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사람

[사람이 사람에게] 스포츠와 인권의 정치

올해가 어떤 해냐고 물어보면 제 주변 사람들은 십중팔구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매우 중요한 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올림픽이 열리는 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맞은 여름방학에 저는 집에 가지 않고 학교 근처 형들이 모여 살던 자취방에 얹혀 지냈습니다. 한 달 정도 노가다를 해서 학비에 조금이나마 보텔 요량이었지요. 마침 애틀랜타 올림픽이 열리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새벽녘에 일어나면 형들은 눈이 벌게진 채로 티브이 앞에 모여 앉아 있었습니다. 빈속에 일을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달랑 김치 하나에 물 말은 밥을 후다닥 해치우는 동안에도 형들은 티브이에서 눈을 뗄 줄 몰랐습니다. 다녀오겠다는 말에 고작 고개만 휙 돌려 “돈 많이 벌어와”라고 할 뿐이었지요. 작가가 되겠다고 늦깎이에 대학에 들어와서 방학 때 집에도 안 내려가고, 그 이름도 유치찬란한 ‘신춘돌격대’를 꾸린 뒤 창작에 열중하겠다고 굳은 맹세를 했던 형들에게 올림픽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올림픽이 정치권력의 선전수단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은 지는 오래되었지요. 프랑스의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2004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1936년 베를린에서 ‘유대인 배척 올림픽’이, 1980년 모스크바에서는 ‘스탈린 올림픽’이, 1988년 서울에서는 ‘경찰 올림픽’이 이뤄졌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피에르 드 쿠베르탱은 나치 독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도록 도와준 덕분에 히틀러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는군요. 사실 쿠베르탱은 백인 우월주의 사상을 가진 인종주의자였으며 “계집애들로 이루어진 올림픽은 흥미 없고 아름답지 않으며 무례한 일”이라고 했던 여성 혐오주의자였다니 올림픽의 타락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도덕적 타락과 함께 급속도로 상업화 되면서 국제평화 증진을 위한 축제가 국제적 비리의 온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이라고 합니다.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여 아테네에서 열릴 것이란 예상을 깨고 미국 애틀랜타가 개최지로 선정된 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의 수뢰 의혹이 불거졌고 이후 나가노, 시드니, 솔트레이크 등이 뇌물 의혹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으니까요.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을 덮고자 전두환 군부가 추진했던 88올림픽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던 젊은이들이 1990년대 날밤을 새우며 태평양 건너의 올림픽에 열광했다는 사실이 왠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불과 한 해 뒤 IMF사태로 이 땅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그렇게 꾸역꾸역 치밀어 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 경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까닭은 뭐니 뭐니 해도 ‘각본 없는 드라마’가 연출되는 예측 불가능성,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공정성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꽤나 어린 시절 스포츠 중계를 보다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승리에 감격해서가 아니라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요. 석유가 꽤나 많이 나온다던 어느 나라와의 축구경기였습니다. 어린 제 눈에도 너무나 편파적인 판정이 계속 되었고 끝내는 한국대표 팀이 아깝게 지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국가대표 간의 경기에서 앵커와 해설자가 노골적으로 한국을 응원하는 게 영 아니꼽고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울먹이며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노라 다짐도 했던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스포츠와 선거는 비슷한 게 참 많습니다. 어쨌거나 승패가 가려진다는 점, 공정해야 한다는 점,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열불나게도 한다는 점, 그리고 언뜻 공정한 룰로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으며, 가끔 이변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본의 높은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 그렇지요.

