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청춘인 ‘농달 선생’ 조희주, 정년퇴임한다

[인터뷰] 조희주 전교조 해직교사 “정년퇴임 뭐 있나. 내일도 오늘처럼 사는 거지”

전교조 해직교사 조희주 선생이 정년퇴임을 한다. 전교조 설립 이후, 해직교사가 정년퇴임을 맞는 것은 조희주 선생이 처음이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 했더니 웬 인터뷰까지 하느냐”며 손사래를 친다. 인터뷰 직전까지 “나는 너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며 민망해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25년 투쟁 인생을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는 무궁무진했고 두 시간의 인터뷰는 너무 짧았다.

조희주 선생은 세 번의 해직과 두 번의 복직을 거쳤고, 결국 해직 상태에서 정년퇴임을 맞게 됐다. 해직 기간이 길었지만 그는 쉬지 않고 거리로 나갔다. 스물아홉, 처음 교편을 잡았던 청년 교사는 30여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청춘으로 보냈다. 교단에 있을 때는 학생들과, 거리에 있을 때는 대중들과 늘 소통했다. 굵직한 투쟁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농달(농성의 달인)’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세 번의 해직, 두 번의 복직...“현장에서 퇴임하고 싶었는데”
전교조 출범 초기부터 25년간 교육, 사회, 노동운동에 헌신


정년퇴임을 앞둔 심경이 어떠냐고 물으니 “현장에 들어가서 퇴임을 하고 싶었는데…”라며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해직 상태에서 정년퇴임을 맞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했다. 정년퇴임과 함께 전교조 조합원 자격이 사라지는 것도 서운하다. 출범 초기부터 25년을 함께 달려온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었다. “섭섭하지. 출범 초기부터 해 왔는데. 명예 조합원이라고는 하지만 권리와 의무가 없기 때문에 조합원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다가도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금방 농담을 던진다. “그냥 형식적 절차일 뿐인데, 마치 운동권에서 퇴임하는 것 같잖아. 그런 건 아닌데.”

조희주 선생은 1979년, 스물아홉의 나이에 서울 사근초등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다. 엄혹한 시절이었지만 학창시절 내내 특별한 정치적 활동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앞에 나서는 것도 낯설어 집회가 있을 때 가끔 혼자 찾아나가는 식이었다. 민주화운동의 흐름을 뒤에서 지켜보던 그가 사회운동에 첫발을 내딛게 된 시점은 교사가 된 직후였다.

“집안이 야당이라 나도 야당 기질이 있었어. 근데 조직도 없고 그러다 보니 나 혼자 데모에 가끔 나가고 그런 정도였지. 그런데 전교협이 생기고 교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나도 참여를 하게 됐어. 지역 교사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지. 전교협 때도 정권의 탄압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징계할 만 한 건은 없었어. 불법 단체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다가 89년 전교조가 출범했어. 그 때부터 정부가 관계기관대책회의를 꾸려 총체적인 탄압을 시작했어. 부모까지 동원해 탈퇴 각서를 쓰도록 강요하기도 했고. 나는 전교조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자 계급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지”

전교조 출범 직후인 89년 7월, 조희주 선생은 파면 조치 됐다. 파면 이유를 묻자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 때문이지 뭐. 나는 평범한 조합원 이었어”라고 답한다. 정말 단지 ‘평범하기만 한 조합원’이었냐고 재차 묻자 “뭐 전교조 결성 때 한양대에서 선봉대 역할을 하긴 했지만”이라며 웃음을 짓는다. 사실 그가 파면된 이유 중 하나는 ‘전교조 탈퇴 각서’를 쓰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1천 5백 명의 교사들이 해직됐고, 그중 조희주 선생 같이 파면된 초등학교 교사는 150명에 달했다.

