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에 대한 슬픈 오마주

[워커스 24호/이슈] 시신탈취, 강제부검의 오랜 역사

백남기 농민의 시간

“손대지 마라.” 고 백남기 농민 가족의 입장은 분명하다. 사인이 명백하고 증거가 확실한 만큼 부검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경찰의 직사 물대포로 숨을 거둔 고인을 다시 경찰의 손에 맡길 수 없다고도 했다. 사망 원인을 규명하는 데 필요한 것은 부검이 아닌 특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한결같다. 죽음의 이유를 밝히려면 부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는 서울대병원이 작성한 사망진단서다. 병원에 이송될 때 ‘지주막하 출혈’로 기록됐지만 주치의는 ‘급성심부전으로 인한 심정지사’로 사망원인을 밝혔다는 것. 사인이 변한 만큼 논란이 되는 부분에 대해 법의학적 소견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동조한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원인에 새로운 인물도 등장시켰다.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에서 말하던 ‘빨간 우의 가격설’이다. “피해자(백남기 씨)가 위 직사살수에 맞고 넘어진 직후 피해자를 구조하려던 빨간색 우의 착용자가 넘어지면서 피해자를 충격한 사실이 있어 피해자의 의식불명 등 상해 결과에 영향을 미친 원인행위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검찰이 의무기록 등에 대한 압수수색 검증 영장을 청구하며 밝힌 이유다. 경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빨간 우의는 민주노총 조합원’이라고 발표했다.

유족은 애가 탄다. 수사기관의 부검이 ‘빨간 우의’의 범행을 염두에 둔 것이라며 부검 집행 시도를 중단하라는 의견서를 검찰과 경찰 등에 제출했다. 부검 영장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고, 영장 효력정지 가처분도 신청했다. 부검 영장 전문 공개와 사과, 책임자 처벌 없이는 경찰을 만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경찰은 끈질겼다. 부검 관련 협의를 하자며 지난 23일 유족들을 6번째 찾아왔다. 명분 쌓기 용 방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고인의 몸을 내어줄 수 없는 유족과 시민도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모였다. 이들은 경찰의 ‘강제 집행’에 대비하기 위해 지킴이단을 만들었다. 과연 백남기 농민은 ‘시신탈취’의 역사에서 비켜날 수 있을까. 부검을 둘러싼 야만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시신 탈취, 강제 부검 사건의 중심에는 늘 공권력이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는 언제나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었다. 국가는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은폐하려 했다. 이런 엽기적 사건들은 50여 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져 왔다. 독재 정권도, 민주 정부도 국가 폭력과 은폐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워커스》는 1960년부터 2014년까지, 공권력이 시신을 탈취하거나 강제부검을 시도한 15건(20명)의 사건을 취합했다. 조사결과 피해자들의 직업군은 노동자, 학생, 장애노점상, 세입자 등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은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거나 정부, 자본에 맞선 투쟁에 가담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망 이유는 공권력에 의한 폭력, 분신, 의문사 등이다.

국가폭력 사망자 유족들이 공권력의 부검을 막아서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 역대 시신탈취, 강제부검 사건에서 정권이 자신들의 폭력 혐의를 인정한 적은 단 한 건도 없다. 오히려 공권력은 사인을 왜곡하거나 투쟁을 진압하는 구실로 부검을 활용해 왔다. 암울한 것은, 가해 정권이 물러난다 한들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상규명의 ‘골든타임’을 놓쳐버린 사건들이 남긴 ‘다잉 메시지’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져 갔다.

20년 전의 시그널,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

1995년 11월 28일. 폭력적 노점 단속에 항의하며 망루에 올랐던 장애 노점상 이덕인 씨가 인천 앞바다에 사체로 떠올랐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있었고, 양손은 포승줄로 결박돼 있었다. 경찰이 영안실로 몰려와 시신을 탈취했다. 유족 동의 없는 강제부검이 이뤄졌다. 부검 결과는 익사.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했지만 사건은 의문사로 남았다.

“맞아 죽은 게 확실해요. 시신에 온통 멍이 들어 있었고, 눈두덩이도 엉망이었어요. 때려죽였다는 게 들통날까봐 시신을 도둑질해 갈가리 찢어 놓은 거죠.” 이덕인 열사의 부친은 아직도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눈앞에서 진실을 도둑맞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부친은 경찰이 밝힌 사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가 막힌다. “물에 빠져 죽었대요. 연안부두로 헤엄치다가 지쳐서 죽은 뒤 떠밀려 온 거라고 했어요. 죽어서는 멍이 들질 않잖아요. 근데 시신에 있던 그 많은 멍에 대해서는 경찰이 설명을 안 했어요.”

