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人터뷰] 땅 딛는 기쁨을 아세요?

탈시설 정신 장애인 연정(가명, 39세)씨

그녀는 너무 예뻤다. 신경질적으로 깡마른 몸이거나, 아님 정상적인 돌봄이나 관리를 받지 못해 너무 뚱뚱한 몸이 아닐까 하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긴 생머리에 갸름하면서도 선 고운 얼굴이 무척 앳되어 보이는 예쁜 여성이었다. 그 앳되고 예쁜 모습과 그녀가 전해 준 인생 이야기가 너무나 어울리지 않아 나는 얘기를 듣다가 다시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 그랬다.

“시설에 왜 들어가게 됐냐면 아주 어릴 때 사창가에 있었어요. 십대 때부터요. 거기에서 3년쯤 있으면서 돈도 많이 모았어요. 그런데 그 테두리 안에만 있으면서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니까 나가고 싶었어요. 열여덟 살부터 스무 살까지 그렇게 어린 나이니까 얼마나 나가고 싶었겠어요. 제가 있던 업소는 주인이 개업할 때부터 함께 고생한 사이여서 학대하고 착취하고 그런 건 없었어요. 그 집 딸내미가 있었는데 제가 에어로빅을 가르칠 줄 아니까 에어로빅장 차려서 같이 하자 그랬어요. 돈도 공평하게 나누고 하니까 큰 불만은 없었는데 나가고 싶은 거예요. 밖이 궁금했어요. 세상이 궁금해서 나간다 그랬더니 주인이 섭섭해 했어요.”

사창가라는 단어에 나는 낯이 화끈거렸다. 마음속에선 놀람과 궁금함이 파도를 쳤지만 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녀를 어떻게 대할지 몰라 눈을 얼른 내리깔았다. 조용한 방 안에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나는 그 어색함을 털고자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그 어린 나이에 그 곳에 가게 되었느냐고.

“엄마랑 아빠가 아주 어릴 때 이혼을 했어요. 저는 엄마랑 살았는데 명절이면 엄마는 그 집 핏줄이라고 아빠 쪽 큰 집에 저를 꼭 보냈어요.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체육시간에 어떤 여자가 나를 데려가겠다고 찾아왔는데 새엄마였어요. 아빠가 마음을 못 잡고 이 여자 저 여자 방황하니까 데려가려고 했던 거예요. 철없는 어린 마음에 별 거 별 거 다 있다는 소리에 넘어가서 그 여자를 따라갔어요. 처음엔 잘해줬는데 아빠가 그래도 맘을 못 잡으니까 저를 학대하기 시작했어요. 머리가 길었는데 머리를 싹둑 자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시퍼럴 정도로 때렸어요. 학교 가는데 안방청소 안하고 간다고 막 때리기도 하고. 엄마한테 가고 싶어서 친구한테 돈 500원을 빌려 찾아 갔는데 엄마도 그 사이에 재혼을 한 거예요. 아이도 낳고 새 아빠와 함께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의정부 아빠 집으로 보내졌어요.
그래도 계속 엄마한테 가고 싶으니까 그때부터 가출이 시작됐어요. 중학교 때 무용반 하면서 안양예고 가려고 했는데 새엄마가 원서를 찢어버리는 바람에 못 갔고, 고등학교 때는 미대 간다고 그랬는데 그것도 안됐어요.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고, 가출도 계속 하고, 엄마한테 갈 수 없으니 어쩌다가 그 곳에 들어가게 된 거죠.”

사람들이 그런 데 있던 걸 알게 될까봐 불안했어요

운명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정으로 십대의 나이에 그녀는 사창가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나마 폭력이나 감금을 하지 않은 주인을 만난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긴 시간 그녀의 인생을 옭아맨 시설 생활보다 차라리 나았던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채 스물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 풋풋한 소녀 연정은 꿈 꿀 자유를 잃었고, 그 곳에 속박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우울했다. 긴 우울증은 그녀를 정신 장애인으로 만들었다.

