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무엇을 위한 연대, 무엇을 향한 적대인가

2011년 들어 우리는 전에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사회적 연대의 물결을 목도하고 있다.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 시작된 청(소)년 활동가들과 젊은 예술가들의 재기발랄한 연대투쟁은 홍대에서 해고당한 ‘청소노동자’들과 한대련(한국대학생연합)의 반값등록금 시위에 대한 연대를 거쳐 명동의 두리반 ‘마리’와 강남 속의 또 다른 강남 ‘포이동 266번지’에 대한 연대로 이어졌고 마침내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위의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향한 세 차례의 희망버스 원정시위에서 절정에 달했다. 급기야 희망버스의 위력은 조남호를 국회 청문회의 증인으로 세우기에 이르렀고 그동안 희망버스에 소극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온 민주노총이 지난 주말(8월 20~21일)을 기해 전국노동자대회와 희망시국대회를 서울광장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반드시 철회하기 위해 8월 마지막 주말을 기해서는 4차 희망버스가 서울로 모여들 예정이다. 또한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평화 순례단이 강정마을로 날아가 지역 주민 그리고 운동가들과 연대하는 ‘평화의 비행기’가 추진되고 있다. 수구세력의 집요한 탄압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연대의 흐름은 더욱 다양한 현장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각각의 현장들이 더욱 밀접하게 결속하고 지원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연대 투쟁이 갖는 형식적 특이성과 내용적 중요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단연 운동의 의제와 그 운동에 참여한 주체들 사이의 비대칭성이다. 그래서인지 희망버스를 비난하고 조남호와 사측을 두둔하는 이들이 입만 열었다 하면 하는 소리가 바로 ‘외부세력’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이 ‘외부세력’이란 단어는 본래 그 말이 발화될 때 그것에 내재된 판단의 가치체계나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지금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연대성(solidarity)의 정치학을 사유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실마리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그 어떤 ‘외부’의 장소에 존재하고 있는 해고 노동자/철거민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한 ‘세력’으로서, 말 그대로 진짜 ‘외부세력’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외부’는 노-사 양측 또는 철거민-시행사 양자를 제외한 제3자 따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때 ‘외부’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외부이자 사회적 관리-질서의 외부이며 동시에 민주주의적 정치 외부의 공간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외부’의 의미를 이렇게 재규정한다면 우리는 희망버스로 상징되는 사회적 연대에 대해서도 새롭게 접근해볼 수 있으리라.



두리반에서 희망버스까지, 연대를 가능케 한 것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도주의적 차원의 지지였다는 식의 설명만으로는 1만 명이 넘는 대중들이 세 번에 걸쳐 부산까지 내려와 경찰과 격렬히 대치하고 밤을 새워가며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려 했던 이유를 납득할 수 없으며, 악독한 자본의 폭력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는 식의 해석만으로는 용역직원들과의 몸싸움까지 마다하지 않고 명동 마리를 지켜내고자 했던 결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를 노-사 양측의 또는 철거민과 시행사 양자의 갈등에 있어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제3자로 인식하면서 단지 어디까지나 당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온 외부인이라고 인식했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투쟁을 주도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외부세력’이라는 비난을 거부하면서 기꺼이 현장에서 하나로 연대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 글에선 두리반에서부터 희망버스로 이어지고 있는 우리 시대 일련의 사회적 연대의 흐름을 ‘잉여성’의 관리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 사회 ‘외부’로의 배제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즉 사회의 내부에 있던 이들이 외부에 있는 이들에게서 동질성을 발견하고 그들을 향해 다가감으로써 외부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탈(脫)경계적인 사회적 연대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미 외부로 배제당한 자와 앞으로 배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공유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어낸 것은 도덕적 감수성도 투철한 이념논리도 아닌 그저 본능적 차원에서부터 감지되는 동질성, 즉 그들과 내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그들의 절망이 나의 절망일 수 있다는 동류의식(同類意識)이었다. 연대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은 각자의 처지와 조건은 다를지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이 어떤 동일한 폭력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사회의 외부로 배제당한 이들과 그 외부의 공간에서 연대하며 ‘외부세력’이란 하나의 이름으로 응축되었다. 내가 김진숙이고, 내가 한진중공업 노동자이며, 우리 모두의 삶의 자리에 이미 두리반이나 마리가 존재한다는 공통감각, 결국 밖에 있는 그들이나 안에 있는 우리나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어낸 이 사회의 근본적인 폭력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의 자각. 이들 ‘외부세력’은 우리 시대의 사회적 적대를 상징하는 새로운 은유이다.



