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단절의 꿈이 미래를 만든다

세현은 학기말이 되면 성적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한국의 어느 대학생이 성적에 신경을 쓰지 않겠냐마는 세현의 경우는 각별하다. 그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은 곧 동생이 자기를 위해 대학을 포기했다는 의미임을 알기 때문이다. 세현의 집은 IMF 이후에 몰락했다. 그나마 공부를 잘하고 있던 세현에게 가족은 ‘몰빵’했다. 몰빵을 한다고 해도 세현의 가족이 국립대도 아닌 사립대의 등록금을 감당하는 것은 무지 힘든 일이었다. 대학 첫 학기를 마치고 집에 내려가자마자 아버지가 물은 첫마디가 ‘장학금은?’이었다.


아버지의 그 첫마디가 서운했지만 세현은 곧 자기가 대학을 다니는 것이 가족에 얼마나 큰 짐인 것인지를 깨달았다. 동생 볼 면목이 없었다. 이때부터 어찌되었건 장학금을 받아 집에 부담을 줄이고 하루라도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대학의 낭만? 그딴 것은 세현의 삶에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 이 또한 사치스러운 말이다. 주변의 모든 친구는 곧 학점 경쟁자였다. 친구를 친구로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마음이 나약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세상에서 자신은 혼자이며, 혼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것만이 가족의 희생을 보상할 수 있는 길이었다. 스스로 모든 친구를 적으로 돌리면서, 그 어떤 즐거움도 스스로 절제하면서 세현은 가끔 자신에게 묻는다. 이게 사는 건가?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자. 길수는 부모 모두가 대학교수다. 어렸을 때부터 길수에게는 다른 길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부모 모두 길수가 의대나 약대를 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개업의가 아닌 교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길수는 아깝게도 서울대를 가지 못했다. 아버지의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음을 추스르며 지금의 대학에서도 열심히 하면 교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위안했다. 하지만 길수는 인문학에 좀 더 마음이 갔다. 길수의 책장에 인문학 책이 쌓일 때마다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이러라고 내가 너를 공부시키는 줄 아냐고 폭언을 퍼부었다.
물론 길수도 안다. 자신이 교수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정해준 전공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학부생이지만 대학원생들과 함께 실험실에서 공동 작업을 하고 외국 저널도 꾸준히 읽고 있다. 이 분야에서 좀 더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워본 적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삶이다. 취미나 흥미나 전공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문제인데 그것은 늘 아버지의 시선 아래 있었다. 길수 역시 묻는다. 이게 사는 건가?



왜 사는가? 연대의 가장 근본적인 초석


살아가면서 인간은 여러 가지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한참 연애에 눈이 먼 사람은 절대로 사랑 그 자체를 의문에 붙이지는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 연애를 보다 더 불타게 할 수 있을지 혹은 파트너와 잘 이어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연애의 기술, 즉 테크네(techne)다. 그러나 사랑이 파국에 이르게 되면 사람은 사랑 자체에 대해 질문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가능한 것인가를 질문하며 스스로 비극에 빠진다. 이때 이 사람이 구하고자 하는 답은 테크네가 아니다. ‘그 자체’에 대한 질문에 기술 따위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그는 사랑의 진실을 알고자 한다. 이처럼 삶의 어떤 국면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존재 그 자체라는 점에서 ‘공학적’이라기보다는 ‘신학적’이다.


이 그 자체에 대한 질문에는 외부가 없다. 왜냐하면 삶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삶의 바깥에서 삶을 관조하며 답을 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질문이다. 답을 찾을 수가 없는 질문이며 비현실적인 물음이다. 삶 바깥은 죽음인데 죽음에서 삶을 사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근대 사회에 들어와 인간은 될 수 있는 한 이 질문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이 질문을 던지자마자 근본적인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점차 인간의 삶에서 밀려나 종교에서나 다루는 주제로, 부수적인 것이 되었다. 대학의 경우만 보더라도 애초에 미국에서 대학이 등장한 이유 자체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에게 고전을 가르치며 삶의 의미를 전수하는 것이 대학의 목적이었다. 삶에는 자명한 이유가 있고, 모든 인간은 그 삶의 의미를 받아들여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런 질문은 대학에서도 밀려났다. 한국의 대학을 보라. 그 어느 과목이 삶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는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종교이다. 근대화가 심화되면 될수록 종교가 번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이 근본주의적인 종교가 판을 치는 이유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 자체가 바로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에 소속된 사람들의 유대감이 그 어느 조직보다 강렬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공유한 질문과 해답의 근본적인 위상에 있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사람들이 종교가 아니라 일상에서 바로 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위에서 이야기한 세현과 길수의 경우도 그렇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을 만나 사귀며 그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제 삶을 제 스스로 통제하면서 제 앞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현과 길수의 삶에서 제거된 것은 바로 ‘삶’이다. 그러니 전혀 다른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가졌지만 이 둘 모두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들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죽음이라는 것을. 삶의 죽음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에게는 가장 ‘모독’스러운 사건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들에게는 삶이 곧 모독이 되었다. 삶이 모독이 된 사회에서 당연히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질문 하나만이 남는다. 이게 사는 건가?