“첫 경험이 성폭행이었어요. 그런 애들이 그 쪽으로 많이 와요. 저희는 어릴 때부터 그런 생활을 해서 우울증 걸린 사람도 많아요. 저는 조울증이라고 나왔는데 불안증, 우울증이 주로 많더라구요. 사춘기를 다 그곳에서 보냈어요. 그 곳에서 일할 때 좋아하는 오빠가 생겼는데 오빠는 나랑 같이 있기만 원하는데 손님 오면 나가야 하는 거예요. 손님 받고 아침에 다시 들어가는 거죠. 주인에게 돈을 벌어줘야 하니까. 그 곳에 있어도 다 사랑하는 감정도 있는데 생활이 그러니 사랑이란 걸 이어갈 수 없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른 남자 손님한테 가야했던 상황, 그런 건 진짜 지금도 아픔으로 남아있어요.”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연정 씨의 인생은. 반복된 학대, 가출, 그리고 성폭행과 사창가 생활까지. 10년 남짓한 스무 살 연정 씨의 삶을 듣는 것도 버거운데, 정작 그녀의 불행은 이제부터다. 그녀는 그토록 나오길 원했던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덜컥 말을 잃어버렸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은 다시 혼자만의 세상으로 그녀를 몰아넣었고, 그녀는 말과 함께 꿈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곳(사창가)에서 막상 나오긴 했는데 사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줄 모르겠는 거예요. 사회생활이란 걸 하나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사창가 친구 중에 먼저 나온 애가 도와줘서 겨우 아파트 전세 계약을 했어요. 에어로빅 트레이너 되는 게 꿈이어서 88체육관에 가서 교육 받고 자격증도 따면서 사회생활을 준비했죠. 그런데 고정 수입이 없으니까 불안해져서 그 친구 소개로 강남의 룸을 다니게 됐어요. 정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게 없었어요. 룸살롱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만난 어떤 사람이 만나자고 해요. 가평 쪽에 별장이 있었는데 가보니 부모님도 계시고 그래서 결혼해서 살려고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때리는 사람이었어요. 강아지 한 마리 데리고 별장에서 도망 나왔어요. 나오기까지 한 1년 걸렸죠.
사람을 대하는 게 두려웠어요. 예전에 쓰던 말이 튀어나오면 사람들이 그런 데 있던 걸 알게 될까봐 불안했어요. 말을 잃어버리면서 실어증이 왔어요. 머릿속이 하얗게 그냥 아무 생각이 없고 입이 안 열려요.
93년인가? 이십대 초반에 처음 정신병원에 갇혔어요. 제가 실어증에 걸려 있으니까 친구가 아빠한테 연락해서 데려갔어요. 거기서 바로 강제입원을 시킨 거예요. 의정부에 있는 병원이었는데 강제로 먹였던 약들이 엄청 독해서 몸무게가 70kg까지 불어났어요. 입을 헤 벌리고 다녔어요. 그냥 침을 줄줄 흘리면서. 아빠는 면회도 안 왔고 너무 슬펐어요. 입원한 사이에 친구랑 함께 했던 레스토랑은 망하고, 친구는 제 돈을 주지 않고 다 그렇게 엉망이 됐어요. 7개월쯤 있다가 규정 때문에 퇴원을 했는데 그런 식으로 계속 병원에 왔다 갔다 하다가 스물 대여섯 살 때 쯤, 아빠가 어느 날 저를 기도원이라는 데 데려다 놓은 거예요. 아빠가 근무하던 회사의 식당 아줌마 얘길 듣고 결정했대요.”

입은 돌아가고 똥오줌도 묶은 채로

믿었던 사람들에게 속고, 세상은 그녀를 밀어내기만 하는 것 같았다. 망가진 몸과 마음은 결국 정신병으로 이어졌다. 왜 불행은 그녀에게만 찾아올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고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녀 인생의 가장 끔찍한 10년이었던 시설 생활. 그녀는 자신이 왜 시설에 갇혀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느닷없이 기도원에 끌려가게 된다.

