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ActOn] 느리게 달리는 자전거

디디가 소개하는 지각생 http://blog.jinbo.net/h2dj

나는 뭘 하고 싶다거나, 어디 뭐 재밌는 거 없냐거나, 뭐가 열나 짜증이었다거나, 뭐가 무지 좋았다거나 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사실 이 말은, 단지 휙휙 지나가는 감각들이 있을 뿐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끔 아,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생각 좀 해보고 싶을 때조차 곧 그냥 술이나 쳐 먹고 놀다 까먹기 마련이다. 그건 그거대로 속 편하다고 자위할 수도 있겠지만, 성찰하지 않는 인간이라니 역시 대 한심. (삐질-) 그래서일까? 나는, 자신과 자신의 욕망에 대해 거듭 묻고, 관계를 곱씹고, 소통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고민하고, 삶을 문제제기하는 이 청년의 블로그가 무척 신선했단 말이닷! 그래서 내가 발견한 몇 가지 지각생.

1. 사랑스러운 바닥정서

너 안경 어딨니...
부러졌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울컥. 뭐가 나오려고 했다.
이리 와볼래 가방은 저기 내려놓고
그때 내가 울었는지 울컥만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울었던 것 같다. 부러진 안경테를 보고, 나를 보고, 가만히 있던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튼튼해 보이는, 그러나 가벼운 안경테를 골랐다. 그리고는 내 부러진 안경테를 임시로 연결해놓고는
내일 다시 와보렴 -
- 정치적 인간, 20061112

신문을 배달하다가가 철퍼덕 넘어져서 안경은 부러지고, 신문은 다 젖고. 아무튼 상상만 해도 초비참한 어느 비 오던 날 저녁 뜻밖에 마주친 (평소 까칠해보이던) 안경점 주인의 친절. 이 경험이 그에겐 세계에 대한 시각 같은 걸 구축하게 된 원체험인 셈이라고 지각생은 말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 글을 읽을 때 살짝 감동 먹었었다. 자칫 낭만적으로 퇴고하거나 아님 그냥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담담히 바라보고,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필터로 만든 지각생이란 사람이 급 사랑스러웠달까.

소통이 무언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관계 안으로 뛰어들고, 삶이 공허하다고 말하지만 삶이 선사한 선물을 기억하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삶의 고통을 직시하기. 그러나 그 안에 여전히 존재하는 소중한 것들을 찾아내고, 복원하기. 한 없이 가벼워지는 소비자본주의적 삶에서 그가 갖고 있는 이런 정서를 ‘바닥정서’라 부른다면. 흠흠 이봐, 지각생! 당신의 바닥정서를 좀 더 사랑해주라구!

2. 끈덕진 소통과 공유의 욕망

이름을 ‘꼬뮨터’라고 지었습니다. computer -> communter, 그럴듯하죠? 한글로 써 놓고 보니 “꼬뮨” + “터” 이것도 그럴듯하군요. 사람들이 잘 지었다고 합니다. 캬캬 지난주에 맞은 찬바람에도 쓰러지지 않고 이번 주에도 할 건데요, 시간을 토요일로 옮겼습니다. 그게 좋겠다는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저녁엔 그대로 스페인어 공부 모임에 합류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 컴 고치기도 좋고, 프로그램 다루기도 좋고, 뭔가에 대해 스터디도 괜찮고 그런데, 중요한 점은 “누가 해 주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으로 갈 거라는 겁니다. 이번 한 번 누군가의 노동력을 헌납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 꼬뮨터, 20061201

작년엔가 [불편한 진실]을 보면서 가장 감동했던 지점은,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할 때까지 말하고 또 말하고 또 말하는 엘 고어의 성실함이었다. 멋진 말을 한 번 하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간지도 난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바뀔 때까지, 아니 적어도 그 문제를 인식할 때까지 지치지 않고 거듭 얘기하는 건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보통신노동자 지각생에겐 바로 그 성실함이 있다. 게다가 그 성실함은 엘 고어의 계몽보다 백배나 훌륭한데, 그건 꼬뮨터를 만들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나누고, 풀로그의 매뉴얼을 직접 제작해 올리고,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해 거듭 얘기할 때 지각생이 원하는 게 대중을 계몽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 공유하는 즐거움이기 때문!

