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개념을 융합시킬 수 없다

[양규헌 칼럼] 사회적 합의 의도는 노동자계급의 양보

철학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데 그것이 유물론과 관념론이다. 유물론은 ‘물질이 먼저 존재했고 의식과 사유는 물질로부터 발생한 산물이다’라고 한다. 유물론자들은 세계가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고 세계 속의 다양한 현상 사이에는 인간의 의식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객관적인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상반되는 관념론은 정신적인 것을 모든 세계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정신이 자연에 앞서 혹은 자연으로부터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재하고, 물질이나 자연은 이러한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발생한 산물이라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물질의 영원성을 부정하고, 영원한 정신적인 실체를 가정한다. 본질이 명확히 상이한 유물, 관념론에 대해 혹자들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식의 논리로서 유물론과 관념론이 결합할 수 있을 것처럼 호도하기도 한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화음과 불협화음의 충돌하면 불협화음이 된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음악에 비유해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음악을 구성하는 화성(화음)속에서도 변증법의 징후를 발견한다. 음악은 자연에서 출발했다. 음악의 원리는 자연과학의 원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음의 높낮이는 현의 길이나 울림통의 크기 또는 길이와 관계있다. 이런 원리를 토대로 음의 높이와 계명이 규정된다.

음의 진동수 비율이 조화를 이룰 때 화음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을 때 불협화음이라고 한다. 악기와 악기 간에 화음이 맞지 않을 때 불협화음에서 오는 불편을 경험하게 된다. 그 불편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음감이 있는 경우, 진동수가 조금만 틀려도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음악이 존재론적으로 자연성을 바탕으로 기능하는 것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음악은 다양한 장르가 있으며 개개인의 개성에 따라 선호하는 음악이 있다. 좋아하는 음악이 다르다고 해서 불협화음을 고상한 음악으로 이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악은 창의성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만들어지고(작곡) 변화(편곡)되지만, 화음이라는 기본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가령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노래는 물론이고 밴드의 음향이 조화로운 화음을 내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냈을 때, 관객의 반응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는 앞에서 말한 진동수의 비례배분이라는 자연법칙을 생각할 때 필연적인 귀결이다. 즉, 5음계 음악이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들리며 음을 만들거나(작곡) 따라 부르기도 쉽게 구성된 것은 대중의 반응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협화음 자체가 듣기 괜찮다는 가정은 어불성설이며 화음과 불협이 결합하면 화음과 불협화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음은 불협화음으로 빨려 들어간다.

상이한 것은 상이한 것이지 하나로 결합시킨다고 같은 게 될 수는 없다

조화라는 명분으로 시도되는 다양한 흐름들은 철학과 음악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생활에서도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같은 경제학에서도 현대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계급개념의 유·무에 있으며 정치경제학은 임금노동자와 자본가에 대한 생산관계와 소득의 분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계급대립을 설명한다. 그러나 현대 경제학은 이러한 계급관계를 가계라는 동일한 주체로 통합 시킨 후 무수한 개별적 단위로 쪼개버렸다. 그들이 묘사하는 경제 구조 속에는 더 이상 대립은 없고 조화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본질적 요소가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모아낸다는 것은 시도하고 노력하고 연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본질이 달라지진 않는다. 오히려 각기의 근본적 의미가 상실되며 불협이 고조되어 결국 강한 쪽으로 쏠려감으로써 정치경제학의 정체성을 상실할 위험이 높다.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실제 의도는 노동자계급의 양보

우리가 접하고 있는 노동운동도 같은 현상과 흐름을 쉽게 볼 수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 협력적 노자관계가 대세였던 시기가 있었고 협력적 노자관계를 주창하는 노조는 어용노조로 지칭되었다. 협력적 노자관계의 핵심은 회사가 돈을 많이 벌어야 노동자가 살 수 있다는 절대적 논리가 작동했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회사의 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으로 전락하면서 노동자 권리는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이런 시기를 경과한 노동운동은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대립적 노자관계로 자리 잡았고, 그 자체를 민주노조운동이라고 규정했는데 그 이유는 노동조합은 조직의 성격자체가 투쟁조직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적 노자관계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은 자본에게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간의 경험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노동운동진영에서 다양한 변화들이 시도되고 있다. 노·정대화, 노사정대화가 바로 그것이다. 노동운동 중심조직인 민주노총이 정부와 노동정책을 토론하고 자본가들과 교섭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노동조합의 기능은 경제적 기능과 복지적 기능, 그리고 정치적 기능으로 요약되는데 이 3가지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섭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교섭능력은 절차나 논리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투쟁동력으로 결정 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협력적 노자관계의 핵심은 행복한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 노사협력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며 대립적 노자관계와 협력적 노자관계는 병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근로조건 향상은 대립적 노사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근로자의 생산성 향상에 대한 분배 부분은 협력적 노사관계에서 구현된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상반된 개념을 적절하게 물타기 하는 꼴이며 여기에서 인정하는 대립적 노자관계의 실체는 협력을 기본으로 하는 대립을 의미한다. 나아가 대립적 노사관계를 과격한 운동노선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의 ‘기본권쟁취’라는 시각으로 봐야한다.

노동조합의 성격은 투쟁조직이다

사회적 대화(노사정합의 노선)는 다양한 명분을 내세우며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노력들이 보인다. 이런 현상은 그간의 경험상 민주노총 내부의 균열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적 대화나 노사정합의라는 것은 “합의”에 앞서 의제 자체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적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대화에는 계급적 대립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합의기구에 대한 정치적 배경은 접어둔다고 해도 대화를 통해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은 각각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방안이나 가능성은 오로지 투쟁이다. 투쟁력에 의해 교섭력을 확장하고 그 역량으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쟁점화 시킬 수 있다. 노동조합의 제반 활동과 연대투쟁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직접정치인 거리투쟁을 해 온 것 또한 교섭력 확장과 연관이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은 물론이고 노선조차 불분명한 시기에 사회적 교섭기구를 통한 노동자계급의 요구쟁취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정부가 참여하는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노동자정당이 권력을 잡았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작금의 노사정(사회적)합의 기구가 노동운동의 노선처럼 주장하는 것은 민주노조운동의 노선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노동자 대중의 일상활동과 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계급적 힘이 상실된 교섭으로 현안을 해결하겠다는 발상이다. 투쟁동력이 결여된 상층교섭으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쟁취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것과 다름없다. 계급 간 대립구도를 애써 외면하고 협력적 노자관계의 전환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이 아니라 과거로 돌아간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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