“저희 고모가 전도사고 고종사촌 오빠도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빠가 기도원을 믿고 인가 시설도 아닌 곳에 데려다 놨어요. 왜 나를 기도원에 보냈는지 나중에 아빠에게 물으니, 아빠 회사에 제가 찾아간 적이 있는데 이상해 보였다고 해요. 우울증이 깊어졌을 때니까 이상해 보였겠죠. 퇴원해서 잠시 엄마 집에 있다가 갈 데가 없어서, 아빠가 보고 싶어서 간 건데…… 잠깐 여기 있으라고 하더니 소방서 119 말고 비슷하게 생긴 129차가 있어요. 그 차만 보면 저는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서워요. 그 차에서 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갑자기 나를 양팔에 끼고 가는 거예요.
기도원에 실려 가자마자 묶였어요. 너무나 놀랐죠. 막 소리 지르고 밤새 울었어요. 2~3일 동안 묶여서 입은 돌아가고 똥오줌도 그냥 묶인 채 쌌어요. 제가 갇힌 방은 화장실이랑 욕실까지 다 방 안에 있었는데, 불도 컴컴한데다 하나 있는 창문은 쇠창살이 있고 밖에서 문도 잠갔어요. 냄새 나는 그런 방에 여러 명이 있는데 작은 아이들도 있었어요. 밖에서 문을 잠그니 하루 종일 그 방안에 그냥 있는 거예요. 밥도 주황색 플라스틱판에 주는데 표면이 껄끄럽게 다 일어나 있어요. 밥 때가 되면 남자들이 그걸 몇 판씩 들고 와요. 단무지와 장아찌 몇 쪽, 김치 진짜 짠 거, 밥 한가득. 멀건 콩나물국 그게 다였어요.”

129응급차만 보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얼마나 놀랐을까.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것도 무서운데 내던져진 곳은 감옥 같은 시설. 치료와 도움이 필요한 그녀에게 시설이란 곳은 감금, 폭행, 인권 유린이 거듭되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시설에 갇혀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엄청난 일들을 겪었다.

“그 기도원이 대성리 쪽 무슨 수련원 같은 데 근처였어요. 형제들이 운영하는 건데 원장의 동생이란 사람이 약간 사팔(사시)에 전도사래요. 여자애들 중에 괜찮은 애 있으면 밖의 사택에 있는 자기 방에 데려가서 성추행 같은 걸 한 거예요. 함께 있던 어떤 언니한테는 3,40대면 성욕이 활발할 텐데 여기(기도원) 1년 이상 있으면 하고 싶을 거 아니냐, 그런 말을 장난처럼 하면서 가슴도 만지고 한 거예요. 나보다 어린 친구가 있었는데 저하고 그 친구를 잘 봤다며 우리 둘을 자기 방에 데려가서 포르노 테이프를 보면서 음흉한 미소를 보이고.
강제로 하는 예배시간이 있는데 예배 보러 강당으로 갈 때는 한 줄로 가야 해요. 남자들 방 앞을 지나가면 휘파람 불고 그래요. 알코올 중독으로 들어온 분들이 술을 안 먹으면 정신이 똑바르니까 거기서는 그 사람들을 상급으로 취급해줘요. 먹는 것도 더 주고 담배 한 가치도 더 주고. 그렇게 해서 우리 정신(병)쪽을 감시하게 하는 거예요. 시설에서는 알코올이 최고 권력이고 정신장애는 제일 밑바닥이에요. 왜 정신이랑 같이 두냐고 기분 나쁘다고 항의하는 알코올도 있어요. 우리한테 ‘정신’이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안 좋죠. 강당에 가면 원장이 목사 옷을 입고 예배를 하는데 완전히 신격화해요. 그런 거 하다가 무슨 고발 프로그램 같은 데 한 번 걸렸어요. 그래서 다른 데로 옮기게 됐어요.”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어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도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감금, 성추행, 사이비교주, 폭행 등 TV고발프로그램에서나 보던 풍경들이 그녀의 입에서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기도원에서 나오게 됐다는 말을 들을 때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제 좀 고통이 끝나나 싶었는데 아직 아니었다. 사회로 들어오고 싶었지만 그녀는 또 다시 강제로 다른 시설에 옮겨졌다. 시설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비일비재한 일이라고 한다. 평생을 시설에서만 살다 죽는 사람도 있다 하니. 어떻게 하늘 아래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데도 복지나 인권이라 이름으로 이런 지옥들이 계속 버틸 수 있는 것일까?

