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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호-홈리스 추모제 특별판] 생애기록: 보이지 않는 죽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삶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의 가는 길을 지켰던 위OO님
남대문 쪽방에서 고인을 처음 만났던 활동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던 활동가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하셨다”며 늘 단정한 차림과 예의 바른 모습의 고인을 떠올렸다.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고인은 늘 입원을 앞두고 짐을 싸 놓곤 했다.
남한테 빚 안지고 어떻게든 살아가려 애쓰던 고인은 기초생활수급자였지만, 매번 장기 입원할 때마다 절반으로 줄어드는 생계비를 갖고 퇴원 후 다시 방을 구하는 일 때문에 힘들어 하셨다. 결핵에다 천식까지 있었던 고인은 지난겨울, 숨이 차서 걸음을 못 걸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었다. 뼈 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말라 있던 고인은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거동도 힘겨운 상황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의 가는 길을 지켰던 고인은 정작 자신은 올해 봄, 50대 초반의 나이에 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결핵을 앓던 또 다른 지인도 세상을 등졌다.
돌아가신 고인의 방에 남아 있던 건, 쌀 한 포대와 라면 한 박스, 그리고 옷 몇 가지가 전부였다.

다리 밑에서 죽어가던 동료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오OO님
술통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고인은 대구의 고아원에서 생활하다 10대에 서울로 올라왔다
어릴 때부터 서울역에서 생활했던 고인은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30년 가까운 시간을 거리와 쪽방을 오가며 생활했다.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 왔던 많은 사람들처럼, 당장 돈이 없어 노숙을 하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간질 장애로 고정적인 일을 하기가 어렵게 되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수급자가 되었다.
고인의 동료는 다리 밑에서 죽어가던 에이즈 감염인 동료를 “자기 방에 데려다가 재우고 마지막까지 같이 있던” 모습을 떠올렸다.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낙인 속에서 고립된 채 죽어가던 그 분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건 가족도 국가도 아닌 노숙 동료였다.
동료들은 “수급 받으면 거리의 동료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 챙겼던 사람”으로 고인을 기억했다. 올해 11월, 함께 거리에서 생활하던 동료들이 숨을 쉬지 않던 고인을 발견하고 119를 불렀지만, 벌써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장례도 치루지 못한 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동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자식들한테 피해 안 주고 가는 일이 소원이었던 최OO님
이혼한 아내가 암으로 사망한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노숙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고인은, 늘 불어 다녔던 동료와 을지로와 서울역을 오가며 생활했다.
돌아가시기 전 고인의 생활반경은 희망지원센터와 드림시티, 서울역을 벗어나지 않았다.
서울역 구역사 화단 옆에서 항상 잠을 청하던 고인은 올해 9월 어느 날, 점심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다가 그 뒤로 의식을 잃고 실려가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49재가 끝나고 작은 딸은 서울역 구역사 화단 한 켠, 아버지가 생전에 머물던 그 자리에 술 한 잔을 부었다. 생전에 고인은 “딸들한테 미안하다. 아버지가 돼서 아버지 노릇도 못하고, 손자를 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괴로워했다고 한다. "자식들한테 피해 안 주고 가는 일이 소원"이었던 고인의 바람은 죽어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