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개미와 베짱이

산업역군에서 자아실현의 화신으로

한 학기 수업을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베짱이처럼 살고 싶은지, 아니면 개미처럼 살고 싶은지.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50:50에서부터 베짱이처럼 살고 싶다는 학생들의 숫자가 조금 더 많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베짱이처럼 살고 싶은지를 말해보라고 하면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모 대학에서 수업을 같이 한 어느 학생의 말이 그 중에서 가장 걸작이었다. 개미는 겨울을 내다보고 살아가지만 가을에 태풍이 와서 그동안 쌓아놓은 것이 한 방에 다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단다. ‘개그콘서트’에 나온 분장실 강 선생의 말처럼 “한 방에 훅 갈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미들이 초라해지다


이런 베짱이들 앞에서 개미들은 의외로 초라하다. 나중에야 베짱이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찰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베짱이들의 당당함 앞에서 위축되는 모습마저 보인다. 앞의 베짱이와 같이 수업을 듣는 한 학생이 그랬다. 자기는 하면 된다는 것을 믿고 참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안 되더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다. 그래도 안 되더란다.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살았지만 역시 안 되더란다. 그러더니 그 친구는 약간 울먹거리면서 자신은 아직도 열심히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그 순간 베짱이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 베짱이의 실체를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 학기 수업에서 이 주제로 토론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까르르 웃더니 그 베짱이가 수석졸업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다들 눈이 똥그래졌다. 특히 그 토론 이후 베짱이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는 ‘전직’ 개미는 더욱 경악했다. 베짱이의 친구는 왜 걔가 자신을 베짱이라고 말했는지 자기는 안다고 한다. 사실 그 친구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바로 자아실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존재가 ‘베짱이’기 때문이다.


베짱이를 흥청망청 하루하루를 소비하는 ‘잉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지난 개미의 시선일 뿐이다. 개미는 베짱이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찬다. 어찌 저렇게 미래를 생각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인간이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미래에 닥쳐올 불안과 위험이 무엇인지를 대비한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미는 미래를 대비한다. 그러나 혼자서 대비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대비한다. 그리고 자신의 공동체를 방어한다. 베짱이는 개미에게 한 방에 훅 간다고 조롱하지만 개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개인의 성공만이 아니다. 자기 개인의 노력이 비록 헛된 것으로 판명 나더라도 개미에게는 자신이 지켜야하고 자신을 기억해주는 공동체가 있다. 공동체가 영속한다면 개미 개인의 목숨은 비록 끝나더라도 개미들의 공동체에서 그의 목숨은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다. 개미는 공동체와 더불어 불멸을 꿈꾸는 존재다.


산업역군이란 그런 존재다. 박정희 정권시절에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한 여공들, 이역만리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가서 청춘을 불살랐던 내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노동은 단지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개인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 엄청난 노동은 자식을 위한 것이었고, 가족을 위한 것이었고,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다. 국가의 발전이 곧 개인의 발전이었고, 개인의 성장이 곧 가족의 성장이자 국가의 성장이었다. 산업역군이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더라도 국가의 성장, 역사가 언제나 기억하는 무명용사였다. 내 새끼를 통해, 내 가족을 통해, 그리고 국가를 통해 산업역군들은 불멸을 꿈꾸었다.



굶어죽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이런 개미들이 보기에 베짱이는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이고 또한 소비적이다. 왜냐하면 베짱이는 자기 자신을 무엇의 일원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만 여길 뿐이다. 그러나 개미가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베짱이도 무엇인가를 무지 열심히 한다는 점이다. 무엇을? 바로 자기가 하고 싶을 일을! 베짱이는 일을 하지 않고 띵까띵까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노는 것을 자기 일로 가진 존재다. 그래서 베짱이는 개미보다 더 열심히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바이올린을 켠다. 이것이 자아실현이다. 그렇기에 베짱이는 개미보다 더 지독하게 일할 수 있다. 개미가 공동체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는 윤리적 존재라면 베짱이는 자기 자신이 하나의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미학적 존재다. 개미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함으로써 사회를 불멸하게 하는 존재라면 베짱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순간순간 혼신의 힘을 다하며 찰나에서 영원을 경험하는 존재다.