“옮긴 데도 비인가였어요. 말씀으로 치료한다고 하는 곳이었는데 거기는 진짜 무서운 데였어요. 시설 입구 옆에 바로 성전(교회)이 있고, 숙소, 식당 건물이 있는데, 높게 사무실을 지어서 사무실 건물에서 다 감시가 되도록 해놨어요. 감옥처럼 늘 한 사람이 우리를 다 내려다보면서 감시해요. 알코올 중독자들한테 노역을 시켜서 자기들 사택을 좋게 지어놨어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남편이 아내를 의부증에 걸렸다며 강제로 집어넣은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자식이 아버지를 감금하기도 하고. 거기 갇혀서 강제로 일하고 맞고 못 먹고 하니까 하루 종일 자기 신세한탄들 하죠.
기도원에서 일을 하는데 곡식타작도 하고 고추도 따고 그래요. 고추 딸 때 남자들이 음담패설을 막 해요. 그런 말을 들으면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내 행동이 이상해지는 거예요. 00골(연정 씨가 일했던 사창가) 말만 들어도 이상해지고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끌려가서 눈안수를 받았어요. 말대답하거나 맘에 안 들면 부원장이 눈안수라는 형별을 줬어요. 남자들을 시켜 사지를 다 붙들고 교회 강당으로 끌고 가요. 할머니 원장이란 사람이 있는데 4절까지 있는 어떤 찬송가를 부르면서 끝날 때까지 눈을 엄지로 꽉 눌러요. 정신이 더 혼란스러워졌어요. 이 생각 저 생각 복잡해서 정리가 안 되니까 환시, 환청이 왔어요. 어떨 땐 온화한 사람이 중세 시대 옷 같은걸 입고 나타나서 ‘연정아, 울지 마. 기도해 줄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땐 괴물이 보이고, 내가 좋아하는 남자에 대해 막 험담하는 소리도 들리는 거예요. 그럼 아니라고 말대답하고 소리 지르고 그러게 되요. 그래서 눈안수 당하면서 부원장한테 막 맞았어요. 사람들 다 있는데 아주 모욕적으로 때렸어요. 정말 고통스러웠고 시력도 나빠진 것 같아요.”

하지만 콘크리트 바닥의 빗살 같은 틈바구니를 뚫고 그예 삐져나온 파란 풀처럼, 끝을 모르는 절망 속에 있던 그녀에게도 한 자락 희망이 비쳤다. 연정 씨 인생에 어쩌면 처음일지 모르는 행운이다. 그녀는 운명처럼 탈시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어느 날 거길 탈출한 사람이 눈안수 하는 걸 신고했어요. 그래서 OOO(장애인권 운동단체) 식구들이 마이크 들고 기자들 데리고 다 온 거예요. 쇠창살 치우라고 하면서 여럿이 몇날 며칠을 몰려서 오더라고요. 그 단체의 OO가 시설 안까지 들어오게 돼서 만났고, OO언니랑 알게 된 것도 거기였어요. 나는 그 때 환시랑 환청이 엄청났을 때라 지(원장)가 처방을 다 해서 이름도 모르는 약을 먹였어요. 방이 추워서 입이 돌아가 있었는데 OO가 ‘입 왜 그러냐’고 손짓발짓으로 묻더라고요. 사정 얘기하고 이 약도 모르는 약인데 막 먹인다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부원장이 그 일로 징역을 갔어요. 그런데 가면 뭐하나, 잠깐 구류로 살다가 보석으로 금방 나온 거예요. 그때부터 저 년 때문에 징역 갔다 왔다며 말만 조금 하면 때리고 그 뒤에도 약을 먹였어요. 나뿐 아니라 정신병이 심했던 다른 애한테도 그랬어요. 병이 계속 악화됐죠.
OO랑 몰래 주고받은 명함으로 연락이 됐고, 먹는 것, 눈안수, 강제 약처방들을 밖에서 신고해 주는 바람에 다시 기도원이 문제가 됐어요. 이번엔 병원으로 갈 사람들은 다 가라고, 그리고 집에 갈 사람들도 가라고 해서 나왔어요. 진짜 오갈 데 없는 사람들만 계속 남았어요.”