희망버스, 질문을 공유한 자들의 연대


희망버스가 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분석이 오고간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의 힘이라는 분석에서부터 사회운동의 유목화라는 주장까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무엇보다 희망버스에 대해 인문사회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것이 지금까지 흔히 보던 ‘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연대이기 때문이다.


우선 지금까지의 연대는 ‘당사자’와 당사자 ‘이웃’간의 연대였다. 우리 사업장에 파업이 일어나면 옆 사업장에서 연대를 하고, 다시 그 사업장에 우리가 연대를 하는 ‘품앗이’ 개념이 연대의 의미였다. 이런 ‘품앗이’ 연대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깃발’이 필요했다. 조직이 조직과 연대하고, 조직을 통해 개인이 다른 개인과 연대하였다. ‘깃발’로 상징되는 매개체가 연대의 필수 징검다리였다. 그런데 희망버스에 오른 이들은 결코 노조나 깃발부대가 아니었다. 대부분 ‘일개’ 개인이거나 친목단체 수준의 모임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 전에 ‘운동경력’이라는 것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깃발을 꽂고 모이라고 하면 모일 리가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이 새로운 형태의 연대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희망버스와 같은 연대는 이미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 바로 홍익대 청소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연대였을 것이다. 홍대 총학생회가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빠지라고 외쳤을 때 당당하게 “그래 우리는 외부세력이다.”라고 외치고 “너희는 누구고 배후는 누구냐?”라는 질문에 “우리는 날라리”라고 대답하는 이들의 등장 말이다. 스스로를 외부세력 그리고 날라리라고 부르는 이들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연대의 등식에 종지부를 찍고 있다. 외부세력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이 연대는 지금까지 한국 연대운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당사자주의’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외부세력 연대했다, 내부세력 각성하라!”는 멋진 구호에서 보이듯 내부자들이 가진 ‘주권’을 한순간에 무효화하고 박탈해버렸다.


당사자주의의 폐기, 주권의 무효화. 이것이 새로운 연대가 보여주고 있는 가장 의미심장하고 충격적인 지점이다. 더 이상 운동은 이해당사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연대는 더 이상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무엇이 부당할 때 누구든 그 사건에 대해 개입할 수 있고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무엇에 대한 부당함에 주권을 넘어, 당사자의 이해관계를 넘어 사람들이 관여할 수 있는가이다. (사실 이 관여의 권리야말로 근대 권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권리가 될 것이다.)


이 순간이 바로 ‘이게 사는 건가?’라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다. 우리는 이 질문을 오로지 삶이 모독당했을 때, 그 순간에만 던질 수 있다. 삶 자체가 모독당함으로써 삶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때 오로지 가능한 삶은 삶의 죽음 이후, 삶 같지도 않은 삶만이 허용되었을 때이며 그때 우리 모두에게 그 사건에 대해 관여할 권리가 생긴다. 삶에 대한 질문을 공유했을 때 그리고 그 질문이 가장 근본적인 질문일 때 그 질문 앞에서 주권과 당사자주의는 무효화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당사자가 되고 우리 모두가 주권자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외부자이고 우리 모두가 손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희망버스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나는 그 국민이다.”라고 외치는 지독한 주권주의자부터 완전한 해체주의자까지 삶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모두가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희망의 육화, 단절의 꿈


그런데 질문을 공유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런 연대가 발생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근본적 수준의 연대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삶이 모욕 받았다는 상황인식을 넘어 다른 삶이 가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이런 희망은 누가 보여주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돌아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과 연대하고 그를 위로해주러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이 위로받고 영감을 받았고 ‘감동 먹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쓰는 말로 ‘은혜 충만한 시간’이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우리는 김진숙 지도위원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바로 정신의 힘이다. 사실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없었다면 애시 당초 불가능한 기획이었을 것이다. 사회학적 분석을 하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이야기이겠지만 김진숙 지도위원이 보여준 그 정신의 크기와 깊이가 아니었다면 희망버스는 출발조차 못했다.


