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혐오발화는 어떤 힘을 갖고 있나

인터넷이 공론장의 기능을 한다지만, 그것은 공적 이성의 사용을 통해 수평적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낙관적인 담화민주주의의 장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수평적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다양한 권력벡터들의 담론에 의한 수행적 힘을 갖고 있는 혐오발화가 난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론장에서 펼쳐지는 혐오발화의 향연은 대부분 근거 없는 편견에서 기인한 ‘역사적인 것’을 발화자가 차용하고 되풀이하면서 생산·증폭된다. 이를테면 짱깨, 검둥이, 빨갱이, 병신, 등신, 문둥이, 화냥년(환향녀), 꽃뱀과 같이 오랜 전통을 가진 익숙한 것이 있는가 하면, 보슬아치, 된장녀, 병맛, 지잡대, 전라디언, 좌빨, 보징어, 좌좀, 촛불좀비, 패륜녀처럼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어원을 알 수 없는 괴상한 신조어도 있다. 소수자에 대한 고전적인 혐오발언들이 주로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최근에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우후죽순처럼 탄생하여 남용·오용되는 혐오발화들은 주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하는 용어라는 것이 특징이다. 여하튼 혐오발화의 대부분은 발화자가 수신자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모욕을 주고, 자신들의 쾌락을 소수자들이 빼앗았다는 식의 사고이거나 혐오발화를 통해 발화자의 의도대로 수신자를 좌지우지하려는 목적을 띄고 있다.


언어라는 것은 사람이 쓰기도 하지만, 언어가 사람을 쓰기도 한다. 혐오발화는 그 자체로 ‘호명(呼名)이라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이에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어찌 보면 호명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인식하게 되며, 이를 인용함으로써 사회적 위치(주체)를 할당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혐오발화는 출석부와 같아서, 대답을 통해 권력담화의 명령에 굴복하는 것은 고까운 일이지만, 이에 응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예 출석부에 자신의 이름조차 없음을 뜻한다. 인간은 차라리 따돌림을 당할지언정, 혼자 살 수는 없는 존재이기에, 혐오발화는‘혐오발화에 응답하여도 억울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더 억울한’일이 생기는 치졸한 이중 주문의 양도논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혐오발화란 무엇인가


레나타 살레클은 혐오발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혐오발화, 즉 모욕적인 말의 일차적 의도는 공격당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스스로를 열등한 존재로 지각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그녀에 의하면 “혐오발화의 목표는 타자에게 굴욕감을 주고, 말로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종속된 자리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 관습들은, 발화자는 마치 정상성을 대변하는 자이며 상대방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존재라는 식으로 규정하는 데 힘을 실어주게 된다. 다양한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발언은 이전 관행의 반복이나 인용을 통해 권위의 힘을 축적하며, 그런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발화자는 자신이 혐오발화의 대상이 되는 비체를 규정할 수 있는 행위주체라는 환상을 스스로에게 심어주게 된다.


혐오발화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주체를 치욕스럽게 만들며 혹은 수치스러운 호명을 통해 그런 주체를 산출한다. 혐오발화는 반복된 주문을 통해 힘을 얻게 되며, 그로 인해 호명대상은 수치와 모욕으로 상처입는다. 혐오발화는 비장애인·이성애자·수도권·남성·백인중심의 권력의 시각에서 탄생한 여성·장애인·지역차별·연령주의(agigm)·인종주의적·정치적 신념 등에 대한 혐오에서 기인한 근거 없는 감정을 표출하거나 명령을 수반하게끔 강제하는 발화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대부분 혐오발화는 소수자 차별과 관련이 깊은 정도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이다. 혐오발화가 곧 소수자 차별이다.