드디어 지옥 같은 시설에서 나왔단다. 나도 기뻤다. 글줄로는 한 장도 안 되는 얘기, 말로 하면 이십분도 안 되는 얘기지만, 고통스런 그녀의 십년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지옥 같은 시설에 또 다시 남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오갈 데가 없어 지옥에 주저앉아야 하는 사람들을 책임져 주지 않는 사회. 그러면서 공동체를 외치는 사회. 나온 사람에게도 남은 사람에게도 세상은 여전히 따뜻하지 않았다.

“10년 만에 나와 보니 제일 신기했던 게 사람들이 손에 다 뭘 하나씩 들고 다니는 거예요. 핸드폰이었어요. 사용법도 모르고 신기하기만 했죠. 십년을 시설에 갇혀 있었으니 당연히 전화하는 법도 모르고, 휴대폰, 컴퓨터 같은 거 하나도 할 줄 몰랐어요. 나왔다고 기뻐할 틈도 없었어요. 아빠는 전화기도 못 다룬다고 핀잔하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으니 그냥 두려움만 커졌죠. 병원에서 치료 받고 몸이 많이 좋아져 일자리를 구했어요. 충무로에 있는 고시원이 숙식하면서 밤새 일할 사람을 구해서 겸사겸사 취직을 했는데, 좁은 방에서 당장 뭘 할 줄도 모르고 너무 무서웠어요. 컴퓨터로 일을 해야 하는데 하나도 할 줄 모르니까.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짜 바보였어요. 정신연령도 십대에서 멈춰버린 거예요. 고시원을 나왔죠.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어요.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했어요. 인터넷 보고 무작정 찾아가서 영화 촬영장에서 일도 했어요. 길바닥에 내버려졌는데 먹고 잠잘 곳은 있어야하니까 찾아갔죠. 하루하루가 급한데 돈 빌릴 사람도 없었고. 그러다가 00언니 소개로 도배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도배 일도 했어요.”

그녀의 인생은 열일곱이던 십대에서 멈춰있었다. 달력도 없고, 면회도 되지 않는 곳에서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다, 그리곤 곧 체념하다, 배고픔에 입으로만 온갖 요리를 하기도 하며 버틴 날들이었다. 자신이 먹는 밥을 보고 한참을 울다 간 엄마를, 한 번 올 만도 한데 오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생각하면 아찔한 세월이다. 눈물이 그렁해서 뱉어내던 그녀의 말. 이십대였던 자신이 벌써 삼십대가 되어 있더라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되돌릴 수 없으니 그저 기억에서 지울 수밖에 없는 세월.

“스물다섯에 들어가서 서른네 살까지 십년을 기도원 두 곳에 있었어요. 달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고, 나와 보니 참 빠르더군요. 나는 이십대였는데 벌써 서른넷, 삼십대가 되어 있어요. 그렇게 돼버렸어요.”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요

시설에서 나와서 ‘강강술래’라는 곳에 갔다고 한다. 거기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녀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운을 만들어줬다. 강강술래는 그녀의 아픈 몸을 치료하고, 다친 마음을 위로했다. 그래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끈이 되어주었다.