외부세력의 사회적 연대가 갖는 정치적 의미


‘외부세력’의 연대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짚어보기 위해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려지고 있는 적대의 전선에 대한 우회적 고찰이 필요하다. IMF 이후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체제로의 전환을 끝마친 한국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이라고 하는 경제적 토대가 정치적,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제도들과 같은 상부구조의 하부이자 그것을 결정하는 근본적 조건으로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그 사회적 관계의 외부 공간, 즉 사회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쪽으로 자신의 지배전략을 수정해나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하여 당대 한국 자본주의는 사회의 질서 구축 과정에서 세 종류의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첫째는 질서 그 자체를 부여하는 ‘현대의 군주’로서의 예외인간, 즉 자본주의 사회의 유일한 계급이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이 있다. 이명박과 한나라당, 기타 재벌 등 수구적인 지배세력들은 자본가 계급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동일한 계급에 속한다. 두 번째로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대행자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동시에 그 혜택으로 내부에 안착하여(그러나 언제든지 추방될 수 있는 위험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소위 자유로운 시민들이 존재한다. 끝으로 질서 그 내부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지만 의미 없는 인간’으로서의 잉여인간, 즉 프롤레타리아트 또는 민중들이 있다. 토대-상부구조라고 하는 건축적 은유로 표현되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구성체 모델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단지 노동자계급의 다른 이름, 결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의 한 종류로 정의되었지만 오늘날 내부-외부의 틀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하는 이들에 따르자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모든 잉여인간들 또는 비시민들의 집합으로 재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회 외부로 배제된 잉여인간들, 비시민들이야말로 일찍이 맑스(Karl Marx)가 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현실성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제는 거의 일반화된 해석이지만 본래 맑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 즉 무산자는 특정모습을 지닌 직업 집단이나 하나의 계층을 뜻하지 않았다.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 속의 한 계급이 아닌 계급,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한 계급인 부르주아지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들, 즉 셀 수 없는 계산 밖의 존재이며, 분배에 관여할 수 없는 배제된 영역을 표상하는 모든 존재들의 은유였다. 실로 무산계급이며 그러므로 모든 해방의 보편성을 담지하는 비계급적 계급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란 투쟁을 작동하게 하는 사람들이며 셀 수 없는 자를 계산해내기 위한 이름, 모든 사회 집단의 현실에 겹쳐진 주체화의 양식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로 한정하는 사고를 우리는 버려야 한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가장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정규직 임금노동자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부르주아지의 일부(노동귀족?)이다. 외려 이제는 생산-착취관계의 외부, 즉 사회구성체 외부의 영역으로 추방된 이들, 이를테면 비정규직 노동자, 잉여, 백수, 실업자, 이주노동자, 주민등록 말소자, 철거민, 장애인, 청(소)년, 노숙인, 신용불량자 등이 노동자 계급을 초과한 실질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 내부로부터의 배제로 인해 질서 자체와 적대적 관계로 접어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질서 구축 과정에서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불필요하고 무가치한 존재들을 대표하는 이름인 것이다. 바우만(Zygmunt Bauman)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차라리 없어야만 하는 존재, 즉 ‘쓰레기’로 판단되어 폐기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그것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기 내부로 포섭할 수 없는 ‘잉여인간’을 생산하는 이른바 ‘잉여성’의 관리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근대의 노동 패러다임 속에서 실업은 일시적인 비정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소비의 패러다임 속에서 실업이나 잉여는 소비능력의 부재이자 사회적 의미의 죽음을 가리킨다. 생산과정의 외부로 추방되었음에도 잉여인간이 여전히 생물학적, 사회적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한 그들의 삶의 형식은 자본주의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생산의 외부로 추방되었는데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할 충분한 수단인 자본이 준비되어 있다면 잉여는 그야말로 하나의 축복이다. 그러나 생산과정에서 배제되는 순간 더 이상 욕망과 욕구 충족을 위한 소비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잉여는 곧 사형선고다.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비극적 죽음과 살아남은 자들의 지옥 같은 삶을 여기서 굳이 인용하진 않겠다. 다만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얼마 전 국회에서 열린 한진중공업 청문회에서 지난 2년간 1300명을 정리해고한 조남호를 살인자로 규정했던 사실만큼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업상태에서도 정상적인 사회적 삶이 가능한 제도적 안전망이 구축되어 있지 않은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사실상 죽으라는 명령에 다름 아닌 것이다.


