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인권위의 타락과 남겨진 숙제

양날의 인권전선-공권력 감시와 시민사회의 내면화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군사독재 등 권위주의 체제를 겪었다. 이 경험은 사회 곳곳에 전근대적인 비민주성과 비이성적인 폭력성, 야만의 인권유린, 강압과 획일적 병영문화를 일상화, 구조화시켰다. 이런 까닭에 오늘에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의 사회적 내면화 과정이 그만큼 지체되고 있다. 비록 1980년 광주항쟁과 1987년 6월 항쟁으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시민적 요청이 제한적이긴 하나 시민참여의 정치공간을 넓혔고 그와 함께 헌정사상 초유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한 때 빛을 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현재 사회 곳곳에서 재현되고 있는 온갖 퇴나행적인 모습들을 보면 아직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로 자리 잡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의 파경도 본질적으로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미성숙한 인권운동 역량의 반사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퇴행적인 이명박 정권이나, ‘조중동’ 등 일부 정치언론, 개념 없는 인권위원장 따위에게 책임을 묻고 이들을 패퇴시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호락호락 사태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자신의 기본적 책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사회적 내면화를 제일의 사명으로 삼는 한 국가인권기구를 둘러싼 외부환경은 언제나 적대적이기 마련이다.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관행까지도 뜯어 고치자는데 기득권 입장에서 ‘예뻐라’할 까닭이 없다. 이 점은 국가인권기구의 숙명적 딜레마이기도 하다. 당대의 제도와 법이 다중의 동의에 의한 사회적 합의라고 한다면, 제도와 법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때때로 다중의 뜻, 또는 사회적 합의와의 충돌이나 갈등을 불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인권기구는 한 걸음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진보적이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인 것이다. 또 비주류의 헤게모니가 확장되는 것을 주류는 자신들의 이해에 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주류와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렇듯 국가인권기구의 숙명적 자기 딜레마는 기존 제도 안에서 기존 제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고, 국가 안에서 국가 밖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애쓰며, 비주류를 주류화 하려는 본연의 기능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국가인권기구는 이중전선을 동시에 감당하여야 한다. 국가공권력에 대한 대응이 제1전선이라면, 사회 곳곳에 뿌리박은 관행이나 관습과의 대치가 제2전선이 되는 것이다. 현실의 살아 있는 국가권력을 상대하기만도 간단치 않은 일인데, 여기에 권력이 조장하고 이식한 시민사회의 악습, 폐습과의 씨름까지도 짊어진 셈이니 국가인권위원회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양상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곤경을 돌파해내기 위해 국가인권기구는 태생적으로 인권시민사회와의 협치를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한다.


국가인권위원회 위기 극복을 위한 방법론


사실상 파산지경에 이른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어떻게든 회생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실로 눈물겹게 전개되고 있다. 상임위원과 자문, 전문위원 등 안팎의 관계자들의 줄사퇴와 인권상 수상 거부, 점거와 농성, 촛불시위와 집회 등이 잇따르며 이명박 정부의 반인권정책을 성토하고 현병철 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이명박의 시대와 현병철 체제의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역사 가운데 반드시 오욕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헌신적이고 값진 노력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이제야말로 보다 근본적인 통찰과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글은 반인권적인 이명박 정부와 그의 꼭두각시 현병철로 야기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황요인으로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는 한 상시적으로 부딪힐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든 국가권력은, 그리고 주류사회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편을 드는 인권기구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인을 상수로 놓고 보면 결국 남는 문제는 주체역량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의 목적은 일단 상황요인을 괄호로 묶고 그 이면에 드리워진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극복을 위한 내재적(주체적) 요인을 찾아 올바른 실천전략을 강구(여기에는 전면 퇴각을 배제하지 않는다)하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상황요인에 대한 대응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범주의 한계를 먼저 밝히려는 것이다.


거칠기는 하지만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략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인권시민사회의 주체역량의 측면에서 과연 이제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상화는 가능이나 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어떤 방안이 있는가. 또 어떤 방법이 바람직한가. 이 근본적인 되물음에 대략 세 개의 시각이 제시될 수 있다.