특히 이런 혐오발화는 이성에 바탕을 두어야하는 도덕적 발화의 외향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근거 없는 심리적 감정(혐오)에서 기인한 ‘전칭 명제’, ‘가치 판단’의 형태의 것이 대부분이다. (동성애는 비도덕적이다, 장애는 극복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공격적·피해의식적이다, 전라디언들은 죄다 빨갱이들이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최근 ‘XX녀’라는 식으로 중구난방으로 인터넷에서 범람하는 혐오발화들은, 오로지 ‘여성’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칸트가 언급했던 “네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는 보편화 가능성에 어긋난다.



혐오발화의 발생과 영향력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화에 대해 “혐오발화적인 호명은 조롱과 경멸의 상상적 합창이다. 혐오발화는 이전에 이뤄졌던 일련의 권위적인 실행들을 반복하거나 인용함으로써 권위의 힘을 축적하게 된다”고 정의한다. 버틀러에 의하면 “혐오발화는 개별 주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퇴적물”이다. 즉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라는 오랜 관행이 역사적으로 축적시켜온 앙금과 모욕과 수치에 의해 혐오발화가 가능한 것이다.


또한 버틀러에 의하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나 모욕적인 혐오발화, “쟤, 퀴어잖아!”같은 경멸의 힘은 발화자의 의도나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퀴어잖아!”라는 외침이 역사적으로 축적된 모멸과 수치심과 비천함을 반복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혐오발화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는 과거의 수치와 비참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호명행위로 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종주의적 혐오발화를 하는 주체는 인종주의적 어휘의 거대한 집성체로부터 인용을 하는 것이다. 이때 당연히 어떤 발화자에 의한 혐오발화가 가능하려면,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내뱉을 것이며, 자신은 권력관계에 있어서 우위를 점한 주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혐오발화의 수행적인 힘은 개별 주체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사회적 힘을 개별 주체들이 차용하고 인용하지 않는 한, 개별적인 발언만으로는 상처주고 훼손시키는 권력행위로 연결되지 않는다. “퀴어잖아!”라는 호명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발언 자체가 사회적 규범이자 동조할 만한 관습으로 인식된다는 데 있다. 따라서 혐오발화자만 징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도마뱀의 꼬리만을 잡고 몸통은 내버려 두는 격이다.


당연히도 ‘여성’이라는 할당된 역할에 대한 성차별주의적인 오랜 관행이 축적되지 않았다면 굳이 ‘XX녀’라는 특정한 젠더 정체성의 혐오대상에 대한 발화가 일어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이런 관행을 발화자가 참조하는 것이 가능한 까닭은, 버틀러의 주장처럼 오래도록 누적되어온 성차별적 담론의 힘과 성차별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혐오발화자가 참조할 수 있는 권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단 ‘XX녀’ 뿐 아니라 대부분의 혐오발화에서, 예컨대 ‘지잡대’라는 혐오발화는‘학벌지상주의’라는 축적된 관행과 학벌을 신분제처럼 서열화시키는 명문대학의 카르텔이 없었다면 발화자는 혐오발화를 할 수 없을 뿐더러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도 없다. 혐오발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XX남’이라는 혐오발화나 ‘자슬아치’, ‘SKY잡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혐오라는 감정을 갖게 된 이유


라캉과 지젝에 의하면 만약 우리가 쾌락과 향락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지위를 강탈하고 대신 그 위치를 점유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량과 잠재력의 과장된 이미지는 이제 다른 ‘소수’집단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즉 그들에 의하면 ‘타자’들은 우리가 가지지 않은 어떤 것을 소유하며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가 얻지 못하는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일종의 잉여surplus를 가정할 때만 효력으로 발생한다.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심리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가 강탈당한 것으로 인식되는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향락이 타자에게 속하는 것으로 가정되어야만 한다.


어떤 것이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타자는 우리 자신의 경험 너머에서 향락의 차원을 경험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우리는 타자가-그들이 유대인이건, 흑인이건, 집시들이건-우리의 주이상스를 훔쳐갔다고 가정한다. 타자를 비인간화하는 과정이 타자의 권력과 영향력에 대한 과장을 동반하는 이중 과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향락의 절도’의 개념이 요청된다.