한편 잉여성의 구조가 잉여인간이 된 이들을 넘어 사회 전체의 보편적인 문제가 될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체계 자체의 구체적인 현실 기반임에도 방법적으로나 원리적으로 포착 불가능한 것, 즉 불안의 대상으로 우리에게 인지된다는 점에 있다. 자본에 의해 생산과정에서 자의적으로 배제됨으로써 사회의 외부로 추방당하는 잉여인간들이 양산되는 잉여성의 구조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다 알고 있지만 원리적으로 그것이 언제 어떻게 내게 덮쳐 올 것인지는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안과 공포가 그 지배의 테크놀로지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 둘 씩 사회 밖으로 버려지고 있는 주변의 잉여인간들처럼 나 역시 어느 한 순간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 더욱이 지금부터 어떤 대비를 한다 해도 그것이 막상 현실이 되었을 때 막아낼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는 공포감만이 양산되어 왔다. 2008년의 촛불에서 본 그 열광적인 집합행동도, 반대로 그 해 겨울에 일어난 용산참사에 대한 석연치 않은 무관심과 외면도,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우울증적 애도의 모습도 모두가 이 잉여성의 구조가 양산하는 불안과 공포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집합행동의 부침(浮沈)을 거쳐 이명박 정권 말기에 이른 지금 우리는 잉여에 대한 완전한 적응을 요청받는 단계이자 잉여의 영역으로 추방되지 않기 위해 ‘사회’의 영역으로 혹은 사회적 관리의 질서 내부로 다시금 편입하려는 새로운 종류의 계급투쟁을 목도하고 있다. 존재하지만 의미 없는 삶의 영역인 잉여의 공간으로 내몰리지 않기 위한 투쟁, 사회적/생물학적 삶 자체의 존속과 유지를 위한 투쟁이 우리 시대 계급투쟁의 실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토대-상부구조로 이루어진 사회구성체의 내부에서 착취적 생산관계를 파괴하려는 투쟁이 계급투쟁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잉여성의 구조로서 작동하고 있는 사회구성체 내부와 그 외부의 경계면에서 배제와 포섭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내부로부터의 추방에 대한 불안의 심리, 존재하지만 의미 없는 삶의 영역인 잉여의 공간으로 배제되지 않기 위한, 그래서 삶 자체의 존속과 유지를 위한 열망이 지금 명동 마리의 투쟁과 희망버스 행진을 추동하고 있는 근본적인 차원의 정치적 동력이라 볼 수 있다.