누구나 ‘이게 사는 건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이 만들어 놓은 한계에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한계 내에서 굴욕적으로 살고 있을 때, 이때 이 사람의 삶은 노예의 삶이다. 세현이나 길수나 자기 삶에서 모욕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자신의 삶이 주인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라는 것을 매 순간순간 깨닫고 그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굴욕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자유인으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노예임을 발견한다. 아무리 ‘이게 사는 건가?'라고 구시렁거린다 하더라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삶의 죽음 이후의 삶’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상황 앞에 인간의 정신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정신의 패배이다. 이것은 인간의 패배가 아닌가?


여기에 김진숙 지도위원의 투쟁은 정신의 승리를 보여준다.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신에게 맞섰던 그리스 서사시의 주인공들처럼, 그것이 마지막인 것을 알면서도 광주항쟁에서 도청에 남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준 분들처럼,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사상과 양심을 지킨 장기수 선생들을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존경하는 것처럼.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모습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이게 사는 건가?’라는 우리의 넋두리에 대한 답,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새로운 연대를 위해서는 진실을 이야기하는 단 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은 또 노예의 삶이 아닌 주인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 한 사람이다. 그러나 연대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주인의 삶을 보여주는 영웅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모두를 진실의 주체로 불러 세우는 다른 역할의 사람이 필요하다. 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연대를 위해서는 진실을 자신의 몸으로 상연하는 사람, 푸코가 말한 ‘스승’, 파르헤지아를 실천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말해야 할 바를 말하게 하고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게 하며,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는 자유로움’을 실천하는 단 한 명의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의 역할은 ‘말을 듣는 자가 어떤 순간에 타자의 담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상황에 놓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김진숙의 말 한 마디를 듣고 우리 모두가 해방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절대 우리가 따라할 수 없는 영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진실의 담지자가 되게 하는 스승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야기하는 희망이란 무엇인가?



단절이 희망이다


빨간 십자가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요한묵시록」은 종말이 아닌 희망에 대한 책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종말론이라고 부르지 않고 ‘완세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의 끝이 아니라 세상의 완성이라는 의미다. 지진과 심판, 피와 유황불, 그리고 온갖 괴물들이 날뛰는 것을 묘사하면서 왜 일부의 학자들은 이 책이 절망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라고 말을 하는 것일까? 요한묵시록의 희망은 희망버스의 희망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감을 준다.


절망과 위기의 시대에 희망이란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위기와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이다. 저 수많은 빨간 십자가와 종말론자들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이 지금 망해가고 있고 곧 파국이 도래할 것이다. 그 파국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는 오로지 우리를 믿고 따라야한다. 이것이 그들이 전하는 소위 희망이다. 위기로부터의 보호를 보장함으로써 나‘만’이라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희망의 핵심이다. 그래서 제일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안전할 수 있는 숫자가 고작 144,000명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만큼 보호가 값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묵시록이 전하는 다른 희망의 메시지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파국으로부터의 보호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파국적 상황에 처한 당대를 묵시한 다음 그 이후에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제시한다. 여기서의 희망은 ‘보호’가 아닌 새로운 세상의 ‘도래’이다. ‘제국’이 지속되는 한 인간의 삶은 이미 파국임을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파국‘안’에서 나 혼자 안전할 것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파국과 과감히 단절할 것을 촉구한다. 파국과의 단절을 통해 제국‘안’에서 144,000명의 안전이 아니라 제국 ‘이후’ 모두를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요한이 유배지에서 전하고자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것이 희망버스가 희망인 이유이다. 우파들의 주장처럼 희망버스가 파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버스는 현재 우리 삶이 이미 파국이라는 사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희망버스는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쓰나미에서 144,000명만의 ‘안전’을 도모하는 그런 희망이 아니다. 희망이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라는 당대의 파국과의 과감한 단절이다. 같이 살지 않는 한 단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다. 희망버스는 노아의 방주가 아니다. 파국과의 과감한 단절, 그것이 미래를 만들어가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