3. 즐거움을 훈련하기

처음으로 가까이서 살사 춤을 보았을 때 그 뜨거움과 자유로움에 압도되어 버렸다. 처음엔 얼굴이 화끈거렸지.. 나는 춤이 좋다. 출 줄 아는 춤은 없지만, 흥겨운 음악에 맞춰 어깨라도 들썩들썩, 사람들 속에서 몸을 흔드는 게 좋다. 언젠가 남미에 갈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춤부터 배울 거야.
- 살사 070428

홍드릭스가 MWTV 2주년 행사에서 함께 기타를 연주하자고 제안했을 때. 극구 사양했던 지각생은 그 다음날인가 나는 왜 하고 싶은 걸 미루고 어쩌고 하는 자학적인 포스팅을 했다. ㅋ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해야 할 것들이 있었을 뿐, 내 생각에 지각생은 아주 훌륭하게 자신의 생활을 즐거움으로 채울 뿐 아니라 계속 새로운 감각을 훈련하고 실험하는 사람이다. 일테면 자전거를 타는 지각생에게 모든 이동은 정말로 자전거면 충분하다! (아 -_- 나는 언제 저 경지에 이르나.) 지각생이 SF 소설에 꽂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문동 방엔 작은 SF 도서관이 생겼다. 자신의 일을 재미없게 만드는 사람들에겐 ‘난 도구가 아니야!’라고 버럭! 쏘울의 힘으로 일격을 가한다. ㅋ

처음 살사바에 가면 사람들은 대체로 뻘쭘해 하며 안절부절 못하기 마련. 하지만 지각생은? 오오! 불타는 눈빛. 이미 흔들거리는 골반! 그는 바로 살사의 리듬에 몸을 맡겨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춤을 추기 위해선 ‘레슨’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몸을 흔드는 지각생. 당신은 이미 춤을 추고 있단 말이지!

4. 귀여워

윽. 나 왜이리 귀엽니 -_- 겉늙어가지고, 머리속엔 올드 텍스트만 들어차갖고. 흠. 자기 비하도 하지 말자. 뭐 그럴 수도 있지. 그게 내 매력이지. 10가지 살짝 부족한 점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갖고 있는 100가지, 음. 아니 딱 10가지의 좋은 점을 잘 발현시키자. 자, 일단은 지금 나를 쪼그라들게 하는 것과 하나하나 마주보자. 그리고 웃어주자. ㅎㅎ 이게 내 스타일이다.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됐군.
- 나는 귀엽다, 20060905

하하하하- 귀여워라. 열나 자신에 대해 곱씹다가 마구마구 자기비하에 빠지다가 갑자기 원기회복하는 지각생은 귀엽다. 한강에서 자전거 타고 벤치에 앉아 책을 읽으며, 오호, 좀 멋진데? 라고 생각하는 거 귀엽다. 담번 원고는 지각생이 써야한다고 말했더니 뭐여! 미리 물어보지도 않고! 라며 까칠-_-하게 굴다가 그..그래도 잘 소개해줘. orz 라며 바로 무릎을 꿇을 때, 귀엽다. 뭐 물론 내가 발견한 지각생은 수많은 지각생 중 단 몇 가지에 불과하겠지. 앞으로도 귀여운 변신들을 기대하겠어.

PS:
지각생은 스스로가 늦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초조하고, 혼자 뒤쳐진 것 같다는 생각에 외롭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또 안다. 느리게 가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세계. 자동차로는 결코 발견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각생은 느리게 가는 자전거.

출처: 웹진ActOn
덧붙이는 말

디디 : 블로거. http://blog.jinbo.net/di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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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 꼬뮨터 , SF , 정보통신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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