하나의 연대, 두 개의 정치


포스트민주화 체제 또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명명되는 오늘날 한국사회가 사실상 타자와의 유기적 연대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성격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88만 원 세대’니 ‘기업사회’니 ‘승자독식 사회’니 하는 개념들이 왜 나왔겠는가? 구조조정이다 국제경쟁력강화다 선진화다 도시환경개선(gentrification)이다 등등의 온갖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동원해 자본의 이익과 국가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사회 바깥으로 가차 없이 추방하고 축출함으로써만 유지되는 사회 아닌 사회가 되어버렸음을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회의 외부로 배제된 자들의 공간을 필수적으로 만들어내고 다시 그것을 사회 구성의 원리로서 포섭함으로써만 지탱되고 있는 이 사회 안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이 자신들의 사회에 대하여 대처하는 자세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회 질서에 대한 방관자 또는 협력자가 되기도 하고 사회 외부의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그들이 이 사회 안으로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더욱 급진적인 이들은 이 사회 외부의 타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여 지금의 반(反)사회적인 사회를 대신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사회, 또는 기존의 사회적 지평을 과감히 넘어선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를 이 사회의 외부로부터 다시 만들려 할 수도 있다. 적어도 두리반에서부터 희망버스에 이르는 정치적 연대에 참여한 이들이라면 방관자나 협력자는 필시 아닐 것이며 이 사회가 잉여인간들을 다시 포용할 수 있도록 현존하는 사회를 개선하려 노력하는 ‘사회’주의자들이거나 더욱 급진적인 관점에서 지금의 사회를 해체하고 사회의 외부로부터 새로운 삶의 교류형태를 발명하려는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특별히 후자의 사람들을 가리켜 급진주의자 또는 혁명주의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두리반에서부터 희망버스로 이어지는 연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의 경향들을 모두 보게 된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비전은 사회국가 혹은 복지국가가 채택했던 정치적 기획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사회복지국가는 연대의 윤리를 통해 계급 간 타협을 이루어냈고, 그 결과 오랜 시간 지속되어온 계급갈등의 사회적 손실을 막고 자유주의적 통치를 효과적으로 관철시켜왔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하여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사회민주주의란 이름으로 또는 복지국가라는 이름으로 수행되어 온 모든 정치적 프로젝트는 거칠게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든 종류의 부정적 효과를 자유주의가 스스로 제어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보다시피 이 사회복지국가적 기획은 신자유주의를 막는 데 있어 역부족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한나라당에서부터 민주당과 진보정당, 시민운동진영까지 (그 진정성의 편차는 크겠지만) 모두가 다 복지국가건설을 외치고 있다. 특히 희망버스와 연대하고 있는 범야권과 시민운동진영은 지난 10여 년 동안 지속돼온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가 낳은 실업과 고용 불안, 사회경제적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보편적 복지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보수적인 정부, 정당, 재벌, 언론에 맞서 싸우기 위해 흩어진 야당과 시민운동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정치 동맹’을 구성하여 정권을 되찾은 후 ‘역동적이고 보편주의적인 강력한 복지국가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하고 있다. 당연히 희망버스에 동참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는 많은 대중들 가운데 상당수가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보다는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을 지지하며 혹시나 김진숙(또는 조승수)과 노무현(또는 정동영)을 동시에 지지한다 하더라도 야권 단일화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루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더 사회적 연대성이 강화된 복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일 것이다.


물론 이들보다 상대적으로 소수에 속하는 급진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그 자체를 괄호 안에 넣고 이루어지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기획은 결국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바꿔 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변혁되지 않는 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공정하고 호혜적인 그런 사회의 건설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를 형성하는 행위로서의 정치는 항상 그것의 타자인 경제, 즉 생산양식의 변혁을 함께 과제로 짊어지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자본주의와 연결된 기존의 ‘사회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단절된 다른 어떤 새로운 형태의 교류관계 내지는 정치적 공동체를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그것을 가리켜 급진민주주의라 부르건, 코뮨주의라 부르건, 또는 자율주의라 부르건, 아니면 좀 더 솔직하게 공산주의라 부르건 그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말이다. 그들은 일관되게 말할 것이다. 뒤르껭(Émile Durkheim) 이후 ‘사회적인 것’이란 결국 계급적대가 초래하는 다양한 갈등과 위험들을 봉합하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그래서 아무리 자본주의의 사회구성 전략이 ‘한 사회 내의 토대-상부구조 건축’의 형태로부터 ‘사회의 내부-외부 공간 창출’의 형태로 전환되고 있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계급적대를 동반함으로써만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 더 나아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그것으로부터 배제된 사회의 외부 간에 발생하는 계급적대는 오늘날 다양한 사회적 적대들 중 하나로 출현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머지를 지배하고, 그리하여 그것의 관계가 다른 관계들에게 서열과 영향력을 지정하는’ 특수한 적대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경제적 투쟁, 인권적 투쟁, 여성주의적 투쟁, 생태주의적 투쟁, 평화주의적 투쟁 등 일련의 투쟁 속에는 언제나 그 연쇄의 부분이면서도 다름 아닌 그것의 지평을 은밀하게 결정짓는 보이지 않는 유일한 원인, 곧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의 적대적 투쟁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의 입장이 더 설득력 있으며 정치적으로 더 가치 있는지를 논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어느 쪽이 되었건 간에 자신들의 기획을 완수하기 위해선 두리반에서부터 희망버스로 이어지고 있는 이 사회적 연대의 운동을 자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각자의 목표와 과제가 무엇이건 간에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선물과 같이 주어진 이 사회적 연대를 지금보다 좀 더 강력한 정치적 연대로 확대시키는 일일 것이다. 모든 운동은 현재 대중이 있는 곳을 포함해 그들이 존재하는 바로 그곳으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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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택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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