그러다보니 개미와 베짱이의 내용도 바뀌었다. 오리지널 판본에서는 겨울이 되어 오고갈 곳이 없어진 베짱이가 개미에게 의지하며 자신을 후회한다. 그러나 요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버전은 전혀 다르다. 어느 버전에 따르면 개미는 열심히 일해서 겨우 겨울에 죽지 않을 만큼의 돈을 모았다. 그러나 베짱이는 기획사에 스카우트된 뒤 한 방에 떠서 겨울에 하와이로 휴가를 간다. 또 다른 버전에 따르면 개미가 겨울이 오면 어떻게 하려고 하냐고 물었을 때 베짱이는 쿨하게 “죽지 뭐!”라고 말한다. 뜨거나 굶어죽거나. 성공하거나 쿨해지거나. 자아실현과 생존은 이처럼 공존이 아닌 도박의 문제가 되었다.


굶어죽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자아실현을 위해 자기 존재를 걸고 도박을 하는 존재. 이것이 베짱이의 실체이다. 다시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라면만 먹고 살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적어도 내가 강의하는 학교에서는 과반수 정도 학생들이 손을 든다. 외려 이 비율은 의대에서 좀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다. 의대생들에게 물어보면 굳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풀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오히려 그런 자아실현이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취미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제법 많다. 그래서 ‘의외로’ 의대에서는 동아리가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음악이나 미술, 연극, 봉사활동 같은 동아리도 의대에서는 아주 잘 굴러간다. 의대생들이 올린 연극을 보고 온 한 친구는 이런 한탄을 했다. “저것들은 공부만 잘 하는 줄 알았더니 노는 것도 프로들이군!”


자아실현, 혹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가지고 열정을 다 바쳐 살아가고자 하는 것. 이것이 산업역군의 노동 윤리를 대체한 우리 시대의 노동 미학이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조국이 필요한 일을 하라는 ‘역사적 주체’로서의 산업역군은 남이 뭐라고 하건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네 삶을 값지게 살라는 노동 미학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완전히 소외된 노동의 의미를 묻던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저항에 대해 자본주의가 내놓은 절묘한 대답이었다. 그렇다. 너희들의 꿈을 펼쳐라. 그 결과 이 시대에 자아실현은 이제 우리 모두의 의무가 되었다. 사람은 모두 다 자기를 실현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 자아실현에 화답하다


사실 자아실현을 직업을 통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자아실현이란 먹고사는 것과는 상관없이 교양으로 혹은 취미로 하거나 아예 세상과 단절하거나 반대로 대단한 후원자를 만났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배고프더라도 모두가 시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회, 사실 이것은 이미 서구에서는 1968년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된 청년들의 요구였다. 적어도 서구사회에서는 전후 대량생산/대량소비 체제를 통하여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이러한 자본주의는 국민 모두를 배부른 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코제브는 이런 인간의 미래를 미국의 대중소비사회에서 만났다. 노동자들은 주말이면 차를 몰고 대형마트로 가서 식품이며 가전제품을 산더미처럼 사며 미친 듯이 소비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을 꿈꾸기보다는 자기 앞에 있는 상품, 오로지 상품을 소비하는 것에 만족하는 ‘동물’들이었다. 그래서 코제브가 미국에서 만난 인간의 미래는 ‘동물’이었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다만 욕구만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불만’이 인생의 동력이 아니라 ‘만족’이 삶의 동력이 된 존재, 그것이 바로 동물이 아니던가?


68혁명은 이에 대한 반기였다. 왜 우리가 동물처럼 살아야하는가. 프랑스 68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일상생활의 혁명』을 쓴 라울 바네겜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곧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집단적 생존의 문명은 개인적 삶에서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기만 하였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욕망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비사회는 소비와 스펙터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본은 이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반성’했다. 신자유주의는 이런 불만에 대한 자본의 화답이었다. 노동자가 되어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오로지 소비로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모두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사회를 만들자. 직업을 통해 먹고사는 것도 해결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아를 실현하는 존재, 이는 바로 ‘장인’이 아니던가! 장인은 예술가지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장인은 자신의 생산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사람이지 노동자처럼 자기가 만든 물건에서 소외되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다. 자기 숍을 가진, 자기 이름을 걸고 리그를 펼치는 프로게이머들처럼. 자, 이제 우리 모두 장인이 되자. 여기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노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착취하기 위해 내건 슬로건을 만나게 된다. 바로 앞에서 말한 노동의 미학화이다.



