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제여, 안녕

50여 년 간 지속된 호주제 폐지 운동은 2003년 5월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찬란한 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후 2년이 지나도록 호주제를 대체할 새로운 신분등록제도가 들어서지 못했다. 2007년 4월 27일, 드디어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고, 호주제 폐지가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악법은 사라졌는가?

호주제, 이별하지 않을 수 없던 법

호주제는 반여성적인 법일 뿐 아니라 반인권적 법이었다. 법률로써, 여성은 혼인 전에는 아버지, 결혼하면 남편, 남편이 사망하면 친가 복적이나 아들이 호주인 호적에 올라야 하는 예속적인 존재로 규정되었다. 남성우월주의를 상징하는 호주제는 양성평등을 저해하고 아들을 선호하는 선택적 낙태를 조장하여 심각한 성비불균형을 초래한 원흉이었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가족이 정상가족이고, 자식은 입양이나 혼인으로 분가하지 않는 한 아버지 호적에 종속되었다.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어머니의 재혼으로 부자간의 성이 달라진 가족은 비정상적인 가족으로 취급되었다. 변화하고 있는 가족의 개념을 소화할 수 없는 호주제는 당연히 시대에 뒤떨어진 법이었다.

또한, 호주를 중심으로 신분을 기록한 ‘호적’은 개인정보의 과다 집적과 노출로 인권침해를 낳았다. 개인은 물론 가족 구성원 모두의 주민등록번호와 결혼, 이혼, 출생, 사망 등 개인정보를 한꺼번에 기재한 것이다. 그 결과, 개인의 신상을 캐기 위해 호적을 들추어내는 개인정보 침해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호주제의 유령은 아직도 우리 곁에

대안적 신분등록제도를 제정하기 위한 노력이 쟁취한 가장 큰 성과는, 1인 1적제의 실현이다. 1인1적제는 말 그대로 개인이 각각 하나의 신분등록표를 갖게 되는 양식으로, 호주 같은 기준인을 정하지 않고 각 개인을 중심으로 신분을 기재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신분증명서를 기본증명·가족관계증명·혼인증명 등 목적별로 분리한 점, 원칙적으로 증명서 교부 대상을 본인과 배우자·직계혈족 등으로 명확히 한 점, 신분 변동사항의 신고를 민원인의 편의에 맞게 개선한 점은 분명히 과거 호주제와 구별된다.

그러나 여전히 ‘가족관계의 등록’이라는 명목에 매달림으로써 호주-가문을 중심으로 국민의 신분을 관리하던 낡은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 각종 증명서에 본적과 마찬가지 개념인 등록기준지와 가족 모두의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도록 하여, 과도한 개인정보 유출에 따른 사고 발생의 가능성을 여전히 남겨두고 있는 점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현재의 신분관계 증명서와 신분 변동사항 증명서를 분리시키지 않아, 결혼, 이혼 등 개인의 신분 변동사항이 불필요하게 노출될 수 있다는 점 역시 새 법이 개인정보 보호에 관한 감수성이 부족함을 보여준다.

주민등록제도, 너 먼저 안녕하면 좋았을 텐데

호주제와 새로운 신분등록제도는 주민등록제도를 연상시킨다. 숫자만 봐도 성별, 연령, 주소 등 많은 것을 노출하는 주민등록번호. 국가가 국민의 신원을 확인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감시하기 위해 열손가락 지문까지 날인하도록 한 전 세계 유일의 신분등록제도. 새로운 신분등록제도 안에서도 여전히 가족의 주민등록번호를 쓰도록 하는 것을 보면서 ‘이것도 폐지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옛날엔 ‘주민등록제도’라는 황당한 게 있었지.” 하며 무용담처럼 말할 수 있는 그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출처: 웹진Ac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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