“강강술래는 OO언니 소개로 들어간 곳이에요. 아는 분이 성매매 피해여성들을 도와주는 곳을 소개시켜줬대요. 언니한테 전화했더니 얼른 오라고 그래서 의료지원 대상자로 나오게 됐어요. 치료를 할 수 있어서 병원에 한참 있었는데 C형 간염도 걸려 있었어요. 주사 한 대에 70~80만 원 하는 그런 치료를 해줬어요. 사회생활 할 수 있게 도와준 것도 언니 도움이 컸어요. 시설에서 나와서 한 1년가량 일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체력으로 버텼는데 힘들어서 못해요. 강강술래 쪽에서 지금 쉼터로 연결을 시켜줬어요. 정신질환으로 의료지원 필요하고, 사창가에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입소 자격이 됐어요.
솔직히 쉼터도 시설이라면 시설인데 여기는 저희를 도와줘요. 얘기를 다 터놓고 말하는 내 상담 선생님도 있고, 언제나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고 있어요. 우리도 손을 내밀죠.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하고 싶다고 하니까 선생님들이 미술용 연필을 갖다 주셨어요. 사회적 일자리도 추천해줬어요. 시설에서 살면서 세금 안내고 생활비 안 드니까 차비만 있으면 돼요. 인성프로그램도 많고, 장애인 시설에 가서 선생님이 되어서 돕기도 해요.
1년에 두 번은 워크숍에도 가요. 우리들이 말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소리칠 수 있도록 도와줘요. 성매매 경험을 밝히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아빠도 알고 그냥 밝혔어요. 갔다 오면 언변도 늘고 임기응변도 늘고 그래요.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요. 꼭 자기가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도 인성프로그램 같은 건 사회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좋아요. 돈도 나오고. 아르바이트로 일할 수도 있고요.
도화IC 옆 자활기관에 가면 작업실이 있어요. 홈패션, 도자기 등이 있는데 일주일정도 적응한 후에 하고 싶은걸 고르라고 해요. 저는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요. 일주일에 하루 이틀 쉬고 하는데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65만 원을 받아요. 그림 그리는 일이라 재밌어요. 예전에 그런 생활할 때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어찌 됐건 돈을 주고 내 몸을 파는 거니까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강강술래라는 단체를 만나, 치료와 치유를 시작한 얘기를 시작하면서 연정 씨의 목소리는 한결 밝아졌다. 강강술래에서 만난 분들의 도움으로 연정 씨는 지금의 쉼터에 오게 되었다. 쉼터는 연정 씨가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곳이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고 미래에 대한 꿈만 꾸면 되었던 그 시절, 열일곱 소녀로 돌아간 연정 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일로 돈을 버는 방법도 찾았다. 신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건 예전에 못했던 한 가지 일,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검정고시 보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일단은 미대에 진학해서 순수미술을 하고 싶어요. 쉼터에서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한 언니들이 있어요. 나도 선배들을 모델로 보고 따라가는 거예요. 공부도 하고 싶었고요. 미대 쪽은 실기가 70%고 경쟁률도 높아요. 검정고시도 8과목 치는데 평균이상이 나와야 합격이라 힘들죠.
사촌언니가 40대인데 여행사 과장에 싱글이에요. 외국출장을 많이 나가고, 집도 혼자 있고 그러니 같이 살자고 해서 양평에서 같이 살기로 했어요. 양평에 작업실 얻어서 살고 싶어요. 병원에 가서 아픈 분들께 봉사도 하고, 미술심리 공부해서 이쪽 친구들 가르치고 싶어요. 나도 받은 게 있으니까. 돈을 벌려면 디자인 쪽으로 직업을 가져야 하고. 결혼은 글쎄…… 결혼보다는 같이 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곧 검정고시를 보는데 결과가 5월 13일에 나와요. 나오면 수시 2학기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특별전형이 있어서 합격만 하면 거기서 공부하려고요. 떨어지면요? 만약에 떨어지면 다시 봐야죠. 8월에 또 시험이 있어요.”