“타자는 게으르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더 많이 즐기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힘든 노동에 기생한다”는 말처럼 향락의 과잉은 항상 타자에게 귀착된다. 이와 더불어 타자의 향락은 반드시 우리의 향락을 박탈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워할만하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동했지만 우리를 속이는 게으른 외국인들에 의해 이 목표가 좌절되었다. 우리의 향락을 가장 완벽하게 실현시킬 수 있었던 바로 그 요소를 그들이 우리로부터 박탈해 갔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를 향유할 수 없다.” 향락의 절도, 이것이 지젝이 이해하는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논리이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어도 되지만, 싫은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존 듀이와 W. D. 포크 등의 사상가들은 “도덕 판단이 감정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모든 감정들이 도덕 판단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덕 판단의 적절한 밑바탕이 되는 것은 ‘이성에 의해 산출되고 유지되는’ 그러한 감정이다.


이에 대해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는 주장으로 이모티비즘의 선구라고 불리는 흄도 단순히 도덕이 감정의 문제라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도덕원리에 관한 고찰』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감정(즉 도덕 판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감정)을 위해 길을 닦으려면,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대상을 적절하게 구별하려면, 흔히 많은 추론이 선행되어야 하고, 훌륭한 구분이 이루어져야 하며, 정당한 결론이 도출되어야 하며, 냉정한 비교가 이루어지고, 복잡한 관계들이 검토되고, 일반적인 사실들이 확정되고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Hume, 1752)”



이에 대해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 또한 “감정들을 도덕적 확신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며 소수자 혐오에 대하여 명쾌하게 지적한다. 드워킨은 도덕적 입장과 정서적 반응을 구분해야 함을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적 입장이 정서적이지 않거나 감정과 무관하기 때문이 아니다. 정서적 반응이 도덕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입장이 정서적 반응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그가 자신의 입장에 관해 가지고 있는 정서만으로는 그의 도덕적 확신을 입증한다고 볼 수는 없다.”


드워킨은 물론 그런 정서로 말미암아 중대한 사회적·정치적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드워킨은 “어떤 관행이나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없는 심각한 정서적 반응들은 공포증 내지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제임스 레이첼스 역시 “무작정 아무 사실이나 어떤 윤리적 판단을 지지하는 이유로 간주할 수는 없다”며 “심리적 영향이 반드시 그러한 관련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컨대 어떤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말과 심리적으로 어떤 것을 연관시키고 있든 않든 간에, 유대인이란 말은 사악함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 사유와 도덕적 행위는 이유를 저울질하고, 그 이유를 길잡이로 삼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성을 길잡이로 삼는 것은 개인의 감정을 따르는 것과 매우 다르다. 강한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이성을 무시하고 감정에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우리는 도덕적 사유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쪽을 택하는 것이 될 것이다.”


도덕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역겹고 혐오스러워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에 대한 도덕적인 가치 판단의 술어로 대상화될 근거는 전혀 없다. 흑인, 외국인들, 아줌마,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족속들이라는 생각은 정당화될 수 없다.



혐오발화를 멈추기 위한 모색, 환대의 윤리


“주체는 타자의 인질”이라는 레비나스의 말처럼, 주체는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루저들이 있기에 위너가 있고, 여성성의 반대항으로 남성성을 정의할 수 있기에, 당연히 혐오발화의 발신자 주체는 수신자인 타자의 동의와 인용이 없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임옥희는 레비나스의 철학을 토대로 타자의 존재 없다면 주체 역시 절멸하게 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타자가 소멸하면 자신도 절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앞에서 서로의 취약함에 대한 연민과 슬픔으로 인해 환대에 이를 수 있다. 주체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끊임없이 주장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의존하고 있다. 얼굴은 이미 언제나 타자와 소통의 장이다. …… 바로 우리의 취약함이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될 것이고 손님으로서 서로에게 환대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언제나 타자와의 사회적인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공감, 공존, 환대, 신뢰와 같은 가치를 사적 인격들 사이에서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서로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박해망상으로 인해 타자를 삼켜서 나와 합체하려는 공격성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지배적인 몸짓과 국가의 언어가 아닌 사회적 소수의 감각에 호소하는 감성적 정치를 회복할 때 타자와 나의 공존이 가능하다.”



