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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호-홈리스 노동팀] ‘짤짤이’도 노동이다?!

[홈리스와 노동]은 노동을 중심으로 본 홈리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꼭지


이 글은 지난 6월 12일(일),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홈리스 노동팀 3명과 당사자 2명이 봉천동, 흑석동, 사가정에 위치한 교회 다섯 군데를 돌아다니며 구제금을 받는 과정에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모아진 구제금은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 농성장’에 기부하였습니다.

짤짤이도 노동이다? 걷고, 뛰고, 다시 걷고, 뛰고! 엄청난 육체 노동이다!

짤짤이가 뭐지?

- 짤짤이: 홈리스와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돌며 교회에서 제공하는 현금이나 음식물 등을 지원받는 것을 일컫는 은어. 교회에서 받은 구제금이 주머니에서 ‘짤랑짤랑’거린다고 해서 짤짤이가 되었다는 설도 있음
- 따 당: 구제금을 두 번 받기위한 꼼수를 쓰는 행위. 예시) 구제금을 받은 후 뒤로 가서 다시 줄을 서는 사람에게 “야! 따당 치지마. 너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몫이 줄잖아”
- 꼬 지: 짤짜리와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꼬지는 자리를 잡고 구걸을 하는 행위
- 쌩꼬지: 꼬지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 직접 사람에게 다가가 돈이나 담배를 구걸을 하는 행위
일요일 새벽 6시 20분 봉천역. 김아저씨를 만나기로 했다. 오늘 하루 김아저씨의 ‘짤짤이’에 동행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첫차를 놓쳐 아저씨가 약속시간보다 조금 늦으셨다. 7시 예배에 맞춰가기 위해 우리는 봉천동 고갯길을 뛰다시피 했다. 봉천동은 재개발로 이미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반쯤 부서진 건물들 사이를 지나 꼭대기에 올라서니 다시 내리막길이다. 그런데 마을버스가 다닌다. ‘아, 마을버스가 있는데…’ 하는 생각도 잠시, 마을버스를 탈 수 없는 아저씨의 처지가 떠오른다.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달려 교회에 도착했다. 이미 예배는 시작했다. 큰 교회에 성도들은 100여명쯤 돼 보였고, 그 중 3분의 2는 홈리스들로 보였다. 잘 모르는 찬송가를 몇 곡 부르고, 비몽사몽 떠도는 목사님의 말씀과 마음 편히 졸 수 있는 기도 시간이 지나자 예배가 끝났다. 앞에서 아저씨들이 줄을 서 무언가를 받아 다시 줄지어 교회를 나선다. 교회 밖에서 아저씨가 보여주신 1,000원짜리 지폐 한 장.
봉천동의 교회를 나와 우리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흑석동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들어갈 때 이름을 적으면 입장권 같은 것을 나누어 준다. 이것이 있어야만 나갈 때 돈을 준다고 했다. 김아저씨가 들어가며 당부하신다. “입구에서 이름 적고, 노란색으로 된 거 받아가지고 2층으로 올라와야 돼.” 아저씨의 말을 듣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일반 성도들은 1층으로 들어간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노란색으로 된 표식을 든 아저씨 30여 분이 앉아 계신다. 제법 더웠는데 선풍기만 연신 돌아간다. 1층은 에어컨도 틀어놓은 것 같던데…. 몇 곡의 찬송가, 말씀, 기도 시간이 끝난 뒤 양복을 차려 입은 젊은 청년이 와 노란색 표식을 확인하며 돈을 나누어 준다. 돈을 받은 아저씨의 손이 빠르게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2,000원이다.

짤짤이도 노동이다? 하루 다섯 번의 예배, 엄청난 감정노동이다!
두 번째 교회에서 한 10분쯤을 다시 걸어 다른 교회에 도착했다. 예배 시간은 9시인데 조금 일찍 도착했다. 기다리는 동안 아저씨는 피곤하신지 졸고 계신다. 합창단으로 보이는 성도들이 합창 연습을 한 후, 목사님이 오시면서 예배가 시작됐다. 너무 피곤하다. 목사님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성자의 이야기를 계속 하신다. 잠이 쏟아진다. 그렇다고 대놓고 잘 수도 없고. 그나마 기도라도 길게 하니 다행이다. 눈감고 잘 수라도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악몽이라도 꾸었던 것 같은 졸음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2,000원을 받았다.