맘대로 사랑할 수 있는 그게 너무 좋아요

앞으로 살 계획들을 차근차근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밝고 차분했다. 조금이지만 그동안 모아 놓은 돈과 아빠 도움을 받아서 등록금도 해결할 거란다. 선배들도 보면 어려워도 다 하더라며 밝게 웃는다. 아빠가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이제 아빠 말을 반만 믿는다며 여유 있는 농담도 던진다. 그녀가 쉼터에서 머무를 수 있는 날은 이제 일 년이 채 남지 않았다. 전세계약서도, 세탁기도, 휴대폰도 쓸 줄 몰랐던 그녀는 이제 혼자서 대중교통을 타고,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인터넷 미니홈피에서 첫사랑 친구도 만나며 살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세상 속으로 한 발씩 내딛고 있다. 그녀는 그 가장 큰 힘을 시설에서 자신을 구해 준 활동가들에게 돌렸다.

“시설에 함께 있던 사람 중에 지금 연락되는 사람들은 없어요. 저는 성공적으로 잘 살고 있는 거죠.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데 저는 정말 잘 만난 거예요. 사회복지시설이나 우리에게 도움 주는 기관도 00언니나 00이 아니면 몰랐어요. 그런 도움을 주는 곳이 있는 것도 몰랐죠. 성매매 피해여성들의 전국 모임이 있는데 이름이 ‘보따리’예요. 나도 보따리 회원인데 우리처럼 성매매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탈 성매매나 성매매여성 지원을 하는 활동가로 일할 준비를 하기도 해요. 연수원에 들어가서 같이 게임도 하고 프로그램도 하고 그래요. 보따리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기관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녀의 십년은 참 끔찍했지만, 지금 머물고 있는 쉼터는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럼 시설의 ‘열악’함이 문제이지, ‘시설’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지금처럼 지원해주는 사람이 있고, 환경만 좋다면 오히려 혼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 전문적인 치료와 도움을 받는 것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그런 궁금증에 대해 물었다. 왜 탈시설을 해야 하는 것인지. 그녀는 가슴을 탁 치는 첫 마디로 답을 시작했다. 그건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였고, 어느 게 더 나은지, 나쁜지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땅 딛는 기쁨을 아세요? 걷는 자유라는 거 무시 못해요. 길거리 다니면서 맛있는 거 사먹고, 여행 가고, 땅 딛는 기쁨이란 걸, 시설에서 나오면서 그걸 느꼈어요. 어디든 다녀볼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사람도 만나고 그런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요. 10년 동안 있었던 시설에서는 인권이 없었어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10년 세월이 내 인생에서 없어져버렸어요. 하고 싶은 걸 시작했지만 너무 시간이 늦어버렸고, 공부도 다시 할까 말까 정말 많이 고민하다가 결정했어요.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지금 쉼터는 많이 자유로워요. 하지만 다 그렇듯 장단점이 있어요. 단점이라면 기숙사처럼 여러 명이 있으니까 갈등이 있다는 거죠. 단체생활을 한다는 건 어쨌든 불편해요. 내가 자유롭지 못하니까. 독립된 내 생활을 꾸려가는 게 필요해요.
탈시설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인 것 같아요. 그 열악한 곳에서도 사랑이 싹터요. 몰래 쪽지 주고받다 걸려서 난리도 나고 그랬어요. 누군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맘대로 사랑할 수 있는 그게 너무 좋아요.
시설에서 나와 적응하는 게 진짜 많이 힘들었지만, 나와서 그 과정을 겪으면 더 성숙되고 생각도 깊어지고,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랬어요.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고요.”

내 삶의 조건을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누구나 동등하게 선택할 기회를 가질 수 있고, 그 선택의 폭은 최대한 넓은 사회, 그럴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의무를 다하는 세상이야말로 민주주의고 좋은 사회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그녀는 벚꽃을 보고 예쁘다며 좋아라 웃었다. 딱 열일곱 여고생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그녀에게 반가운 문자가 왔다.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옷가게에서 판매 일도 배우기 시작했다고, 격려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아빠도 기뻐하시고 도와주겠다고 하셨단다. 그녀의 인생을 이토록 힘들게 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 중이다.

