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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뉴스 25호-홈리스인권 아우성] 재일교포 홈리스 지원 활동 후 단상

[홈리스인권-아우성]은 ‘홈리스인권지킴이’활동을 통해 만난 거리 홈리스의 이야기를 나누는 꼭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차 한 잔 드시겠어요?”, “아노, 자파니즈.”

현장활동 중 서울역 지하도 한편에 앉아계시던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이었다. 서울역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다보니 일본인이 관광 후 잠시 쉬고 있는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날 다른 계단에서 종이박스를 깔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우산이 들어 있는지 손잡이가 삐죽 나와 있는 작은 비닐봉투가 곁에 놓여 있었다. 관광객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이상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며 준비해 간 차를 드렸다. 서투르지만 또박또박 “고맙습니다”라고 한국어로 감사의 표현을 하시길래, 대화를 시도했다. 일제강점기 때 온 가족이 일본으로 갔고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태어나 자라왔다. 모친에게 어릴 적 한글을 배웠지만 거의 모른다. 그런 그가 80세 가까이 살던 일본을 떠나 한국에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시설관계자 및 근처 종교인)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 자식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고, 일본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의 눈가는 금세 촉촉해지셨다. 4개월이 넘도록 노숙하는 이 재일교포 할아버지에게 노숙인지원체계는 무관심했음을 확인했다. 한국에서 계속 살아갈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약속한 후 헤어졌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
며칠 후 지방의 한 대형시설에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였다. 노숙인지원기관을 통해 먹고 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시설로 가셨다고 했다. 의식주에 있어선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자유롭지 않은 규율과 계속 일본으로 가라하는 시설 관계자와의 상담이 껄끄러웠다고 한다. 시설을 도망쳐도 금세 발견되어 다시 돌아가게 되자 퇴소요청을 했고, 나를 만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설관계자와도 통화했다. 할아버지가 시설에 적응도 못하시고 외국인이라 지원방법도, 오래 머물 수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했다. 상당히 무책임한 시설의 태도에 언성을 높였다. 관계자에게 할아버지를 서울역으로 모셔다달라고 했더니 행사준비로 바쁘다고 거절했다. 대신 터미널까지 갈 차비는 끊어줄테니 본인이 혼자 지하철만 타고 가면 된다고 했다. 너무 화가 났다. 한국말도, 길도, 지하철 이용방법도 모르는 고령의 재일교포에게, 교통비 한푼없는 거리홈리스에게 서울역까지 혼자 찾아가면 된다니! 단호하게 약속시간까지 직접 모시고 오라고 재차 요구했다.
뜨뜻미지근한 대답을 하던 시설관계자는 결국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앞으로 살아갈 일로 걱정을 하셨고 아무 것도 지원이 안 된다면 거리에서 살다 죽겠노라 힘없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용하실 수 있는 주거지원과 기초생활수급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니 할아버지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지원 이후 전화도, 직접 방문하는 일도 없었다
복지지원을 받기 전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할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소규모의 노인 그룹홈을 알아봤으나 꽉 차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시 희망온돌지원을 신청하기로 하고 한 복지관에 연락을 취했다. 상황을 전하며 주거/생계비 지원이 시급하다고 했다. 그러나 복지관 실무담당자는 노숙인이 신청한 일은 처음이고, 더군다나 재일교포니 복지재단과 상의를 해봐야한다고 했다. 다음날 노숙인시설의 관리번호나 외국인번호가 필요하다고 연락이 왔다. 생계비는 반드시 본인명의 통장으로 입금되어야 하나 할아버지는 통장개설도 안되니 주거비만 지원할 수 있을거라는 대답과 함께. 후다닥 노숙인지원기관에서 이용자확인서를 발급받아 제출했다. 달랑 방에서 잠만 잘 수 없으니 생계비는 현금으로 선지원하면 어떻겠느냐 했지만 안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실무자는 이어 3개월을 지원해야 하지만 할당된 기금이 소진되면 어쩔 수 없다며 주거지원 1개월을 집행했다. 할아버지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아주 작은 고시원 방 한 칸을 얻게 되었다. 복도가 너무 좁아 방문을 다 열수도 없는 공간에, 건물 바로 뒤로는 2분이 멀다하고 전철이 오가는 통에 대화도 묻힐 정도로 소음이 컸다. 이제 생계비도 없이 덩그러니 방안에 틀어박히게 생겼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괜찮다며, 자꾸만 고맙다고만 하셨다. 노인복지관에서는 지원 이후 전화도, 직접 방문하는 일도 없었다.