첫 번째,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지금의 인권위는 버려야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의 파국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공간은 지극히 협소하며, 자유주의에조차 이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인권의 가치는 본래 자유주의와 함께 탄생하여 그 상상력이 확장되어왔는데, 우리에게는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할 이념적, 사회 구성적 토대 자체가 부실하다. 오늘날 만성적이고 가속화되는 양극화구조 속에 합리적 중간계층이 참여하고 형성하는 정치공간이 절대적으로 협애할 뿐만 아니라, 이마저도 갈수록 허약해지고 있는 형편을 고려하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존립여건은 매우 취약하다. 게다가 자산계급의 정직성에 기반을 둔 건강한 계급의식마저도, 만연한 전근대적인 독점과 부패, 권력유착의 구조 속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런 가운데서는 자유주의조차 발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전근대성이 광범위하게 온전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서구에서 온건보수로 분류되는 자유주의조차 우리에게는 진보적 이념으로 둔갑된다. 진보정당의 입지와 정당정치구조가 취약한 것도, 그리고 자유권에 중점을 둔 채 사회권 확장에는 괄목할 만한 성과와 기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마치 진보, 심지어 좌파의 화신인 양 비춰지고 있는 현실도 모두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다. 우리에게 애초부터 국가인권위원회는 과잉 평가된 시민사회를 토대로 위로부터 ‘하사’된 불안한 민주적 리더십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시민사회의 요구와 지향을 담아 그 반걸음 뒤에서 인권의 제도화라는 안정적인 자기전개를 펼칠 여유가 허락되지 않은 채 때때로 인권 진영의 전위로서 선도적 이슈파이팅을 요구받았던 상황도 따지고 보면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허약함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오늘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위기이며, 더 추상적으로 보자면 우리 사회 자유주의 진영이 처한 현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인권위원회의 정상화를 위한 전제로서 시민사회의 성장 또는 내실화가 먼저 요구된다.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전근대성을 극복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활동공간을 더 확장하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시민사회의 주도로, 주류화 되는 가운데 비로소 국가인권기구와 같은 거버넌스의 자리가 마련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토대가 굳건할 때 국가인권기구와 같은 제도권 내의 거버넌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토대가 부실한 제도권 내 기구는 잘 해야 거품이거나, 필경 관료화되기 마련이다.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 위기는 직접적으로는 이명박과 현병철로부터 기인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부실한 토대를 놔둔 채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만 정상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제도적으로 보완된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를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동안의 거품이 빠지면서 급격한 관료화의 국면으로 접어 든 셈이다. 인권시민사회라는 자기토대도 부실하고, 사회구성적 이해기반도 허약하며, 스스로 자기부정의 치부를 드러내는데 망설임이 없는 상태인 국가인권위원회가 더 이상 누굴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여야 하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비전과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과거 ‘영광스런 태생의 족보(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설립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포함하여 무려 7년여에 걸친 인권시민사회 운동의 산물로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닌가)’가 오늘의 치명적 흠결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국가인권위원회의 파국은, 어느 한 제도기구의 명멸 차원을 넘어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대중적 신뢰성과 헤게모니의 위기로 번지지 않도록 이즈음에서 그 애증의 고리를 과감히 끊어야 한다.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물론, 지각 있는 인권위원들을 포함한 내부구성원들은 전술공간으로서 의미 외에 국가인권위원회를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는 미련을 과감히 떨쳐 버리는 결단이 필요하다. 더 이상 국가인권위원회로 인해 인권의 표상이 조롱되고 희화되는 사태를 막고 인권시민사회의 권위와 신뢰에까지 도전이 확산되는 상황을 불식시켜야 한다.


