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잠>, 누가 ‘표현의 자유’, ‘여성의 자유-평등’을 일그러뜨리나?

[시평]자유주의와 수구 세력의 유구한 ‘갈등적 의존관계’

1.
<더러운 잠>이 논란이다. 비판의 핵심은 ‘여성 혐오’ 작품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비판의 대상은 남성의 시각이다. 하지만 남성들 또한 계급/계층, 인종/민족, 종교, 지역, 혹은 학력/학벌 등의 요인들이 마구 뒤섞여 존재하는 관계로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상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여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여성일반’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가운데는 이 작품을 ‘여성 혐오’로 보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새누리당, 국민의당 그리고 민주당 등의 여성의원들이 발 빠르게 ‘여성혐오’라고 질타한 것도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이른바 주류 여성단체의 의견도 그렇다. 하지만 반대로 그녀들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특히 국회의원 신분의 그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의 수많은 여성들이 혐오를 넘어 착취, 수탈, 배제, 차별당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외면해 온, 혹은 조장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녀들의 비판이 현실을 가리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너희도 잘 한 것 없으니 비판하지 말고 입 다물라는 말이 아니다. <더러운 잠>에 가해진 그 날 선 비판이 실제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와 관련, ‘여성의 자유-평등’의 진전에 어떤 이미를 지니고 있는지 사유해 보라는 것이다.

[출처: 민주당 전국여성위원회 페이스북]

결국 이러한 논란은 예술, 현실의 사회관계들과 권력관계들이 맺고 있는 내용, 형식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들이 쟁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더러운 잠>의 논란과 관련해, 이를 수 있는 최소한의 합의는 그것을 한 작가의 견해가 풍자, 재현된 작품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의 맥락에서 말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자유가 ‘여성 혐오’조차 포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 작품에 대한 논쟁적 해석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이와 관련, <한겨레> 1월 25일의 그림판은 지금의 ‘여성 혐오’ 논란이 어떤 울타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 <더러운 잠>을 둘러싼 논란을 한 번 더 비틀어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이른바 ‘보수단체’를 상징하는 남성누드가 등장하고 <더러운 잠>에서 최순실에 해당되는 여성이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흑인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기에 지금의 논란을 염두에 두면, 이 작품은 ‘여성-인종-계급 혐오’라는 더 무거운 비판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정치적, 사회문화적으로 ‘미국이 그어준 경계(American boundary)’를 넘지 못하는 한국사회 만큼이나 백인이외의 인종에 대한 혐오, 차별이 뿌리 깊게 내면화된 나라가 또 어디에 있는가. 또한 애국과 맞물린 ‘군대 이야기’로 상징되는 국가, 민족주의는 어떤가. 이른바 ‘지구촌 시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의아하게도 그 그림판은 <더러운 잠>처럼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원작을 그대로 가져온 흑인여성의 얼굴에는 불편한 기색이 전혀 없다. 하층의 흑인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수발을 드는 일을 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인가.

예술작품, 특히 풍자작품의 성격규정은 단지 그것을 직접 만든 작가들의 구상, 의도 등을 따져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른바 ‘비평가라는 명함을 지닌 전문가’들, 일반대중을 포함한 수용자들의 이런 저런 반응도 매우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작가조차 인식하지 못한 점들이 발견 혹은 발명되면서 작품의 성격과 위상에 대한 평가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처럼 말이다. 작가는 ‘여성 혐오’ 의도가 없고, 단지 권력자에 대한 풍자작품이라고 하는데, 수용자들 속에서는 그것을 ‘여성 혐오’로 비판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러한 논쟁의 과정은 수용자들의 호불호와 무관하게 <더러운 잠>과 같은 문제의 텍스트를 매개로 더 완성도 있는 ‘새로운 작품들’을 구상하는 예비창작과정이 될 수도 있다.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예술의 내용과 형식은 풍부해지고 그 가치는 더 제고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선 이 작품의 해석과 관련, <더러운 잠>을 ‘박근혜 누드’에 집중하여 ‘여성 혐오’로 평하는 주장이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누드는 박근혜정권 아래서 실추된 여성의 위상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박근혜정권 초기에 공공연히 존재하였던 ‘여성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감안한다면 더 그렇다. 이른바 ‘온건하고 부드러운 가부장제’를 지향한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적 남성대통령들이 집권한 시기보다 여성의 자유-평등 지수가 실질적으로 하락한 현실 말이다.

작품 속 중앙 뒷 배경이 된 세월호에 갇힌 생명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작품 밖 현실의 가난한 여성들이 겪는 여러 고통들과는 관계없는 듯 ‘발가벗은 임금님’ 박근혜는 시술을 하였는지 호화 침대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편하게 잠을 잔다. 그녀의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지만, 태극을 점령한 것이 상징하듯, 우주의 기운을 받아 이 나라의 ‘실세가 된 최순실’은 무엇이 그리 당당한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억장이 무너질 일 아닌가.

