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나는 어떻게 무소유를 소유할 것인가?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10년 14호 밥보다 문화

 

나는 어떻게 무소유를 소유할 것인가?

 

이용재

(문화사회연구소 회원)

 

우리에게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진 법정 스님이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하셨다. 세상에 한줌 미련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사리조차 수습하지 말라는 말씀과 자신이 남긴 말빚을 다음 생까지 가지고 가시지 않기 위해 쓰신 책의 절판을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께서 남기신 말빚은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회자(膾炙)되고 있고, 책의 절판이 알려지면서 세인들의 관심과 함께 스님의 말빚은 점점 더 쌓여가고 있다.


특히 3월 22일 한 인터넷경매 사이트에서 “무소유”가 20억 원이 넘는 호가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책을 경매에 올린 이유가 책을 읽고자 하는 다른 분을 찾고, 경매 금액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자 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이 간다. 신문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대서특필하고 있지만 혹시 아는가? 정말 “무소유”를 읽고, 20억 원이라는 돈을 이웃을 위해 내놓으려는 진심어린 일인지도 모르지 않는가?


학창시절에 막히는 영어단어를 찾아 사전을 찾아보면, 찾은 단어에 무지개 형광색과 함께 연필에서 볼펜까지, 그것도 모자라서 맑은 하늘에 별들과 돼지꼬리까지 달려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정말 그 단어를 모르고 있었던가? 나의 몸 어느 구석에 숨어있었기에 나는 그 단어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당황을 넘어 허탈로, 허탈을 넘어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기억하고자 애를 쓴 흔적들이 그것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집착으로는 그것을 온전히 나의 것이 만들지 못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는 하나의 경험이 더 있다. 대학에 입학한 그해에 내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NewsWeek 혹은 Time지의 표지를 세상을 향하게 들고서는 한껏 허세를 부리고는 했었다. 그때 난 그 잡지를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이 기회에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소유에 대한 나의 좁은 생각을 밝힐 수 있는 기회마저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못한 것들을 소유하고자 한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된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된 지금의 삶을 소유하기 보다는 아직 나의 것이 되지 않는 내일의 삶을 소유하려고 하고, 이미 남의 것이 되어버린 어제의 삶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자 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것들뿐이다. 더구나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려고 하기에 우리가 그것들을 소유하면 그것들은 왜곡되고, 망쳐진다. 온전히 나의 것인 나의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사랑을 소유하려고 하기에 우리는 서로 의심하고, 상처를 준다. 자연에서 뛰어 놀아야 할 동물들을 소유하려고 하기에 그들의 삶을 빼앗아,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가두어 놓는다. 자식의 삶을 소유하려고 하기에 자식에게 강요하고, 자식을 윽박지르고, 결국에는 서로 상처받게 된다.


온전한 나의 소유는 나의 삶 속에서만 온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받고자 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에게 주는 것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은 경우 일치하지 않는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표지를 세상을 향해 들고 있는 이상 난 그 책을 소유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해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이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이상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 승복을 벗고, 머리를 길러도 스님은 스님으로 남는다. 낡은 가사에 알몸이 드러나도, 가사는 온전히 스님의 것이다. ‘무소유’의 책표지에 닳아 알아 볼 수 없어도 향기로서 나의 몸에 스며든 그것은 그 향기를 맡는 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무소유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이제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자. 남들이 자신에게 주지 않는 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두 손에 꼭 쥐고 있는 돈과 명예는 온전히 그들의 소유가 아니다. 만약 돈의 본성이 돌고 도는 것이라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흘러가 그들의 마음을 살리고, 그들의 생명을 살리도록 한다면 돈은 비로소 온전히 하나의 소유가 된다. 마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린 돈은 흘러나온 것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렇게 돌고 돈다. 나의 내일을 위해 창고에 쌓아둔 곡식은 쥐를 배불릴 뿐이고, 쌓아둔 돈은 갇힌 물처럼 다만 썩을 뿐이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의 소유는 나의 것으로 가두어 두지 않음으로써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나누어 줄 때 비로소 나의 것이 되는 사랑과 신뢰 그리고 좋은 사회에 대한 믿음들처럼 말이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인터넷경매 사이트에서 20억 원이라는 가격은 법정스님의 “무소유” 한권에 붙은 가격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이 아닌 읽고자 하는 다른 이를 위해 내어놓으며, 이웃을 돕고자 한 바로 그 ‘무소유의 소유’에 붙은 가격일 것이라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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