우리는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타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엘리자베트 다뎅테 역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D.H. 로렌스 또한 다음과 같이 남성과 여성이 화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고집을 세우고 반대하고 역정을 내보아도 결국은 고집을 꺾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했다. 이미 우리는 지구라는 세계에서 같이 살 수밖에 없는 팔자이며, 니체처럼 이러한 운명을 받아들이는‘아모르 파티(Amor Pati, 운명애)’를 행해야 한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현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지기에는 현재 한국의 여성과 남성이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분노의 수준이 너무 높다. … 혐오에 바탕을 둔 ‘마초’나 ‘된장녀’라는 호명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관계맺기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좌절시킨다”며 서로 각자 ‘타자’의 권리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해와 소통, 그리고 타인의 삶을 이해하려는 성찰과 윤리에서 새로운 성별 질서를 만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새로운 성별 질서의 윤리의 단초가 될 레비나스의 ‘얼굴’은, 우리가 요구하지는 못하지만 자유로이 거절할 수 없는 타자들이 우리에게 도덕적인 요청을 하고 있고 우리에게 도덕적인 요구를 전달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얼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얼굴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위에 있다. 얼굴은 죽음 앞의 타자, 죽음을 통해서 본 타자, 죽음을 드러내는 타자이다. 둘째, 얼굴은 마치 혼자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나에게 부탁하는 타자이다. 따라서 얼굴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살인하지 마라. 윤리 안에서 타자의 존재권은 나의 권리에 대해 우선성을, 윤리적 명령으로 요약될 우선성을 갖는다. 살인하지 마라, 타자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마라.”



레비나스가 ‘타자’라 부르는 것의 ‘얼굴’은 나에게 윤리적인 요구를 하는, 고통스럽고 번민에 젖어 있는 표정이 있는 살아 숨쉬는 것이다. 여성학자 임옥희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토대로 여성, 외국인 등의 손님으로서의 타자를 환대해야 함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자를 보살필 때 타자에 대한 사랑과 함께 죽음에 대한 불안이 사라질 수 있다. 타자를 환대할 때 주체는 나에게서부터 타인의 미래로 중심이 옮겨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오히려 타자가 주체의 행동을 주도하는 자가 된다.”



그렇다면 타자를 필요로 하는 주체로서의 우리는, 그 타자가 여성이든 장애인이든 아줌마든 베트남 처녀든, 누가 되었건 간에 타자의 인질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레비나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타자의 ‘얼굴’의 윤리적 호소를 거절할 수 없다. 그렇다면 타자를 인정하고 환대하는 것만이, 이 어쩔 수 없이 붙어 살아야하는 지구에서, 또한 인간의 유한한 삶에서, 불안감을 없애고 허무함을 줄이는 길은 아닐까.



덧붙이는 말

1) 보슬아치는 여성의 성기와 벼슬아치의 합성어로서 여자로 태어난 것이 곧 벼슬이라는 남성중심시각의 여성혐오적인 신조어다. 2) 된장녀는 비싼 호화 상품(명품)을 즐기는 여성들 중 스스로의 능력으로 소비 활동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애인, 부모 등)에게 의존하는 여성들을 비하하는 속어다. 그러나 이 본래의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그 의미가 계속 확대 재생산되어 현재는 주로 남성들이 생각하는 모든 부정적인 여성상들을 통틀어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위키백과사전, 2010년 5월 25일 검색). 3) 병신 같은 맛을 뜻하는 인터넷 유행어(위키백과사전, 2010년 5월 25일 검색). 4) 지방 잡 대학이란 뜻으로 인터넷에서 쓰이고 있는 말이다(『네이버오픈사전』, 2010년 6월 28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