물론 이 작품에 대해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정치상황을 너무 표피적, 현상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 때문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박정희 등은 자신의 지갑들(이익들)을 지키기 위한 이들이 왕관을 씌우거나 대리자로 내세운 이들일 수 있기에 그렇다. 저 유명한 루이 보나파르트처럼 말이다. 즉 실제 그들의 몸에는 그것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움직이게 하는 힘, 즉 서로 맞물려 있어 구분할 수조차 없는 비대칭적이고 불균등한 다층적, 다면적인 현실관계들, 크고 작은 권력관계들이 응집되어 있다.

그렇기에 촛불광장에서 주변화 된, 하지만 의미 있는 여러 목소리들, 즉 ‘여성혐오’를 둘러싼 논란 뿐 아니라 ‘박-최 게이트의 몸통은 재벌이다’, ‘촛불광장은 이주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사회의 구성원들인 비정규노동자들에게조차 여전히 낯설다’, ‘촛불광장을 실제 움직이는 것은 기성의 제도언론들이다’ 등의 언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목소리들에 좀 더 세심하게 반응하면서 기존 정치상황을 풍자, 재현했다면, 아마 작품의 전체적인 구도, 인물의 추가 등을 포함한 배치, 강조점 등도 좀 달라지면서 더 완성도 있는 패러디작품이 생산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생각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이처럼 작가나 수용자들의 상이한 해석, 생각들이 서로 넘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리하여 작가가 수용자가 되고 수용자가 작가가 되는 세상, 더 나아가 여성이 곧 남성이고 남성이 곧 여성인 세상, 즉 스스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법에 양심, 사상, 학문의 자유와 함께 ‘표현의 자유’가 기본 권리로 기입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기본권들은 단지 헌법에 기입되어 있을 뿐, 모든 인민들에게 이미 주어져 향유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최근의 ‘블랙리스트사태’가 잘 보여주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권리로부터 배제된 이들이 엄동설한에 비판, 저항하고 연대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즉 그 기본 권리들의 실현 과정은 한마디로 정치투쟁의 과정인 것이다. 이 점의 환기는 매우 중요한데, <더러운 잠>을 둘러싼 논란 또한 이로부터 자유스럽지 않기 때문이고, 유력한 ‘대권후보’인 문재인과 민주당의 개입은 그 점을 명료하게 재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2.

문재인은 “예술의 영역과 정치의 영역은 다르다”, “예술에서는 비판과 풍자가 중요하지만, 정치에서는 품격과 절제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박 대통령을 풍자한 누드그림이 국회에 전시된 것은 대단히 민망하고 유감스러운 일”임을 지적하며 이번 논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그의 평을 잘 들여다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촌평은 ‘박근혜 누드’를 매개로 논란이 된 ‘표현의 자유’, ‘여성 혐오’ 문제 등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더러운 잠>을 포함한 <곧, BYE, 展>이 국회에서, 그것도 자당 의원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그 논평에 따르면 그에게 정치는 국회로 상징되는 ‘공적 공간’이며 그는 그 공간이 어떤 품격과 절제라는 덕목을 담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더러운 잠>의 전시가 민망하며 유감스러운 이유이다.

그렇다면 국회의 밖에서, 이른바 ‘사적인 견해들이 뒤얽혀 다투고 경쟁하는 시민사회’의 어떤 곳에서 전시가 이루어졌다면 어떤 반응을 내놨을까. 아마도 특유의 어투로 ‘있을 수 있는 일이죠!’라는 반응을 보이며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공적 영역 대(對) 사적 영역’의 대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행위를 규정하는 기본 인식틀이자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적인 영역’과 대비되는 ‘공적 영역으로서의 국회(정치)’를 신성시하는 문재인의 논평은, ‘성주류화’의 흐름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같은 당 동료 여성의원들의 반응과 마찬가지로, 그 당의 성격, 위상에 잘 부합된다. 바로 그렇기에 그/그녀들의 귀는 페미니스트들이 오랫동안 외쳐 온,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언술조차 ‘정치적인 것’으로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그와 민주당의 개입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국회에 ‘박근혜 풍자누드’를 전시했다고 그렇게 신속히 자당 국회의원의 징계절차를 밟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징계근거가 될 <더러운 잠>에 대한 ‘여성혐오’ 여부가 권위를 가진 그 누군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로부터 또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가 드러난다. 지금 그 공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가 바로 유력 대권주자 문재인 그리고 민주당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공간의 지배권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특히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로 빨라진 대선시계를 염두에 둔다면, 조금이라도 그 지배력에 균열을 내는 행위는 경거망동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정치에서 중요한 것이 ‘품위와 절제’라고 언급한 이유이다. 속전속결의 징계 절차는 그런 준거를 공식화시킨 것일 뿐이다. 더 이상 유사한 일을 벌이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공개적 경고이다.