“파면된 후 5년 만인 1994년에 복직했어. 김영삼 정부 방침에 의해 파면, 해임된 교사들이 사면복권 됐지. 그런데 명예로운 복직은 아니었어. 정부가 여전히 전교조를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 전교조를 탈퇴한다는 식의 의사표명을 해야 복직이 가능했거든. 그때 전교조 대의원대회에서 논란이 많았어. 나는 이런 식의 복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복직 방침으로 결정됐지. 정부로서는 해직 교사의 복직과 전교조 활동 약화라는 두 가지 성과를 가져간 셈이야. 이에 반발해 당시 복직을 거부했던 교사들도 20~30명 정도 있었어”

조희주 선생은 94년 복직 이후, 다시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 전교조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999년, 전교조는 결성 10년 만에 합법노조의 지위를 갖게 됐다. 당시 조희주 선생은 전교조 서울지부장 선거에 출마했고, 3파전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54.5%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초대 전교조 서울지부장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지부장으로 당선된 그해, 그는 구속됐고 2년 뒤 또 한 번 학교 현장을 떠나게 됐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2000년에 전교조 합법화 후 초대 서울지부장으로 선출됐지. 그때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했어.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단체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단협 이행하라고 여러 번 투쟁을 했지. 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날, 전교조 교사 400~500여 명이 소위 청와대 진격 투쟁을 했어. 교사들이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일시에 기습적으로 뛰기 시작했고, 청와대 총리공관까지 꽤 깊숙이 들어갔지. 경찰에 전원 연행이 됐는데, 김대중이 상을 받는 날이라 그냥 다 풀어줬어. 그래서 그 다음날 다시 정부종합청사 진격투쟁을 했지. 그때는 구속을 하더라고. 나와 당시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이 구속됐지.

구속 중에 전교조 위원장 선거가 있었어. 그때 구속 상태에서 옥중 출마를 했지. 이수호 선본과 함께 경선에 붙었어.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보석으로 석방됐지. 선거는 2% 차이로 졌어. 51% 대 49% 정도였어. 석방된 이후에도 계속 재판을 받았고, 최종적으로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어. 2002년에 자동으로 면직된 셈이지. 대법 최종 판결을 앞두고 발전노조가 파업에 돌입했어. 전교조가 발전노조 파업에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대의원대회에서 조퇴투쟁을 결정했어. 정부는 전교조를 위축시키기 위해 탄압을 했고, 그때 나는 직위해제를 당했지. 해직을 앞두고 있기는 했지만 직위해제까지 당해 더 빨리 현장에서 쫓겨난 셈이야”


정부를 상대로 복직 투쟁을 벌인 끝에, 조희주 선생은 2004년 또 한 번 현장에 복직했다. 하지만 그해, 노무현 탄핵반대 시국선언 기자회견에 참여했다가 또다시 공무원법 등 위반으로 자동 면직이 됐다. 2006년 대법원에서 최종 면직 판결을 받은 뒤로는 다시 교단에 서지 못했다. 정년퇴임까지 꼬박 8년을 ‘해직교사’로 살아온 셈이다. 해직 이야기로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조희주 선생은 또 한 번 농담을 던진다. “내가 민주당 사람들 만나면 은근히 한마디씩 해. 노무현 탄핵 반대하다 해임됐는데, 임기 끝날 때 사면 복권도 안 시켜줬다고.”

여전히 20대인 청년교사, “대중과 함께 싸웠다면 실패한 투쟁 아냐”

조희주 선생은 여전히 청춘처럼 산다. 그는 치열한 투쟁 현장들 속에 한결같이 존재한다. 문득 그의 20대, 열정이 가득했던 햇병아리 교사 시절이 궁금해졌다. “처음 교단에 섰을 때 열정과 사명감이 넘쳐났을 것 같다”고 말하자, “그런 건 별로 없었다”는 무심한 답변이 돌아왔다. 심지어 “나는 거의 6학년만 맡았다. 6학년이 제일 좋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1학년을 한 번 맡은 적이 있는데,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아이들이 하도 엉겨 붙어 감당이 안 됐다는 것이다. 말은 그래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제자들이 있다. 같이 세월을 보내 마흔을 넘긴 중년의 제자들과는 가끔 만나기도 한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처음 부임했을 때는 열정이나 다짐이 별로 없었어. 그런데 하다 보니 사명감이 생기는 거지. 애들이 예뻤어. 89년 처음으로 해직될 때, 우리 반 반장 하던 애가 엄청나게 울더라고. 떠나지 말라고. 복직한 후에는 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학부형도 만났어. 지금도 그 애들과 가끔 연락을 하지.

