질서 하에서 많은 이들은 고용될 능력과 지불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무력화되고 있다. 동시에 ‘서민’으로 호명되어 지도자의 온정을 기다리는 비정치적인 주체로 규정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수호해온 많은 시민들의 정치적 반감 또한 증폭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불안정성과 피폐함과 싸우기 위해 위계화되고 범주화된 인간의 삶들 사이에서 ‘공감’ 능력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권 논의를 의제화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개인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상력을 갖는 것은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구상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하다. “생존 가능한 삶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하는” 정치적 행위로서 사회권은 세넷의 지적처럼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죽어버린 시대의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적하는 유일한 길이다. 소수에게만 집중되는 부의 확장은 ‘경제 발전’이 아니다. 경제는 인간의 삶에 유용한 자원의 이용과 재분배를 가능하게 할 때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삶의 질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식량, 물, 주거, 교육, 건강 등의 생존 조건이 ‘시장’의 외부에, 공공재로 보장되어야 한다. 시장이 사람들의 삶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가치 전환을 위한 탐색이 필요한 시대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2010년 8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렸던 제주인권회의 첫날 라운드 테이블 ‘왜, 지금, 사회권인가’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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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미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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