두 번째, 알리바이기구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본래 정치상황이라는 변수에 취약한 기구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정권교체나 정변 등에 의해 종종 국가인권기구는 부침(浮沈)을 겪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선진국에서나 후진국에서나 그 양상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호주에서 집권당이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교체되었을 때를 보라. 인권기구는 운명적으로 ‘경계인(境界人)’이다. 인권기구의 독립성이 강화될수록 그 경계성이 강화되는 것은 숙명적 자기 딜레마이다. 제도권과 비제도권, 정부와 비정부, 국내와 국제, 진보와 보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에 위치한다. 경계인의 운명이 그렇듯 누구 하나 지지하고 응원하는 세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전변수가 상존하기 때문에 그만큼 스스로 유연하고 긴 호흡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가인권위원회가 겪는 도전은 사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온실 속의 화초처럼 커온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국가인권기구의 운명치고는 비정상이라고 할 만큼 편안한 길을 걸어왔다. 당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 지금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여부에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연연할 필요는 없다. 국가인권기구의 존재 자체가 갖는 의미가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알리바이 인권기구라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더구나 명분상 인권보호와 신장을 본래 사명으로 하고 있는 국가기구의 속성에 의해 그 정도와 내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권업무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하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은가. 따라서 부침이 있다 해도 기존 국가인권기구의 존재를 수호하고, 그 활동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가 어찌됐든 우리 인권시민사회(운동)의 귀중한 자산임을 인정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돌이켜볼 때 우리 현대 헌정사는 군사독재와 민주주의의의 나선형적인 발전을 이뤄왔다. 민주정부 10년의 역사를 부정하고 이명박 정권의 출범에 지지를 보낸 다중의 선택을 상기해보라. 국가인권위원회의 오늘의 치욕 역시 국가인권위원회의 큰 역사를 구성하는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속에서라도 할 일을 찾고, 그것이 인권의 가치에 역진하지 않는 내용인 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고 임하도록 유인하여야 한다.


세 번째, 인권위 밖에 진지를 구축해야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성취와 가치가 앞서고 배타적인 사적 욕망을 드러내는 데 부끄럼이 없는 이 시대에 공공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은 영광이기 이전에 천형(天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의 소명으로 여겨 충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우리의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 볼 수 있다. 비단 국가기구로서의 국가인권위원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시민사회에 종사하는 많은 전문가, 활동가 역시 그런 의미에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러한 존중은 공공영역이 요구하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때 비로소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존재 자체로서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최소한 ‘밥벌이의 숭고함’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적 영역에 국한된 것이지, 공공영역에서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조직이든, 부여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자기(또는 자리)보존에 급급해한다면 이미 그 존재근거가 소멸되고 만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오늘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인권의제들에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 부여된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외부요인으로서 인권이라는 가치에 대해 도대체 개념 없는 이명박 정권과 그 청부업자 역을 자처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현 위원장을 비롯한 일군의 인권위원 등 지도부 탓일 수 있으나, 그 못지않게 내부요인, 즉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총체적 전략부재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내재적 요인이다. 오늘의 위기를 초래한 내재적 요인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데 있어서 문제영역을 단지 국가인권위원회라는 단위에 국한하지 말고 인권시민사회 진영 차원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국가인권위원회의 위기극복은 인권시민사회 진영의 역량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하고, 자력적인 실천을 도모하는 가운데 찾을 수 있다. 눈앞의 전투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구덩이를 파서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애드버커시(advocacy 생각, 노선, 신념 등에 대한 공개적 지지 또는 변호)로서의 역할을 찾자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버리고 가자는 것이 아니라, 또한 국가인권위원회가 형해화 되어가는 국면에서 무기력하게 그저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인권위원회의 내부구성원을 포함한 인권시민사회 진영 내부의 효율적인 전략배치를 새로이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추락은 이미 밑바닥까지 다다라서 이제 새로운 단계의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국면이 가까운 시일 안에 해소될 조짐이 없는 상황에서 인권시민사회의 역량의 집중 정도를 적절히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보다 긴 호흡으로 중장기적인 비전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밖에 안정적인 정책참호를 구축하는 일이 필요하다. 민간차원의 인권전문 싱크탱크와 같은 연구기관을 설립하자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인권시민사회의 토대를 튼실히 하는 것이자, 설혹 훗날 국가인권위원회가 정상화된다 해도 정책과 의제경쟁을 통해 더욱 진취적인 방향으로 국가인권위원회를 견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인권시민사회의 위기, 혹은 기회


