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특집] 누구를 위하여 촛불을 드나

당신에게 현장은 무엇인가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수원역.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촛불문화제를 준비하거나, 문화제가 없는 날에는 선전전을 준비한다. 그 바쁜 사람들, 그들이 수원촛불 사람들이다.

수원촛불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추가개방에 반대하여 서울에서 촛불을 시작했을 때 즈음하여 수원에서도 같은 이유로 촛불문화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날이 5월 6일. 수원촛불이 탄생한 날이다. 이때는 미국산 쇠고기 추가개방에 반대하여 사람들이 모였지만 수원촛불은 이 뿐만 아니라 4대강 사업, 언론악법, 일제고사, 재개발지역 철거문제, 공공부문 민영화, 장애인 이동권, 대학등록금 등 사회문제와 정리해고, 비정규직 등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 갔다. 그에 대한 실천으로 서울에서 열린 각종집회는 물론 수원지역 활동가가 농성을 한 4대강 이포댐(보) 현장과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한일파카유압, 캐리어 등 파업현장에 노동자 지지방문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들을 매주 수요일 수원역에서 수원시민들을 상대로 알리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수원촛불은 태동기에 수원지역 시민단체, 노동조합, 진보정당이 중심이 되어 탄생하였지만, 지금은 직장인, 대학생, 주부 등 많은 시민들이 시민단체 활동과 노동조합 조합원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활동가들과 시민들 한쪽만 있었으면 지금까지 이러한 활동을 이어가기 힘들었었겠지만, 이들은 서로의 장점을 배워가면서 2008년 5월부터 지금까지 180회가 넘는 촛불을 스스로 이어가고 있다.

2008년 촛불과 용산참사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에 비해서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정치인들에게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신한국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에 대한 지지에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는 투표권이 없어서 투표를 못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투표권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투표를 했다면 분명 보수정당에 투표를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대통령하는 그 아저씨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추가개방에 따른 촛불이 시작되면서 나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속은 듯한 느낌이 들었고 내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을 폄하하는 사람들, 언론들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경찰의 진압방식들…….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내가 알지 못하며 살아왔던 많은 사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촛불을 드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 촛불 든 사람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군복을 입고 나온 사람들, 광장에서 노래하고 춤추던 사람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고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나에게는 광장으로 나설 용기가 생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내가 할 일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는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나의 생각을 또 다시 바뀌게 할 사건이 일어났다. 2009년 1월 용산에서 일방적인 재개발에 반대하며 자신의 작은 공간과 행복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을 경찰이 무참하게 진압을 한 ‘용산참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보면서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재개발을 하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큰돈을 버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걸 알았고, 너무나 많은 불편한 진실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작은 돈을 받고 그 곳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역깡패들의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시달려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들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 것들을 모르고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강제로 쫓겨나는 사람이, 망루에 오르는 사람이, 경찰과 용역에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내 미래의 모습 같고, 내 부모님의 미래 모습인 거 같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나는 순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진, 많은 사람들이 모르던 진실이 알려지고, 수많은 인력이 투입되었던 사건 조사 가운데 그날 그 현장에서 있었던 단 한사람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모든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문제가 올바로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용산참사’ 수사결과 발표에서는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하나도 없이 모든 잘못이 철거민들에게 있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사발표를 보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낯설었던 수원촛불

나는 서울에서 열리는 집회정보 등을 알아가는 와중에 수원에서 정기적으로 촛불을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수원촛불 온라인 카페를 가입하게 되면서 수원촛불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수원촛불 문화제에 처음 참가하게 되었다. 처음 나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겨줘서 고마웠다. 하지만 문화제 행사도 구호를 외치는 것도 나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다. 그리고 문화제를 마친 후에 수원촛불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는데 일반 시민들도 많았지만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촛불을 드는 사람들은 모두 일반 시민들인 줄만 알았는데 그런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도 좀 했고, 내가 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지, 어울려도 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나를 처음 본 사람들도 ‘몇 번 나오다 말겠지’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고민들이 들었지만 거기에 나간 것을 후회하지 않았고, 수요일이 돌아오자 나도 모르게 수원역 광장으로 발길이 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서울에 집회를 갔을 때(당시는 용산참사 관련 집회)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용산참사 유가족들도 볼 수 있었다. 인터넷 방송으로만 볼 수 있었던 경찰의 모습들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너무나 이해할 수 없었던 내가 모르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고개 숙인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보면서 내가 가진 작을 힘을 보태서 용산참사 유가족들의 한을 푸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촛불을 들겠다고 생각한 날이었다.

