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인 열사 19주기, “강산 두 번 변했는데 노점탄압 그대로”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그의 죽음을 밝히지 못하는 사회

혁명, 혁명하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과거가 있을 수 없다.
-이덕인 열사 일기장 중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의 19주기 추모제가 열린 강남대로. 이덕인 열사의 모친 김정자 씨는 19년 전 사망한 아들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의 사진만 보면 눈물을 흘리는 김 씨의 시간은 1995년 11월 28일에 멈춰서 있다. 아직까지 아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이다.


이덕인 열사의 진상규명이 19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듯, 장애인과 노점에 대한 탄압도 19년 전 그대로다. 노점상이었던 이덕인 열사가 철거 용역반의 무자비한 노점단속에 시달렸던 인천지역. 그 곳에서는 하루 전 새벽에도 수백 명의 용역반이 들이닥쳐 대규모 행정대집행이 실시됐다. 이덕인 열사 19주기 추모제가 열린 강남대로 역시 여전히 구청과 용역반의 폭력적 노점단속이 상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19년 째 그의 죽음을 밝히지 못하는 사회
부모는 아직도 진상규명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


‘장애빈민운동가 이덕인 열사 19주기 추모제 준비위원회’는 28일 오후 4시, 강남역 롯데시네마 앞에서 열사 추모제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은 “이덕인 열사의 투쟁은 노점 생존권을 대내외적으로 알려낸 커다란 사건이었다”며 “민주주의는 열사의 피와 혼을 먹고 발전하는 것 같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덕인 열사의 투쟁은 장애빈민운동을 사회 쟁점화 시켰지만, 정작 그의 죽음은 아직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열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밝혀달라며 지금도 국회의사당 앞 차가운 바닥에서 1인 시위를 한다.

모친 김정자 씨는 “덕인이 아버지는 새벽이면 국회의사당 앞으로 나간다. 그 곳에서 쭈그리고 앉아 떨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와서 말을 건네주면 마음이 따뜻해 질 것 같지만, 국회의원들은 본척만척 지나친다. 우리를 사람처럼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다”며 “자식의 사진만 보면 아직도 너무 눈물이 난다. 덕인이가 오라고 하면 어디든 따라가고 싶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덕인 열사 모친 김정자 씨

장애인이자 노점상이었던 이덕인 열사는 1995년 11월 28일, 인천 앞바다에서 사체로 발견됐다. 사망하기 삼일 전, 농성 중이던 망루에서 탈출한 그는 의문의 시신으로 돌아왔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1995년 6월,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한 그는 인천시와 연구수의 무자비한 노점 단속에 시달렸다. 당시 구청은 장애인 22명, 빈민 20여 명이 운영 중인 노점을 철거하겠다며 2억 2천만 원을 들여 1천 5백 여 명의 철거용역직원을 동원했다. 이덕인 열사를 포함한 노점상들은 아암도 노점상 철거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995년 11월 24일, 이덕인 열사는 망루 농성을 시작했다. 망루를 포위한 경찰과 용역반이 음식물과 식수, 의약품을 차단한 채 물대포를 발포하자, 그는 25일 망루를 탈출했다. 소아마비 증세(장애4급)로 걸음이 불편했던 그는 그 길로 자취를 감췄다. 3일 뒤인 28일, 인천 앞바다에서 발견된 그의 사체는 피멍 투성이었고 팔에는 포승줄이 감겨 있었다.

경찰은 영안실에 안치된 그의 시신을 탈취했고, 국과수는 강제부검을 실시했다. 정부와 경찰은 그의 사인을 ‘익사’라고 발표했다. 찢겨진 시신으로 돌아온 아들을 냉동실에 넣어둔 채, 그의 부모와 연대단위들은 5개월 간 병원에서 농성을 진행했다. 하지만 누구도 왜 그의 시신에 피멍이 들어 있었는지, 팔에는 왜 포승줄이 묶여 있었는지, 익사라면 왜 몸이 퉁퉁 붓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이덕인 열사가 끔찍이 당했던 무자비한 노점 단속
“강산이 두 번 변해도 노점탄압 사회는 변하지 않아”


유희 전국노점상연합 전 수석부위원장은 “탈취당한 시신이 국과수에서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서울과 인천 등 전국에서 피 터지는 열사투쟁이 전개됐다. 장애인이 죽었다고 한 번 만 봐 달라고 외치며 다녔다”며 “아직도 국과수와 인권위는 그가 그냥 물에 빠져 사망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사망한 지 19년 이다. 그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은 것처럼, 지금도 강남역과 인천 동암역, 구월동에서는 노점 단속이 이어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그의 기일을 하루 앞둔 지난 27일 새벽, 인천 부평구청과 인천 남동구청은 이례적으로 동시에 대규모 행정대집행을 실시했다. 수백 명의 용역반과 노점상들이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노점상 및 지도부 13명이 연행됐다. 노점상 한 명은 분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강남대로에도 이날 행정대집행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250여 명의 노점상들이 강남 길바닥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샜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은 “마치 폭력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는 대대적인 행정대집행 앞에 노점상들은 한 장의 비닐을 이불 삼아 밤을 지새우며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며 “구청은 노점상을 그저 싹 쓸어야 하는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며 반발했다. 최인기 집행위원장은 “지금도 노점 탄압은 이덕인 열사가 겪어야 했던 그 시기와 다르지 않다. 강남구청은 일주일에 두 번씩 강남대로 노점 마차를 찢어버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강동진 빈곤사회연대 집행위원장 역시 “이덕인 열사가 사망하고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사회는 변하지 않았다. 거리의 노점상들은 폭력적 단속에 시달리고, 가난한 이들은 살 길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며 “노점상, 철거민, 장애인, 빈민이 연대해 투쟁하자. 이제 소수만이 행복하고, 가난한 이들은 용역 폭력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상을 끝장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덕인 열사가 시신으로 발견됐던 19년 전 그날에는 진눈깨비가 내렸고, 이날 추모제에는 차가운 겨울비가 내렸다. 추모제에 참석한 이들은 천막 안에 설치된 그의 영정 사진 앞에 국화꽃을 헌화했다. 추모제에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전국노점상전국연합, 빈곤사회연대, 빈민해방실천연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국철거민연합,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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