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내가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09년 8호 ③

 

“내가 즐겁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문화/과학』60호 발간 기념 심포지엄(‘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 리뷰

 

최선혜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1992년부터 무려 18년 동안 한국사회 진보운동의 이론적, 실천적 폭과 깊이를 넓히고 다진 『문화/과학』이 60호 발간을 맞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9년 12월 2일(화) 서강대학교 다산관에서 ‘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을 주제로 60호 발간 기념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이라는 주제와 처음 맞닥뜨렸을 때 나는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즐거운’ 이라는 단어와 ‘혁명과 주체형성’의 조합에 ‘과연?’이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혁명과 주체형성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과연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즐거운 혁명을 이뤄낼 수 있을까? 이날의 심포지엄 역시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심포지엄은 『문화/과학』 60호에 글을 실은 필자들의 짧은 발표와 이에 대한 토론자와 청중들의 질문과 답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희종(서울대 교수)과 이명원(문학평론가)은 각각 과학과 문학이 혁명을 위해 내포한 의미와 역할을 역설했다. 우희종 교수는 “즐거운 과학기술의 달콤한 유혹”을 통해 겁 없이 질주하고 있는 과학기술 발전의 폐해를 지적하고, 식민지적 과학의식을 버리고 과학자 내부의 반성과 성찰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이명원은 “회상과 혁명”에서 혁명을 위한 문학의 역할을 조명했다. 그는 기억의 근거로서 문학이 삭제되고 있는 현실에서, 문학은 기억해야 할 특정 장면을 기억으로 복귀시켜 과거의 틈을 확장하고 혁명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발표에 나선 박영균(서울시립대 교수)와 심광현(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혁명을 위한 전략으로 현 사회구조의 변화와 새로운 주체형성을 강조했다. 박영균 교수는 “구성과 연대의 정치학: 주체형성과 헤게모니 전략을 위한 제언”에서 사회화된 노동과 생산수단을 장악한 경제 권력이라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 구성의 정치학과 주체형성이 사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꼬뮌을 형성하여 새로운 삶의 양식과 공동체를 만들고, 마르크스식의 인권의 재독해를 통한 헤게모니의 획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심광현 교수는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교육적 실험”에서 자본주의에 대항할 생태적 문화사회에 도달하기 위해서 생산양식의 변화와 새로운 주체형태의 창조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개인에게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인식하고 체화하기 위한 인문학, 철학, 예술 ‘하기’ 훈련과 ‘어소시에이션’을 통한 통합적 교육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동연 교수는 “‘문화적 다중’의 출현과 대안문화행동”을 통해 문화정치로의 이행을 내재화한 문화적 다중(multitude)의 출현을 말했다. ‘87년 넥타이부대-02년 붉은악마-08년 촛불시위대’로 이어지는 문화적 다중을 설명하고, 다중으로서의 촛불주체들이 탈중심적이면서, 자율적이고 다성적 정체성을 갖고 있음에도 실체성이 부족하므로 다중을 넘어선 연대와 꼬뮌의 형성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토론으로 나선 서동진(계원조형예술대 교수)은 새로운 주체라고 불리우는 다중은 여전히 부족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이지 않다고 반박하며, 오히려 혁명을 꿈꾸는 보편적 주체의 출현을 강조했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도 활발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한 청중은 “주체형성을 위한 자기교육에 공감하지만 엘리트가 아닌 보통사람들은 이에 대한 인식과 훈련이 쉽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다른 청중이 발표자와 토론자에게 “즐거운 혁명을 위해 노력하시는데 과연 즐거우신가?”라고 질문을 던진 것은 어쩌면 토론회의 핵심을 건드린 건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과정에 몰입하기 때문에’ 혹은 ‘내 의지대로 일할 수 있어서’ 즐겁다고 답했지만,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막상 즐겁지만은 않다고 말해서 과정의 고단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토론장을 빠져나오며 드는 생각은, ‘혁명의 당위성도 알고 주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의문이었다. 어쩌면 이에 대한 답은 ‘실천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닐까. 혁명을 간절히 바라더라도 내가 변화하지 않으면 세계는 한 치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내 안의 자본주의에 빨간불을 켤 줄 알고, 자연을 살리기 위해 일회용품 덜 쓰고, 나도 모르는 사이 소수자를 ‘호모 사케르’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성찰 등 다양한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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