1981년도인가. 첫 부임지인 사근초등학교에서 2학년 담임을 한 번 맡은 적이 있어. 그런데 학생 중에 간질환자가 있었어. 어떤 선생님도 이 애를 맡으려고 하지 않는 거야. 결국 내가 맡았지. 그 애는 정서불안 같은 것이 있어서 수업 시간이건 쉬는 시간이건 온 학교를 돌아다녔어. 반 친구들 공책도 다 찢어버리고. 도저히 수업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아예 그 애 손을 붙들고 수업을 했어. 내가 이듬해 학교를 떠났는데, 1년 정도 후에 연락이 끊겼어. 나중에 들어보니까 결국 학교를 못 다니고 시설 같은 곳으로 갔다고 하더라고.

사실 각 반 마다 한두 명 씩 정서불안인 학생들이 있었어. 그 애들을 내팽개치거나 나 몰라라 하면 안 되는데, 많은 담임들이 힘드니까 그냥 문제아라고 방치하는 것 같아. 문제아 취급을 하니까 더 문제아가 되고. 학교가 그런 학생들이 잘 생활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지”


교사로서의 사명감도 생기고, 학생들과도 정이 들 무렵 조희주 선생은 교단을 떠났다. 그후 해직자로서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컸다. 그는 “원래부터 어려웠고, 늘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10년 동안 지하 셋방살이를 할 때, 수해로 목까지 물이 차 어린 자녀들을 창문 밖으로 피신시킨 기억은 아직도 아찔하다. 그 과정에서 청년시절 그의 사진은 모조리 유실됐다. 그 이후로는 앨범에 사진도 모으지 않는다고 했다. 고된 생활과 활동에서 도망치고 싶을 법도 한데, 그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투쟁이 끝난 후에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또 다른 투쟁이 이어졌어. 치열하게 투쟁하는 도중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잖아. 특히 맡은 역할이 있는 거니까 책임감도 컸지. 나도 사람인지라 열심히 싸웠는데 성과가 없으면 힘들기는 해. 하지만 실패하는 싸움이라 할지라도 대중들이 현장에서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큰 성과지. 지금까지 승리하는 투쟁이 얼마나 있었겠어. 겉으로는 패배했을지 몰라도, 더 많은 대중들과 만나 함께했다는 것은 실패한 게 아니야”

거리의 교사 조희주, 주변에서는 ‘농달 선생’이란 별명도
“정년퇴임 뭐 있나. 내일도 오늘처럼 사는 거지”


조희주 선생은 1994년 경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자정치운동에 뛰어들었다. 2007년에는 현장 노동자들과 ‘현장실천사회변혁노동자전선(노동전선)’을 창립했다. 2009년부터 6년째 노동전선 대표를 맡고 있다. 이를 시작으로 그의 활동 범위는 용산참사, 강정마을 해군기지 설립 반대 등 사회운동과 쌍용차, 유성기업 등 노동운동 전반으로 넓어졌다. 용산 범대위와 쌍용차 범대위 공동대표도 맡았다. 농성은 일상이 됐고, 20일 가까운 단식도 경험했다. 주변에서 ‘농달’이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그의 농성 경험은 셀 수 없이 많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농성은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안 나. 전교조 일로도 많이 했고, 농성은 해마다 한 번 이상은 했지. 제일 길게 했던 때는 용산이랑 유성 때인가. 거의 매일 사람들이랑 같이 살다시피 했어. 용산, 쌍용차, 유성 등 모두 치열한 투쟁이었어. 용산 때는 집행유예와 보호관찰까지 받았으니까. 연행도 많이 되고 벌금도 많이 냈어. 단식은 많이 안 했어. 내가 단식투쟁에 반대하는 사람이라. 용산 때 15일 정도 했던 것 같고, 쌍용차 투쟁 때 20일 정도 했지”

그는 가장 기억나는 투쟁으로 상문고등학교 민주화 투쟁을 꼽았다. 당시 그가 전교조 서울지부장을 역임할 당시였다. 투쟁의 경험이 없었던 상문고 교사들은 교원단체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외면을 당했고, 결국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전교조 서울지부 사무실이었다.