1991년 5월 6일.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씨가 병원에서 사망했다. 노조 활동을 하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안기부(현재 국가정보원)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의문의 남성이 그의 병실을 찾았던 날, 그는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망 이튿날, 경찰 1천여 명이 영안실 벽을 뚫고 그의 시신을 탈취했다. 경찰에서 밝힌 사인은 투신자살. 하지만 그가 뛰어내렸다던 옥상 문은 쇠창살과 열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풀리지 않는 의혹이 너무도 많았지만, 그 의혹들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사’라는 망령이 돼 떠돌 뿐이다

.“정부와 회사는 박창수 위원장 당선 후 노조를 강성노조로 낙인찍었습니다. 안기부 직원이 노조를 내사하고, 영도경찰서, 영도구청, 부산시청, 부산 안기부가 공동으로 노조 활동을 감시했고요. 수감된 박창수 위원장에게도 치밀하게 탈퇴를 종용했어요. 조합원들은 박창수 위원장이 안기부 공작에 의해 살해됐다는 의문을 제기해 왔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으로 활동하며 박창수 열사의 죽음을 밝히려 했던 박성호 한진중공업 조합원의 말이다.

1986년 신호수 도화가스 노동자 사망사건도 이와 유사하다. 신호수 씨는 형사들에게 연행된 후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부검과 시신 가매장을 마친 후에야 유족에게 이를 통보했다. 사건은 자살에 의한 변사사건으로 왜곡됐다.

1991년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한 성균관대생 김귀정 씨의 경우도 숱한 충돌이 발생했다. 경찰이 병원 영안실 벽을 부수고 시신을 탈취하려 했지만 학생들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후 유족과 합의 하에 부검을 했지만, 경찰은 ‘강제 진압에 따른 사망’을 인정하지 않았다.

2009년 강제철거에 반대해 망루에 올랐다 경찰특공대의 진압과정에서 철거민 5명이 화재로 숨진 용산참사에서도 경찰은 유족 동의 없이 시신 탈취 및 부검을 강행했다. 이원호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은 “다른 사망원인이 나올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 방지하기 위해 급히 부검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며 “사인 조작 여부는 유족이나 운동진영이 밝혀내기 쉽지 않다. 계속 의혹만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들 5인의 죽음을 둘러싼 석연찮은 의혹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다.

시신을 둘러싼 또 다른 비밀

시신탈취의 목적은 사인조작 만이 아니다. 의문사뿐 아니라, 열사의 분신사망 같은 사건에서도 시신탈취가 비일비재했다. 경찰의 목적은 조기에 시신을 수습해 버리는 것. 즉 열사 투쟁의 확대를 조기에 진압하려는 것에 있다.

  사진/정운 기자

1986년과 1987년에 분신한 박영진, 표정두 노동열사 사건에서 경찰은 발 빠르게 시신을 탈취했다. 그리고 증거를 인멸하듯 시신을 화장한 후 야산에 뿌렸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 사건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시신탈취가 이뤄졌다. 수천 명의 노동자, 재야인사들의 장례 행렬 도중 갑자기 트럭과 무장경찰들이 덮쳐 시신을 탈취해갔다.

박응수(1987년), 이영일(1990년), 손석용(1991년), 최정환(1995년) 열사 모두 분신으로 사망했지만, 경찰은 영안실을 침탈하거나 시신 운구 행렬을 덮치는 방식으로 시신을 탈취했다.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장애노점상 최정환 열사 사망 후 노동, 빈민, 청년, 장애인 단체들이 모여 장례 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시신을 강남병원에서 학교로 운반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강제로 시신을 탈취했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95년 발생했던 두 건의 시신침탈을 계기로 문민정부의 본질이 드러났다고 회상했다.“당시 김영삼 정권의 지지율이 굉장히 높았던 때입니다. 군사독재에서 문민정부로 바뀌었다는 기대감이 컸던 때였죠. 사회운동진영 내에서도 군사독재 때의 과격투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고요. 그런데 문민정부에서도 최정환, 이덕인 열사 시신 침탈 사건이 일어났어요. 빈민, 약자들에 대한 태도가 독재정권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가장 최근의 시신탈취 사건으로 기록된 것은 2014년 발생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염호석 씨의 경우다.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염호석 열사가 자결한 다음날, 경찰 300명이 장례식장에 진입해 시신을 탈취했다. 라두식 삼성전자서비스지회장은 “보통 시신이 없는 상태에서 투쟁하기 힘들다. 경찰에서는 시신을 탈취해 장례를 치러버리면 투쟁이 분산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신 탈취 후에도 유골함을 둘러싼 탈취 논란이 일었다. 조합원들은 아직까지 염호석 열사가 어디에 안치돼 있는지 알지 못한다. 라두식 지회장은 “화장장에서도 경찰들이 밀어붙여 유골함을 가지고 나갔다”며 “친부의 말로는 정동진에 유해를 뿌렸다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달랐나