혹자는 개헌을 통해, 또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의 개정과 같은 제도적 보완을 통해 독립성을 구가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으나, 현재의 입법 환경을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고, 또 만에 하나 요행히 제도보완이 이뤄진다 해도 여전히 내부로부터 무너진 독립성(역시 주체 역량의 문제다)을 복원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에서 별개의 숙제로 남는다. 따라서 이 위기를 단순히 국가인권위원회를 둘러싼 정치상황의 변화, 요컨대 이명박 정권과 현병철 체제 때문에 초래된 것만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여기에 현재 국가인권위원회 사태에 대한 분석과 평가의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위기타개를 위한 올바른 실천전략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주체요인에 대한 엄격하고 냉정한 시선을 거둬서는 안 된다. 인권시민사회 진영은 실천을 위한 단단한 연대의 틀을 갖추었는지,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종합적인 마스터플랜을 가졌는지, 인권기구 운영에 대한 모니터링과 분석, 평가 등은 치밀하게 이뤄졌는지, 그 경험과 시행착오에 대하여 환류 시스템을 구축하였는지, 인권담론과 의제의 생산과 관리에 이론적 지도력을 발휘하였는지, 인권기구의 토대를 튼실히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꾀하였는지 등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분석이 이번 기회에 종합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와 별개로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있다. 예컨대 “독재라도 할 수 없다”는 저질스런 현병철 위원장의 발언도 속칭 ‘마사지’를 통해 전원위원회 속기록에서 삭제된 사례가 잘 말해주고 있듯이 저들은 오늘의 행태가 정확하게 일일이 기록되는 것을 꺼려한다. 기록마저 왜곡되고 마사지되는 사태가 재연되지 않도록 국가인권위원회 모니터링을 더욱 면밀히 하는 것은 역사적 기록물을 축적한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인권시민사회가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에 참여하여 그 운영의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안을 제도적으로 강구해야 한다. 지난 시기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돌이켜보면 인권시민사회와의 소통이 원활하기는커녕 형식적인 소통이나 불통이 다반사였으며 이는 곧 인권기구의 자기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게 만드는 요인으로 귀결되었다. 협치란, 명실공히 기획, 집행, 분석, 평가 등의 전 과정에 인권시민사회가 참여함으로써 그 의미가 완성된다. 해마다 개최되는 국가인권위원회 사업계획 간담회만 보더라도, 일방적으로 설명을 듣고 이에 대한 파편적인 코멘트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사업 분석과 평가를 기반으로 도출된 차기년도 전략적 집중과제에 대해 인권시민사회 진영과 밀도 높은 교호를 통해 전반적인 사업계획의 틀을 잡는 방향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것은 단지 사업영역, 요컨대 정책, 교육, 조사, 홍보, 협력 등의 업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인사와 조직, 예산 및 결산, 위원회의 운영 등을 망라하여 관철되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사무처 직원의 인사 및 직제의 변경, 업무영역의 조정에도 인권시민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며, 예산계획의 합리성 및 결산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수시로 설명회를 개최하도록 할 것과, 청문회나 후보추천위원회와 같은 위원장/인권위원 선임절차의 보완과 함께 속기록 작성과 같은 위원회 운영의 투명성 확보방안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 특히 대통령 특별보고의 권한행사는 인권시민사회와의 밀접한 조율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같은 과정이 원활히 진행되어야만 비로소 국가인권위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인권 거버넌스로서의 자기 역할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오늘의 위기를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10년 동안의 엇나간 관행을 바로잡는 계기로 삼는다면 향후 최소한 시행착오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제 판을 새로 짤 필요가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살리기 위해서 국가인권위원회 밖에서 인권시민사회의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