“상문고 교사들이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내가 ‘지금 우리 전교조는 힘이 없다. 그래서 해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그러나 교사들이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하면, 나는 구속을 각오하고 함께 싸우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교사들이 전교조에 가입하겠대. 그래서 내가 그것도 말렸어. 지금은 전교조 가입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 교사들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길래 넌지시 ‘교육청 앞에서 농성을 하는 방법이 있다. 내부적으로 논의를 해 보라’하고 돌려보냈어. 그러니까 교사들이 논의해서 농성을 시작하더라고.

그러고 나서 ‘지금 상황으로는 돌파구를 찾기 어렵다. 투쟁 수위를 조금 높여야 할 것 같은데, 교육청을 점거해 보는 게 어떻겠나. 내부적으로 논의를 해 보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또 교사들이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논쟁을 하더라고. 결국에는 교육청을 점거했지. 교육청 점거 농성 당시 영하 13도의 추운 겨울이었거든. 교육청 앞 기자회견이 있어서 농성하던 선생님들과 잠깐 나왔는데 경찰이 갑자기 에워싸고 들여보내주질 않는 거야. 내가 화가 나서 웃통을 벗어버렸어. 웃통 벗고 30분을 시위했더니 그제야 경찰이 빠졌어. 상문고 투쟁은 교사들이 투쟁의 주체가 됐고, 결과도 좋았어. 투쟁 끝나고 상문고 교사 50여 명이 집단으로 전교조에 가입하더라고”


그는 여러 교육운동과 투쟁들을 통해 일정의 성과도 경험했지만, 전반적인 교육 시스템의 변화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도 갖고 있었다. 특히 대학의 서열화와 경쟁교육을 낳는 입시문제는 과감히 ‘폐지해야 할 것’으로 꼽았다. 조희주 선생은 “훌륭한 활동가 한 명이 학교 현장을 변화시킨다고 해도, 그가 떠나면 그 학교는 예전으로 돌아간다”며 “전체 교육시스템이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교조는 무엇보다 교육제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활동의 중심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운동이 조금 더 계급 운동을 지향해야 한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들어온 뒤,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졌지만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안주하려는 경향이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투쟁을 해야 하는 시기인데, 전투적인 노조들조차 자기 사업장에 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그런 면에서 전체 운동이 공동으로 연대하는 흐름은 약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계속 싸우고 투쟁해 노동조건 등은 바꿔낼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이윤만을 추구하는 탐욕의 자본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사람 중심의 사회는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거든. 민주노총을 포함해 노동자들이 변혁적, 계급적인 관점에서 거대 자본에 맞서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만들어가야 사람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봐”

인터뷰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지자 조희주 선생은 “회고록을 쓸 생각이냐”며 면박을 줬다. 서둘러 마지막 질문으로 정년퇴임 이후 계획을 묻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라며 의아해 한다. 30년 가까이 어제 같은 오늘을 살고 있는 ‘청년 농달 선생’의 입장으로서는 의아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퇴임 후에 어떡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뭘 어떡해.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거지. 퇴임이냐 아니냐의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닌데 살던 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어? 퇴임도 그냥 하나의 절차일 뿐이잖아. 그래도 계획이나 구상이라기보다 바람 정도를 이야기 해 본다면, 전국을 좀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싶어. 조직을 위해서 돌아다니는 게 아닌 그냥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거. 그리고 소소하게는 텃밭도 가꾸고 싶고, 악기도 하나 배우고 싶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는 29일, 서울 대학로 노들야학 4층 교육관에서 어제 같은 오늘을 사는 ‘청년 조희주 선생’의 정년퇴임 기념식이 열린다. 그동안 조희주 선생과 함께 같은 길을 걸어왔던 교사와 노동자, 활동가들이 만든 자리다. 조희주 선생은 주최 측에 거듭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뭘 이런 걸 하느냐”, “그렇다면 토크쇼에서 나는 빼 달라”고 호소하지만, 사람들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행사는 6시 30분부터 시작되며, 1부 ‘조쌤이 걸어온 길’ 토크쇼와 2부 ‘처음처럼’ 문화 공연 등이 이어질 예정이다.

태그

조희주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윤지연 기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후배

    존경합니다 선배님

  • 농달

    농달선생에서 빵터졌네요‥^^ 부디 건강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