바로 이것이 비판은 가능하나 그 누구도 내릴 수 없었던, 아니 앞으로도 내릴 수 없는 결정, 즉 문재인, 민주당 여성의원들 그리고 당 윤리위원회가 하나가 되어 너무도 과감하게 <더러운 잠>을 ‘여성혐오’ 작품으로 규정한 이유이다. 즉 그들에게는 <더러운 잠>을 매개로 논란이 된 ‘표현의 자유’, ‘여성 혐오’ 문제 등이 아니라, 그러한 사안들이 산출할 수 있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중요하기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 그것이 ‘여성혐오’ 작품이라는 중론이 형성되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관계가 없다. 이미 그 논란의 정치적 효과는 다 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목표가 있다. 촛불을 제어하여 자신들에게 복속, 결집시키는 것 말이다. <곧, BYE 展>이 이른바 ‘공적 영역인 국회’ 안에 전시된 것은 그 의도, 경위야 어쨌든 시민사회의 촛불이, 그들의 목소리가 국회 안에 공식적으로 입성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누드’를 소재로 한 <더러운 잠>으로 인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조용히 끝났으면 좋으련만, 자당 의원이 관여된 일이기에,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대선이 코앞에 와 있는 만큼, 더 이상 촛불을 고무하는 방식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럴 생각도 없지만, ‘표현의 자유’로 옹호하면, 여러 분란을 낳고 수구세력에 반격의 빌미를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촛불은 더 기고만장해 질지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더 많은 기회와 공간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더 이상 ‘촛불혁명’으로 불려서는 안 되며 그 이름은 순치되어 ‘과거의 것’으로만 남아야 한다. ‘촛불혁명’의 화룡점정은 ‘선거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품위와 절제를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박근혜를 신으로 모시는, 촛불을 원수로 생각하는 수구행동대원들이 ‘박근혜 누드’로 세속화된 ‘그들의 신’을 보며 자제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촛불을 국회와 정당으로 상징되는 ‘공적 권위’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것은 비록 개입시기에 차이는 있었지만, 애초 그 두 세력 모두의 목표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 유구한 ‘갈등적 의존관계’에 근거한 담합정치를 작동시켜야 할 때다.

<더러운 잠>이 어떻게 철거되었는지 복기해 보자. 아마도 <더러운 잠>에 담겨 있는 긴장과 갈등이 표면화되었을 때, 자당인 민주당이 그것을 감당해 줄 만큼의 ‘진보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믿었을, 나름 개혁자유주의 정치인으로 성장하고픈 한 초선의원의 도움으로 국회에 전시된 <더러운 잠>, 이후 정치의 품위와 절제를 강조한 유력대권주자 문재인과 그 당의 여성의원들에 의해 ‘여성 혐오’ 작품이라는 낙인을 찍힌 <더러운 잠>, 이어 ‘박근혜 누드’에 분노하고 흥분한 수구세력의 행동대원에 의해 찢기고 짓밟혀진 <더러운 잠>, 그리고 국회 밖으로 끌려 나온 <더러운 잠>. 그들이 의도했던 아니던, ‘환상의 콤비’ 아닌가.

이런 과정에서 ‘집단지성’으로 칭송되던 촛불은 침묵하고 있다. 이른바 그 많던 ‘독립지성들’도 말하지 않고 회피한다. 그 작품을 ‘여성 혐오’로 보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문재인과 민주당으로 달려가 그 작품에 대한 성격규정은 수구정치세력과 담합을 일삼아 온 당신들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까불지 말라고 제대로 된 항의한 번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표현의 자유’의 핵심이 무엇인지 사유, 실천하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다. 오히려 유력 대권후보와 집권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는 ‘차악 정당’이 ‘여성 혐오’라고 규정하자 깜짝 놀라 <곧, BYE 展>에 참여한 예술가들, 아니 <더러운 잠>의 작가에게 ‘좀 신중하지’, ‘굳이 거기까지 가서 사단을 내나’라는 사시를 보내기도 하며 스스로 자기반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게임은 끝났다.

그 와중에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수구정치세력들은 <더러운 잠>을 물고 늘어지며 품위와 절제를 잃은 과격한 언술과 행동을 계속해 대고 그 수장 박근혜 또한 “해도 너무 한다”며 가세하자 그들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다시 커진다. 한 여성의 “옘병 하네!”에 적지 않은 이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이, 문재인은 자신을 지지하는 인사의 KBS출연 금지를 블랙리스트로 규정하고 토론회를 보이콧함으로써 문화예술인들이 일구어 온 블랙리스트반대운동의 성과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출연금지’ 문제는 예술작품의 ‘여성 혐오’ 여부를 둘러싼 문제처럼 민감한 것이 아니니 신경 쓸 것도 없고 얼마나 좋은가. 그는 이제 블랙리스트 반대투쟁의 선봉에 우뚝 선 정치인이다. 진정 ‘대통령 깜’ 아닌가.

설을 맞아, 문재인과 민주당이 <더러운 잠>을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표현의 자유’, ‘여성 혐오’ 문제를 어떻게 희화시켰는지는 아예 사유의 대상도 되지 않은 채 서서히 잊혀 져 간다. 진정 누가 ‘표현의 자유’, ‘여성의 자유-평등’의 진전을 제한, 일그러뜨리고 있는가. 이 논란을 통해 나, 그리고 당신들이 얻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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