“군사독재 때나 있던 일 아니냐.” 시신탈취, 강제부검 취재 과정에서 관계자들이 가장 많이 털어놓은 말이다. 실제로 1995년 이덕인 열사 강제부검 이후 2009년 용산참사까지, 약 15년간 시신 탈취 등 경찰의 노골적인 만행은 잠시 자취를 감췄다. 소위 ‘민주정부’가 들어선 시기였다. 하지만 ‘시신탈취’나 ‘강제부검’같이 극단적 행위만 이미지화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국가폭력은 존재했고, 국가폭력 희생자에 대한 사인 왜곡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11월 15일, 전국농민대회에서 두 명의 농민이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사망했다. 당시 사망한 전용철 농민열사는 집회 당시, 경찰에 머리와 오른쪽 눈, 가슴을 구타당했다. 그리고 17일 뇌출혈로 쓰러져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24일 새벽 사망했다. 경찰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집 앞에서 넘어져 머리 부상을 당했다’는 것이 경찰의 주장이었다. 결국 부검이 진행됐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는 ‘넘어지며 머리 뒤쪽에 손상을 입어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하며 경찰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농민과 시민사회, 의료계는 정부가 고인의 사망을 은폐, 조작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농민들은 지금까지도 노무현 정권 시절을 가장 엄혹한 ‘국가폭력’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조병옥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사무총장은 “민주정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경찰 폭력의 수준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노무현 정권 당시에 경찰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했어요.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직접 폭행을 하는 방식이었죠. 사실 차 벽, 물대포보다는 훨씬 엄혹했습니다. 집회 한번 하면 거리에 피가 낭자했으니까요. 농민들이 죽고 나서도 이런 악순환은 반복됐습니다.”

강상구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국가폭력은 민주정부 시절에도 존재했다. 농민 열사 사망 사건을 비롯해 평택 미군기지 강제 진압 등에서도 심각한 국가폭력이 드러났다”며 “폭력의 양상에 있어 더 노골적이고 비열한 방식으로 진행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차이만 존재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는 진실을 밝히지 않을까

국가가 은폐하려 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보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원회)가 발족했다. 의문사위원회 1, 2기의 활동은 노무현 정부 시절까지 총 4년여 간 이어졌다. 의문사위원회가 발족하기까지, 유족들은 20년간 농성과 서명운동, 캠페인 등의 지난한 활동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국가폭력 사건의 흔적들은 그 어떤 사건보다 견고하게 은폐돼 있었다.

1기 의문사위원회가 조사한 83건의 사건 중, 63건(76%)이 진상규명 불능 혹은 기각으로 결정됐다. 2기 의문사위원회 역시 44건 중 33건(75%)을 진상규명 불능, 기각, 각하로 결정했다.박창수, 이덕인 열사 사건의 경우도 용의자 특정은커녕 사망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조사 권한만 가지고는 관련 기관들의 은폐, 정부의 비협조라는 벽을 넘을 수가 없었다. 강상구 전 조사관은 “세월호 특조위의 한계와 똑같다. 수사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며 “동행 명령, 자료 요청도 거부하면 그만이다. 조사만으로 진상을 규명해내기는 어렵다”고 털어놨다.

박창수 열사 사건 조사에도 분명한 한계가 드러났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박성호 전 조사관은 “국가가 개입해 있던 사건이라 주변 인물들이 증인 출석을 회피했다. 국정원과 한진중공업 회사는 비협조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세월이 흘러도,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폭력은 여전히 20년의 세월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뀐다고 국가폭력 사건이 해결되진 않습니다. 진상규명위원회의 법과 권한이 강화되지 않고는, 오히려 정부에게 면죄부를 주는 법이 되고 말아요.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유가족과 단체들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법이 제정됐던 것을요.”

1995년 사망한 이덕인 열사의 경우, 의문사위원회에서 ‘민주화 운동 관련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6년 뒤,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원회는 이 사건을 불인정했다. 유족들은 더 이상 어떤 정부도 믿을 수 없게 됐다. 결국 2009년, 유족들은 이덕인 열사 사건을 스스로 철회하고 직접 아들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한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다.

국가 폭력은 세월이 흐른다고, 정권이 교체된다고 진상이 규명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의 증거들이 왜곡돼 진상규명은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백남기 농민의 유족과 시민사회가 ‘특검도입’과 ‘정부사과’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50여 년간 한국사회를 떠도는 ‘시신탈취’와 ‘강제부검’의 망령을 쫓아 보낼 수 있을까. (워커스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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