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나누기

나는 부끄러운 한국인이다

문화연대 소식지 "상상나누기" 2010년 18호 밥보다 문화

 

나는 부끄러운 한국인이다
- 건강한 정치성을 향한 성찰

 

오창은

(문학평론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나는 체제 바깥을 상상하는 힘을 가진 작가를 좋아한다. 이러한 부류의 작가는 시대를 앞서간 작가들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철저한 작가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너무도 정확히 알아버렸기에, 시대와 불화하며 체제 바깥을 꿈꾼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가로 나는 신동엽, 김수영, 이문구, 조세희 등을 꼽는다. 

 

그 중 조세희는 생존해 있는 작가이고, 아직도 우리 시대의 모순이 불거지는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체제 바깥을 여행하는 작가의 표상인 조세희는 한때 역작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발표한 후, 극심한 글쓰기의 곤란함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과작(寡作)이며, 소작(少作)인 작가이다.

 

조세희는 1980년대 초반에 쓴 「어린왕자」(『시간여행』, 문학과지성사, 1983.)를 통해 자신의 글쓰기가 어떤 연유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는가를 토로한 적이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차용한 이 작품에서 조세희는 “오랫동안, 찾아오는 말들을 너는 안 될 사정이 있어 안 돼 하며 돌려보내기만 했더니 이제는 모든 말들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 지레 채고 발길을 끊어버렸다”고 했다. 말길이 끊긴 상태에서 작가를 찾아온 이가 어린 왕자다. 어린 왕자는 여기서 일종의 연상이며 상징인데, 그 실제 형상은 이사 도중에 비에 젖은 생텍쥐페리의 책인 「어린 왕자」를 지칭한다.

 

쓰고자 하는 내용은 있는데, 그것을 담아낼 적절한 형식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작가의 고뇌가 「어린 왕자」에 표현되어 있다. 조세희는 체제로부터 배제당한 소수자의 운명을 의미 있게 증언하고자 했다. 하지만, 전두환 시대의 억압적 현실은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감옥에 갇힌 친구’를 통해 시대의 곤란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하며, 정치권력의 폭력에 대한 사유를 시도했다. 체제로부터 배제된 존재, 체제 바깥은 존재, 감옥에 갇힌 존재를 생각하면서 작가는 국민을 억압하는 비윤리적인 국가가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 질문에 대한 작가로서의 고민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무지하고 잔인하고 용렬하고 탐욕적인 사람들 덕택에 어떤 나라가 발전했다면 그것은 물론 좋은 발전일 리가 없다. 어떤 나라에서는 퇴보인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진보가 된다. 나도 이따금 스위스라는 나라에 가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스위스가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을 나는 미국 영화를 통해 알았다. 성공한 나라의 시민들처럼 나도 아름다운 스위스를 여행하며 영화에서만 본 풍경을 직접 사진 찍어 보고 싶다. 그러나 우리 다수의 시민들처럼 나는 스위스를 낙원, 즉 파라다이스로 떠올리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스위스는 낙원이 아니라 스위스인의 긍지를 갖고 《나는 스위스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나라이다.(조세희, 「어린왕자」『시간여행』, 문학과지성사, 1983, 65쪽.)

이 시기 조세희의 고민은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나라’에 가 닿은 것 같다. 물질적 풍요로 넘쳐나고, 사람들의 욕망은 충족되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공허하기만 하다. 그래서 조세희는 건강한 시민의 윤리를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은 억압으로 점철되어 있고, 증언하고자 하는 작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조세희의 「어린왕자」가 발표된 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났지만, 조세희가 원했던 ‘나는 긍지를 가진 한국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아직도 요원한 듯하다. 오히려 나는 스스로를 부끄러운 한국인으로 간주한다.

 

경제적 풍요는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행복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오로지 경제적 풍요만을 지향하는 사회에 ‘인간으로서의 긍지’는 더욱 옅어질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이나, 성장을 중시하며 자연을 수단시 하는 ‘녹색성장’ 담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게다가 ‘천안함 사건’을 빌미로 ‘전쟁에 대한 공포’를 공공연하게 조장하는 정치권력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올바른 정치성을 지닌 시민이라면 험한 상황일수록 ‘전쟁반대’와 ‘평화공존’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생명을 담보로 정치적 보복이나, ‘전쟁불사’를 외치는 위험천만한 구호에 대해 적극적으로 ‘전쟁반대’를 외칠 수 있는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들’의 실천행위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왜곡된 정치성이 한껏 부풀어 오른 상태이다.

 

오로지 한 목소리만 존재하는 사회는 얼마나 불행한가? 고통 받는 이웃에게 공감했다는 이유로, 그 고통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약소자들을 배척하는 사회는 얼마나 야만적인가? 발전과 성장만을 지상의 가치로 삼고, 물질적 행복만을 향해 질주하는 사회는 얼마나 비참하게 긍지를 상실한 나라인가? ‘문화의 물길’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자연의 속살을 헤집으며, 물길을 피 흘리게 하는 ‘4대강 사업’은 얼마나 잔인하고 용렬한가? ‘녹색성장’을 외치면서 ‘전지구적 생태위기’를 수단화하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얼마나 탐욕스러운가? 더구나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의 공포’를 조장하는 정치권력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

 

성장과 경쟁은 한국사회에서 보편적 가치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보편성은 일반성이 아니다. 오히려 보편성은 타자와 구분되는 우리를 가능하게 하는 국가, 언어, 민족, 문화에 안주하는 태도를 초월할 때 가능해진다. 개별적 이익을 넘어서려는 위험을 감수하는 태도 속에서 보편적 가치가 더욱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간적 가치가 아닌, 우리를 벗어나서도 가능한 인간적 가치를 탐구하는 것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태도이다. 이는 비유컨대, 합창단의 일원으로 가담하여 하나의 목소리만 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소리들이 하나의 화음이 될 수 있는 보편적 울림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들은 권력을 향해 ‘표현의 자유’ ‘다른 가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그 자유는 ‘물리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에 국한되지 않고, 시스템을 장악한 권력자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억압’에서의 자유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자본주의 바깥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내면화되어 있다. 경쟁은 숙명인양 간주되고 있으며, 정서적 교감 능력은 무감각인양 딱딱해져 있다. 이러한 ‘정신적 무감각’(로버트 제이 리프튼)의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수성의 혁명적 변화가 기획되어야 한다. 혁명은 세상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태도를 바꾸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시대에 체제 바깥을 상상할 수 있었던 신동엽, 김수영, 이문구, 조세희의 가치가 오히려 더 돋보인다. 더 과감하게 시대와 부딪치려 했던 그들과 같은 존재가 간절하다.

 

우리가 건강하게 정치적이려면,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적 탐구를 멈추지 않는 태도를 지속되어야 한다. 그 민주주의적 가치에는 ‘생명의 귀하게 여기는 문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로를 살리는 ‘상생의 원리’가 깃들어 있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개인의 ‘윤리적 실천의지’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기에 건강한 정치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어야 한다. 바로 그곳에 체제 바깥을 상상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상상나누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