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 이런 섹스는 안할래”

[워커스] 코르셋 벗기

[출처: 사계]

몇 년 전 꽤 오랫동안 비폭력대화(NVC)를 공부하고 꾸준히 연습한 적이 있다. 비폭력대화란 ‘부드럽고 친절하게 말하기’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우연히 워크샵에 참여해서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공식’이라는 걸 알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비폭력대화의 공식은 아주 간단했다. 관찰-느낌-욕구-부탁. 예를 들어, ‘네가 대답을 하지 않고 문소리가 쾅 나게 닫고 들어간 걸 보니(관찰), 내가 좀 걱정되고 무서웠어(느낌). 왜냐하면 우리가 소통하는 게 중요했고, 또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안정을 느끼고 싶거든(욕구). 그러니 앞으로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아줄 수 있어?(부탁)’과 같은 식으로 대화를 만들어간다.

여기서 나의 흥미를 확 잡아끈 대목은 느낌-욕구 부분이었다. 불쾌한 느낌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의 표현이다. 욕구가 충족되면 만족스런 느낌이 든다. 예컨대 불안하다면 안전이라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것이고, 부끄럽다면 인정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다. 욕구는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음식 휴식 공기 주거 수면 안정처럼 신체적 생존에 필요한 것들부터 자유 평등 아름다움 성취 인정 이해처럼 사회적 생존에 필요한 것까지 욕구는 그 종류가 다양하고, 또 생명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통적이라는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욕구 목록을 바라보며 나는 ‘성적인 표현’과 ‘스킨십’ 항목에 오래 머물렀다. 인간 생명체인 내게 분명하게 존재하는 이 욕구. 이 욕구는 ‘신체적 생존’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살과 살을 맞대고 싶은 욕구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종(種)을 잇기 위한 우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생명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 스킨십과 성적인 표현. 요즘 말로는 섹슈얼리티가 되겠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욕구가 충족이 되었다면 나는 매번 스킨십을 할 때마다, 성적인 표현을 할 때마다, 그리고 성적인 관계를 맺을 때마다, 즐거움과 기쁨, 만족감을 느껴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나의 섹슈얼리티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붉은 선』이라는 책을 읽었다. 젊고 예쁜 20대 여성의 섹슈얼리티 기록은 자신의 성적인 욕구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탐색하고 충족하는 과정이었는데, 글을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비애감을 느꼈다. 자신의 욕구를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충족하게 되기까지 저자가 경험해야 했던 일들은 데이트폭력과 강간, 성추행, 성노동(성매매를 저자는 이렇게 불렀다)이었다. 그 성관계에서 만족을 얻은 건 상대 남자였을 것이다. 상대방의 만족을 위해서 자신의 욕구를 돌보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것은 저자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흡입섹스’ 또는 ‘접촉섹스’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지금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미투(#metoo)운동을 보면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더러운 욕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참담했다. 남과 여는 똑같이 성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인간 종(種)이다. 왜 남자는 성적인 욕구를 이해나 상호존중, 배려보다 더 우위에 놓고, 여자는 상대방의 욕구를 배려 또는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뒤로 밀쳐두게 되었을까. 일 년여 전, 지역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정희진 씨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용어도 한 쪽의 입장에서 정해졌다며 대표적으로 ‘삽입섹스’를 들었다. 삽입의 주체는 삽입이 가능한 성기를 가진 쪽이다. 삽입할 것이 없는 쪽은 ‘삽입을 당하는 것’이며, 따라서 ‘삽입섹스’는 한쪽의 섹슈얼리티를 옹호하는 용어로, 삽입을 당하는 쪽에서는 ‘흡입섹스’ 또는 ‘접촉섹스’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성관계 도중 삽입(혹은 흡입?)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상대방의 욕구를 배려하여 ‘그만 하자’고 말하지 못했던 여러 장면이 떠올랐다. 그 결과 상대방의 성적인 욕구는 충족이 되었을 테지만, 나는 미완의 만족감을 느끼거나 때로 물리적인 고통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 그 때 나의 ‘배려’ 욕구는 충족되었는가? 아니다. 그 때 충족된 것은 배려와 이해 존중이 아니라 오히려 ‘안전’이었다. 나의 성적인 욕구를 뒤로 밀치고, 고통을 담보해야 얻을 수 있었던 관계의 안전.

비폭력대화의 마지막은 ‘부탁’이다. ‘부탁’이므로 상대방은 자유롭게 승낙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만약 거절을 당했을 때 기분이 나쁘다면, 부탁이 아니라 강요이고, 강제로 부탁을 듣게 하는 것은 곧 폭력이다. 정희진 선생의 강의를 듣고 나서 나는 ‘삽입섹스’가 한쪽의 일방적인 성적 만족감을 위한 용어임을 깨달았다. 그러니 나는 그것을 거절할 자유가 있다. 거절했을 때 상대가 기분이 나빴다면, 그것은 곧 강요이자 폭력이었다는 반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서로의 만족을 위한 정중함이므로 나는 나의 욕구를 돌볼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삽입섹스(?)를 하다가,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이 왔을 때 그대로 멈추었다. 그리고 “이제 나 이런 섹스는 안할래”하고 선언했다. 멈추고, 일어서서 한두 걸음 걸었을 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힘과 자유를 느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본 자유에의 감각.

첫 스텝을 떼지 않으면 다음 걸음은 이어질 수 없다. 아마 그 선언은 나의 성적인 표현과 스킨십 욕구의 충족을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스텝이었을 것이다. 안전을 위협당할 두려움을 넘어서기. 그 걸음을 떼고서야 나의 섹슈얼리티를 실천하기 위해 무엇이 가능한지 정중하게 탐색할 수 있고, 나는 그 길을 기꺼이 걸어볼 참이다.[워커스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