무조건 긍정하라


그러나 자아는 없고 오로지 공동체만 있었던 개미에서 공동체는 없고 오로지 자아만 소중한 베짱이로의 진화는 상반된 존재로의 전환이 아니다. 오히려 개미와 베짱이는 자본의 이란성 쌍둥이다. 개미나 베짱이 모두 시대와 맞서 싸우고 불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하나가 된다. 산업역군인 개미가 국가와 자신을 일체화하였다면 자아실현의 베짱이는 시장과 자신을 일체화한다. 시장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새로운 소비자들을 형성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은 1987년과 1997년 사이의 몇 년을 제외하고는 자본과 적대하는 노동인 적이 없었다. 늘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과거에는 조국과 민족, 그리고 가족의 미래를 짊어진 산업역군이라는 역사적 주체였다면 지금 시대 이들은 ‘장인’이라는 미학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개미와 베짱이는 긍정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산업역군인 개미의 정체성은 역사의 발전 혹은 진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다. 자식과 국가를 위한 나의 희생은 바로 역사가 무한히 발전하기 때문에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역사의 발전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믿음이 없다면 산업역군이라는 정체성은 설 자리가 없다. 또한 이것은 전시동원체제의 정체성이다. 역사는 필연적으로 발전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경쟁하는 적들에 의해서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다. 그렇기에 산업역군은 단지 노동자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적들과의 전쟁에서 구하는 ‘전사’여야 했다. 박정희 시대에 산업역군은 곧 산업 전사였으며 산업현장은 곧 전쟁터였다.


반면 베짱이의 노동미학에서는 자신에 대한 최대한의 긍정적 사고를 요구한다. 최근에 발간된 『긍정의 배신』에서는 이 점을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돈을 조금 받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에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새벽까지 코피가 터지게 일하더라도 그것은 착취가 아니라 나에게 기회가 온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해고가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시련을 이길 생각을 해야 한다.


서점에 깔려있는 수많은 자기개발서들을 보면 자아실현을 위해 긍정적인 사고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한 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미래에 대해 절대 부정적인 사고를 하지 말고, 무엇이 잘못되었다면 사회 탓을 하기보다는 그것을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 자기개발서의 메시지다. 남이나 사회 탓을 해서는 결코 자기를 실현할 수 없다. 자기를 실현하는 자는 최대한 자기 안에서 에너지를 끌어내고 미래를 낙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실현은 사이비 종교와 아주 닮아 있다. 사이비 종교에서는 잘되면 교주 덕분이고 잘못되면 믿음이 약한 내 탓이라고 가르친다. 열심히 믿었는데도 뭔가가 잘 안 풀리면 그건 아직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혹은 신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더 깨우쳐주기 위해 교육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련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아실현의 최대 적은 패배주의다. 산업역군이 외부의 적과 경쟁하여야 했다면 자아실현의 전사들은 자기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한다.


영화에서부터 만화 문화생에 이르기까지, 홍대 앞에서 배를 굶어가며 자기 음악세계를 추구하는 뮤지션에서부터 돈 안 되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노동을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자아를 실현하고 야망을 성취하는 도전으로 여겨야 한다. 박카스의 청춘에서 우루사의 직장인을 거쳐 케토톱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다시 열정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열정과 창의성은 생산의 기관차이고 자본의 새로운 땔감이다. 창의적이 되라,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부어라. 쫀쫀하게 돈 따위에 연연하지 마라. 네 시작은 미약하지만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 자본주의는 이제 사람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그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노동을 거의 공짜에 다름없는 가격으로 착취한다. 꿈은 자본주의의 가장 잔인한 덫이 되었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었나?』(웅진지식하우스)에 실린 추천사를 보완한 글이다.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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