그날 이후 수원촛불에 꾸준히 나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회사에 다니는 나로서는 조직 내에서 정해진 역할만 하며 살아왔는데 촛불은 그게 아니었다. 나온 사람 그 누구도 정해진 역할이 없었지만, 촛불을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음향을 설치하고, 패널을 설치하고, 서명 받을 준비를 하고, 촛불다방을 운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문화제 중에도, 끝난 후 정리하는 모습에서도 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자기 역할을 찾아가면서 촛불을 꾸며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조직된 힘은 아니었지만 자발적인 시민의 힘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용산참사 사건만 생각하고 시작한 나였지만 수원촛불에 나오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미디어 법, 4대강 사업, 일제고사, 인권문제 등을 알게 되었고, 정리해고, 비정규직 등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특히 노동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전태일 열사로부터 이어진 많은 노동열사들의 희생과 그 뜻을 이어받은 산자들의 투쟁으로 1960~70년대에 노동자들이 겪던 고통을 현재는 많이 겪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동자로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또한 자본가들과 정부의 극한 이기주의와 폭력에 대한 대응이 아직 많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미래의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을 물려주지 않게 위해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여러 문제들을 촛불을 들면서 배워갔다. 그래서 용산참사 문제가 해결 되었지만(물론 진실을 밝혀야할 문제는 남아있지만) 나는 촛불을 드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삶의 일부가 된 촛불

나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운동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수원촛불과 인연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가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집회현장을 비롯하여, 4대강 이보댐(보) 고공농성 현장, 용산참사 현장, 수원신동 재개발구역, 장애인 이동권 투쟁현장, 쌍용자동차, 캐리어, 유성기업, 한진중공업 파업현장 등을 가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투쟁현장에서 있었지만 누군가의 부모이고, 누군가의 자식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은,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특별한 사람들이 그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너무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내가 그 일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감이 되었다. 내 일 같고, 내 가족일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항상 돌아오는 길이 아쉽기만 했었다.

평생 운동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던 나로서는 이러한 일들을 겪으면서 생각의 많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투쟁현장을 남들보다 많이 가려고 노력했고, 시간이 되는 범위 내에서 어려운 사람들,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수원촛불을 통해서 배운 것들이 내 생각을 많이 바뀌게 했다.

수원촛불은 2008년 5월에 시작되어 특별한 몇 번의 경우만 제외하고 지금까지도 매주 수요일만 되면 수원역광장을 밝힌다. 날씨가 춥거나 더워도, 비나 눈이 오더라도 상관이 없다. 어느덧 일주일의 중심이 수요일로 변했고, 수요일에는 웬만하면 약속을 잡지 않는다. 매주 수요일은 수원촛불과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원촛불에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새로운 사람들이 유입되고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배우고 함께하려 한다. 수원촛불은 투쟁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연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달려간다. 수원촛불과 함께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이제는 그 사람들과의 인연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이제는 촛불을 들지 않고서는 살 수 없고, 수요일에는 꼭 촛불을 들어야만 마음이 편하게 된 내 인생의 일부분이 되었다. 수원촛불은 이 사회에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촛불을 든다. 나는 수원촛불이 좋고, 그곳에 나오는 사람들 모두 너무 맘에 든다. 앞으로 세상이 노동자를 위한세상, 서민들을 위한 세상이 오는 날까지 수원촛불이 계속 되었으면 좋겠고, 수원촛불이 있는 한 나는 수원촛불의 일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노동자로써 그 사람들과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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