서류만 주고 요구하는 담당자
이후, 복지지원을 받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고시원에서 계약서를 받았다. 주민센터에서는 다행히 기억하고 계신 본적 덕분에 가족관계등록부를 확인하는 것들이 시간도 단축되고 수월했다. 종로에 있는 영사서비스과를 더듬더듬 찾아가서 영주권을 포기하고 여권실효확인서를 받았다. 주민등록번호를 만들기 위해 사진도 찍고 주민센터로 다시 가서 십지문도 찍었다. 수급신청을 위해 임시발급된 신분증을 갖고 은행에 가서 통장도 만들었다. 고시원에서는 무료임대확인서를 써달라고 하여 다시 주민센터에서 들렀고, 수급신청 서류를 여러 장 받아 작성했다. 그리고 시니어패스카드도 신청해서 받았다. 이 모든 것들을 진행하기 위해선 신청장소를 제대로 알고, 찾아가야 하며, 절차와 서식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 뒤 주어진 서류의 빈칸을 적절하게 채워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서류들은 거의 한글로 되어 있었고, 한국어를 잘 모르던 할아버지는 어디에, 무엇을,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담당자들은 서류만 주고 “작성하시면 됩니다”라고 건조하게 요구만 할 뿐이었다. 신청서식의 수많은 빈 칸을 알아서 써야하고, 더군다나 개인정보 및 서명은 수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작성해야 하는 과정은 한글도 몰라 무슨 뜻인지, 쓰는 것도 어색한 이에게는 진땀 흘리게 하는 과정이었다. 만약 동행하는 활동가가 없었더라면?

탈노숙을 가로막는 장벽들
이번에 이 할아버지를 만나 여러 가지 지원활동을 하면서 온통 복지제공자 중심, 내국인 중심의 지원체계가 탈노숙을 가로막는 장벽이라 생각되었다. 홈리스를 만나는 대부분의 실무자는 상담을 통해 자신의 판단을 기준으로, 당사자에게는 최소한의 정보만 전달한 채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거지원을 요청하는 이에게 혼자서 생활할 수 있겠는가 판단하여 시설이나 병원으로 유도하거나, 자활에 참여하고 한 달 후에 방을 얻으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마저도 재일교포의 경우에는 더 소극적으로 적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가세요, 지원방법이 없어요”라고. 또한 이들의 상황(고령의 한글취약, 지리도 모르고, 교통이용의 어려움, 교통비 없음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서류를 떼어오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정말 형편없었다.
재일교포 홈리스의 경우 같은 상황에 놓인 국내 홈리스에 비해 노숙인지원체계 내 지원을 받거나 복지지원을 받는 방법도 까다롭고, 지원되는 것도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충분하게 또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 따위는 없었다. 가만히 보면 이런 지원제도라는 것은 실질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대다수의 홈리스(고령, 장애, 여성, 무학-글을 모르는)가, 특히 한국말도 잘 못하는 재일교포 홈리스에게는 더더욱 폭력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현재 외국인 홈리스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 그러나 언어가 다를 경우 이들의 욕구와 다른 선택을 강요하는 내국인 중심의 지원제도, 간절한 도움을 필요로하는 홈리스의 입장을 배제하고 지원받으려면 먼저 요구에 응하라고 하는 강압적인 태도는 여전하다. 이렇게 불친절하고 답답한 제도로 노숙이라는 긴급한 위기상황에 놓인 내국인과 더불어 외국인/교포를 탈노숙하도록 지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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