“첫 번째 기도원에서는 갇혀만 있으니까 아예 부모가 왔다 간 것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엄마가 왔다갔다는 걸 알았죠. 엄마가 가져 온 가방 하나만 들여보내고 면회를 안 시켜줘서 못 봤어요. 엄마가 밥을 먹고 갔다는데 밥 나오는 걸 보고 나중에 저한테 말하길, 도저히 못 먹겠더라고, 한참을 울었다고 그래요. 두 번째 기도원에서는 산책시간에 어떤 분이, 네 아빠 다녀가셨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이불 하나 두고 가셨대요. 가족이 면회를 와도 우리들 말은 못 듣고 원장이나 그 쪽 사람들 말만 듣고 그걸 믿고 돌아가는 거예요. 지금은 미움이 많이 옅어졌어요. 내가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해요. 아빠가 내가 잘 몰라서 그랬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요. 과거 일은 잊고 이제부터 잘하자고. 엄마는 지금 뇌졸중에 걸려서 치료 중이에요.”

그녀는 요즘 즐겁다. 병원에 입원을 안 한지 1년이 다 됐고, 상담치료만 받으러 다닌다. 치료 결과가 좋아 약도 많이 줄였고 앞으로 더 줄일 생각이다. 지금은 서양화를 배우고 있다. 서울 근교의 대학에서 교수에게 직접 배우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한다.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다며 자기가 그린 작품을 자랑스레 보여줬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연애도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입시 준비를 위해 미술학원도 알아보는 중이다. 옷 판매 일은 입시 준비 때문에 그만뒀다. 새로 도전하는 일들이 모두 그녀를 설레게 한다.

서른아홉 인생 동안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선택한 첫 길, 그 길에 이제 첫 발을 뗀 그녀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도 한껏 응원해 줬다.

땅 딛는 기쁨을 몰랐던 내게, 지금 내가 자연스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얼마나 간절한 바람인지 깨닫게 해 준 그녀에게 고맙다. 이제 그녀가 맘껏 사랑하고, 맘껏 걷고, 맘껏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모두가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주고, 보듬어주고, 손 내밀어 주면 좋겠다. 더 이상 사회에서 버림받았다는 슬픔으로 살아도 되지 않도록. 그게 우리들의 의무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한 맨 첫 걸음은 “탈시설 지역사회로!”를 함께 외치는 일이다.


<인터뷰 후기>
장애인들에게 시설을 떠나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기회를 권리로서 주어야 한다는 게 이 작업의 주제다. 하지만 탈시설이 정치적으로 무조건 옳은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주저했다. 바른 철학으로 잘 운영되는 시설이라면 당사자도 가족도 더 편안하지 않을까? 시설의 인권침해, 열악성을 끄집어내어 비판하는 게 더 필요한 일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계속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신장애에 대해 나는 너무도 아는 게 없었다. 지체장애 말고 정신 장애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유형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내게 가할 수 있는 위협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부끄럽게도 그랬다. 말하다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면 어쩌지? 소리를 지르거나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면 어쩌지? 나를 원한가진 상대로 착각하고 내게 해를 가하면 어쩌지? 만나자마자 그건 정말 기우였음을 알고는 어찌나 낯이 화끈거렸던지.
연정 씨를 만나고 나는 두 가지 갈등을 모두 해결했다. ‘탈시설 지역사회로’는 옳다는 것, 그리고 장애인은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어느 사회건 잘 적응해서 사는 사람과 남들보다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장애가 있건 없건 마찬가지다. 비장애인 가운데 사회 부적응자에 대해서는 사회적응을 돕거나 혹은 선택의 문제로 모른 체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들을 지역사회에서 버려야 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지역사회와 잘 섞이도록, 공동체에 포함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해 우리는 아주 당연한 듯이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버린다. 지역사회에 잘 적응하는지, 못하는지 알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차단한 채 시설에 가둬버린다. 이런 폭력이 없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 어떤 장애인은 사회에 잘 적응해나가고, 어떤 장애인은 잘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그걸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기회’와 ‘권리’를 주는 것이다. 지역사회 자체가 올바른 철학을 가진 공동체가 되면 되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 태초에 시설은 없었다.


덧붙이는 말

탈시설 자립생활 인터뷰는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의 출판기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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