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주름잡는 시간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지구과학이란 과목이 있었습니다. 문과를 지망한 학생들은 대입시험에서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같은 과학 과목 중 하나를 선택해 시험을 봐야 했죠. 그 지구과학 첫 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더니 대뜸 칠판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선을 쭉 긋고는 그 위에 점을 하나 딱 찍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선이 인류의 역사라면 우리의 일생은 이 점보다도 짧다고 그럽니다. 또 이 선이 우주의 역사라면 지구의 역사 또한 이 점보다도 짧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선생님은 다단계 회사 대표나 사이비종교 교주의 ‘포스’를 물씬 풍기던 분이셨습니다. 결론인 즉은, 이처럼 방대한 범위에서 대입시험에 나올 20문항을 뽑으니 문제가 그 얼마나 쉽겠나, 그러니 다들 지구과학을 선택하라는 것이었지요. 물론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구과학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별로 기억에 남는 건 없지만 전혀 ‘과학’같지 않았던 지구과학 수업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놈의 입시만 아니라면 물리, 화학, 생물, 심지어 수학까지도 아주 흥미로운 학문이란 사실을 십 수 년이 지나서야 깨닫고 있지요.


지구가 또 한 바퀴 먼 길을 돌았습니다. 2011년 한 해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칠판에 찍힌 점은커녕 훅하고 불면 분필가루처럼 날아가 버릴 찰나일 수 있지만 지난해에도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연말이면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저뿐만이 아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지난 연말에 동갑내기들은 이제 마흔 살이라고 구시렁거렸지만 저는 속으로 마흔이든 마흔 다섯이든 빨리 둘째가 커서 어린이집에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래도 훌쩍 커버린 첫째를 보면 새삼 칠판에 그어진 줄이 떠오르고, 시간 참 빠르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누구는 한 살짜리 아이에게 1년이 1이라고 할 때 백 살 노인에게 1년=1/100인 셈이니 이렇게 계산하면 열 살의 1년=0.1이고 마흔 살 1년=0.025가 되어 열 살 때 비해 마흔 살 때는 시간이 네 배나 빠르게 간다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공식을 알려주더군요.


좀 더 과학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대강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먼저 사람에게는 물리적인 시계 말고 생체시계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느려진다는 것이지요. 어느 심리학자가 70대 노인 그룹과 20대 젊은이 그룹으로 나누어 눈을 가린 뒤 한 번은 1분, 2분이 지났다고 생각될 때마다 신호를 하게하고, 그 다음에는 1분, 2분마다 얼마나 지났다고 느끼는지 말하게 했습니다. 실험결과 연령에 따라 명확한 차이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노인 그룹은 실제 1분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서야 1분이 흘렀다고 답하고, 실제로 2분이 흘렀는데 40초밖에 안 됐다고 했다는 것이지요. 물리적인 시간이 흐르는 강물이라면 생체시계가 빠를 때는 강물보다 더 빨리 달리지만 나이가 들수록 생체시계가 느려져 강물보다 뒤처지게 되고, 그러니 상대적으로 강물(시간)이 훨씬 빠르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정보량의 차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초행길이 더 멀게 느껴지는 것처럼 매순간 낯선 경험을 하고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는 어린 시절은 길게 느껴지고 늘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성인이 되면 짧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억 속에서의 시간 감각이 정보량에 따라 재구성되기 때문이라네요.


머리를 많이 쓸수록 뇌에 주름이 많이 잡힌다는 말을 들어봤는데 시간에도 주름이 잡히는 모양입니다. 굳이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벌써 100년 전에 발표됐다지만 여전히 알쏭달쏭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아니라도 우리는 저마다 다른 시간을 갖고 있거나 같은 시간을 다르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처한 조건 그리고 기분에 따라 1분 60초, 1년 365일이 다 같을 수 없는 것이죠.


그럼 안 해본 싸움 없이 다 해봤다는 기륭의 1895일은 어떠했을까요? 용산참사로 가족과 동지를 잃은 이들이 장례식까지 견뎌야 했던 355일은 또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시답지 않게 시간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이번호에 실린 기륭과 용산에 대한 글 때문이었습니다.


2010년 막바지, 6년간의 질기고 질긴 싸움 끝에 마침내 사측과 조인식을 했다는 기륭 소식을 접하고는 ‘쓰잘~데 없지만 그래도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난해한(?) 요구에 성심껏 답해준 김소연 님의 글에는 1895라는 숫자를 만들어낸 시간의 주름들이 자글자글합니다. 방귀를 뀌고 잠꼬대를 하며, 단식을 하다 나물을 캐고, 안동찜닭을 먹으며 싸워온 그 주름들은 칠판을 가로지른 한 줄 선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일 테지요.


이제 곧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두 해째가 됩니다. 용산참사 유족 정영신 님이 인터뷰에서 했던 “정말 후회되는 건 장례식을 치룬 거”라는 말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용산참사가 일어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의 1년, 그리고 그로부터 또 1년은 과연 얼마큼의 길이, 얼마큼의 무게일까요?


늦어진 마감에 개인적인 사정까지 겹쳐 해를 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폭설과 한파로 한반도가 다 몸살입니다. 수십만 마리가 살처분되었다는 가축들이며 4대강 사업으로 소리 소문없이 죽어가는 생명들은 어떤가요. 이 살처분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민간인을 죽여놓고는 전투 중에는 불가피하게 따르는 피해가 있다며 이를 부수적 피해라고 했다지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늘 그런 식이지요.


올 한 해 또 얼마나 많은 ‘부수적 피해’와 부대끼며 결코 누구도 부수적인 존재일 수 없음을 증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디 가는 생체시계를 너무 탓하지 마시길. 눈가나 이마 혹은 뱃살 어딘가에 새로 잡힐 주름에도 부디 노여워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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