그리고 네 번째 교회. 이번에는 좀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사가정역으로 출발. 여기에서는 예배당이 아닌 교회에 딸린 조그만 교육관에서 구제금을 받는 성도들만 따로 모아 예배를 드린다. 목사님이 오시지도 않는다. 무슨 장로인가 하는 사람이 와서 진행을 하고 말씀을 하시는데 찬송가만 들입다 부른다. 간단한 예배가 끝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니 1,000원짜리를 책상 위에다 ‘탁탁탁’ 놓고 간다. 1,000원 배급이 끝나자 식판을 날라다 준다. 이곳에서는 무료급식도 하는 모양이다.

점심식사 후, 다섯 번째 교회. 대부분의 예배가 끝난 시간, 교회에는 이제 사람도 별로 없다. 이곳에서는 따로 아저씨들을 모아 성경공부도 하고 간단한 예배도 드린다. 찬송가를 부르면서 무슨 율동인가를 한다. 대부분 아는 율동인가보다. 눈빛과 표정은 생기가 없으신 듯한데, 팔은 자동적으로 잘만 움직이신다. 진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첫째 날에 빛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참으로 대단한 하나님이신데 김아저씨의 눈빛과 표정에도 생기를 좀 만들어주시지…. 그것까지는 힘드신가 보다. 그렇게 다시 한 시간이 지나니 2,000원이 생겼다.

짤짤이도 노동이다? 시급 약 1,000원. 엄청난 저임금 노동이다!
이렇게 김아저씨와의 하루 동행이 끝났다. 끝나고 나니 8,000원의 돈이 생겼다. 새벽 6시 반부터 시작된 노동은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시급이 채 1,000원이 안 되는 엄청난 저임금 노동이다. 김아저씨에 의하면 오늘은 그래도 일요일이라 나은 편이란다. 평일에는 300원 주는 데도 있고, 500원 주는데도 있단다. 아저씨는 지하철 우대권이라도 뽑을 수 있어서 교통비는 안 들어가니 그나마 나은 것이라 해야 하나? 힘드시지 않느냐는 말에 “이거라도 해야죠”라며 웃으신다. 웃으시는데 왠지 ‘뭘 그런 걸 물어봐야 아느냐!’라며 나무라시는 듯하다.

짤짤이도 노동이다? 차별만 있고 존중은 없는 질 나쁜 노동이다!
누군가 “짤짤이도 노동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참 어이없는 말이라 생각했었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노동이 노동이 되려면 노동으로 인해 무언가 생산이 되어야 한다. 생산은 이윤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 이윤을 노동자가 자본가와 나누어 갖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누가 더 가져가고 덜 가져가고, 혹은 빼앗기고의 고리가 생기긴 하지만 이런 흐름이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노동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여기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아저씨와 짤짤이 하루 동행을 해보니 이것 참 노동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물론 무엇을 생산했느냐라고 하는 질문에는 딱히 할 만한 대답은 없다. 그러나 이른 시간부터 하루 종일 걷고 뛰고 하느라 몸을 쓰니 육체노동이 아니라 할 수가 없고, 꼬박 1시간을 앉아 예배를 드리고 듣기 싫은 말들을 들으며 앉아 있어야 하니 감정 노동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 대가로 돈을 받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 노동이 참으로 고약한 노동이다. 엄청난 저임금에 온갖 차별의 요소는 다 가지고 있다. 구제금을 받는 성도들을 다른 일반 성도들과 공간적으로 분리시킨다거나, 아예 다른 건물에서 따로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하는 말들도 들어보면 가관이다. 천국가는 1등은 부자이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고 꼴찌는 가난하면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이란다. 가난한 사람들 앉혀놓고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돈을 주면 받는 사람 생각해서 봉투에라도 좀 넣어주지 그냥 천 원짜리 낱장으로 덜렁덜렁 준다. 무료급식도 마찬가지다. 왜 숟가락만 주고 젓가락은 안 주나. 오로지 자신들의 편의와 호의(호의인지도 잘은 모르겠다)를 중심에 놓고 모든 것을 세팅해 놓은 느낌이었다. 당사자에 대한 차별만 있고 존중은 없는 아주 질 나쁜 노동이다.

교회에서 구제금을 주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가가 나서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지원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하니 교회라도 나서서 해주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성경에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행인이 강도를 만나 초주검에 이르렀을 때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봐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굴까?

마찬가지로 복지 지원도 ‘불쌍하니까 줄게’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권리로서 최소한의 생계는 보장해야 하지 않을까? 부양의무자가 있네, 없네 같은 걸로 딴지 걸지 말고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게 무언가? ‘그 사람한테 필요한 게 뭘까, 무엇을 받으면 좋아할까?’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않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지원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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