참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한국 정치판입니다. 그래도 인권탄압 양상하며, 시행하는 정책이며, 일처리하며, 연일 터져 나오는 비리까지 자유당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하니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심이 일어나 구시대적인 집권세력이 교체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물론 이 시대착오적인 권력을 반드시 교체해야겠지만 그런다고 우리네 삶이 근본적으로 변한다거나 세상살이가 눈에 띄게 좋아질 것인가 의문스럽다는 데 새해를 맞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인권운동은 국가보안법이나 사형 폐지,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인권 의제와 관련하여 여론조사 운운하는 것에 반대해왔습니다. 다수결로 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인권이고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는 것이죠. 그렇듯 다수결로 결정짓는, 그것도 승자독식인 한국의 선거제도 아래서 선거를 통해 인권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거나 대대적인 전진을 기대하기란 역시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러하기에 《사람》에서는 정치의 계절이라는 2012년 한 해 동안 정치를 물고 늘어져볼까 합니다. ‘인권의 정치’라는 약간은 낯설고 조금은 무거운 주제입니다. 연중기획의 여는 글 ‘인권의 정치에 대한 단상’에서 정정훈은 “인권은 기존의 ‘합의’에 ‘불일치’를 제기하는 주체의 정치적 실천”이며 “배제된 자들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존의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민주주의’라는 말의 본래 의미에 부합하는 정치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인권의 정치는 “인권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구성하는 과정”이며 “자신이 법의 적용 대상자(subject)이자 입법자인 저자(author)라는 점을 재확인·재규정하는 것”이라 합니다. 나아가 인권(운동)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후 교정이나 비판을 넘어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내부로 들어가 …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다시 구성하는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고, 내재적 긴장과 갈등을 창출하며, ‘내재적 상상력’을 수혈하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다시 구성하는 내재적 비판, 내재적 상상력, 그러한 인권의 역할이 자못 궁금하지 않나요?

꽤 오래 전부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듣고 사실 뜨끔했지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해서요. 연예오락만이 아니라 시사다큐 프로그램까지, 스포츠만이 아니라 정치에서 데모까지 그야말로 재미와 감동이 대세인 듯합니다. 과민반응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이 말이 “팔리지 않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말을 대체하는 이 시대의 또 하나의 강박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의 잣대를 새롭게 만드는 일, 쓸모없음의 존재 가치를 찾는 일이 중요하듯 재미와 감동의 강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으면 그야말로 비인기 종목에서 벗어나기 힘들겠죠. 그렇지만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게임을 즐길 때 비로소 진정한 스포츠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려서 축구하는 걸 무척 좋아했던 저는 주로 인기 없는 포지션을 맡았습니다. 그때는 링커라고 불렀는데 지금으로 치면 미드필더라고 할 수 있지요. 얼마 전까지 국가대표 축구팀을 맡았던 조광래 감독이 일명 ‘컴퓨터 링커’로 불렸습니다. 왜 링커를 좋아했나 생각해보니 최전방 공격수나 최후방 수비수보다 부담은 훨씬 적고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는 자유로움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녀도 별로 티도 안 나는 자리였기에 그랬던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날 경기가 잘 풀리려면 이 수비와 공격을 연결해주는 링커, 그야말로 중원에서 볼을 다퉈야 하는 미드필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영국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이나 이제는 은퇴하여 전설이 된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처럼 쉽게 눈에 띄지는 않지만 그 선수의 부지런함이 경기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이죠.

올해 두 차례의 선거를 통해 정당 의석 분포도가 달라지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결코 인간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평택 대추리, 새만금과 부안,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국가보안법과 차별금지법. 그 시절 수첩을 꺼내보면 지금 정부에게 우리가 너무 야박한 점수를 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어찌 해야 돈이 아니라 인간으로, 개발이 아니라 생명으로, 경쟁이 아니라 교육으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킬 수 있을까요? 어찌 해야 효율성보다 존엄성을 더 높은 가치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공정한 룰만이 아니라 룰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적용 과정까지 개입하고 인권의 가치가 스며들어가게 하는 것, 저는 이 또한 인권의 정치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하기에 지난 2011년 서울에서의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과정, 학생인권조례의 원안 통과를 위한 성소수자들의 시의회에서의 점거는 인권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올해도 인권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인권의 정치에서 사건을 꾸미고, 사건과 사건을 이어주는 믿음직한 링커를 맡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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