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 (사유화, privatization)

[워커스 사전]


우리는 국가 공기업이나 공공기관 또는 공공재와 공공부문을 사유화하는 것을 ‘민영화’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잘못 붙여진 이름이었다. 민영화의 ‘민(民)’이 뜻하는 것은 국민도 시민도 민중의 민도 아닌, 민간기업의 민이다. 그것도 그냥 기업도 아니고 아주 큰 기업이다. ‘공적인(public)’ 것과의 대립적 개념으로서 사적인(private)’ 것을 뜻하는 개념이지만, 다른 영역에선 대부분 ‘공-사 (public-private)’ 관계의 개념에 따라 ‘사(私)’로 옮기는 번역을 ‘민영화’에서만 따르지 않았다. 이는 1990년대 정부-기업-언론-학계의 신자유주의 추진 동맹체가 의해 만든 다분히 의도적인 작명이다. 사유화나 사영화가 아니라 민영화라 부름으로써 공공영역에 대한 공격과 사적 탈취를 마치 반독재나 반독점, 탈권위주의적인 과정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민영화’라 부르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언어에는 사회적 세력 관계가 반영돼 있고, 현실에서 사유화, 시장화, 자유화를 지지하는 세력의 힘이 여전히 센 까닭에, 그대로 민영화로 불린다.

1990년대 이후 지난 30년간 민영화의 결과 및 폐해가 드러났기에 이제 ‘민영화’라는 말은 초기의 효과만큼 포장 기능을 하지는 못한다. 대신 이 용어는 민주화, 자유화 등과 혼용되고 혼동되면서 ‘민중’과 ‘민주주의’의 정치적 개념을 오염시킨다. 과거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이 서구 자본에 의해 자유화와 민영화로 흡수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한국도 87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분출된 사회운동과 시민사회 진보 담론이 곧바로 이어진 탈냉전과 세계화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와 뒤섞이면서 외환위기 사태를 계기로 본격화된 민영화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민영화 초기, 구조조정의 위기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강력한 민영화 저지 투쟁을 하고, 농민들이 목숨을 걸고 반세계화 투쟁을 할 때도, 진보적 시민운동 내부에서조차 민영화, 금융화, 시장개방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추세이며, 차라리 민영화를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따른 부패정치, 비효율적 정부운영과 재정 낭비를 개혁하는 기회로 삼자는 논자들이 적지 않았다. 국내 노동법보다 ILO 기준이 훨씬 낫고 외국계 기업의 노동 관행이 국내 노동환경 변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도 자본시장과 노동시장 개방의 ‘긍정적 효과’로 거론됐던 단골 레퍼토리다.

하지만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민영화는 늘 내세운 목표와 정반대로 실행됐다. 표면적인 목표는 경쟁 도입으로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공공서비스의 질을 높여 국민에게 더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며, 국가의 재정수입을 확대하고 재정 부담을 줄인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민영화는 ‘더 효율적인 정부’도 ‘더 편리한 공공서비스’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애초에 그것이 진짜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영화는 세계은행과 IMF 등을 앞세운 서구 자본이 금융위기를 겪는 국가나 원조가 필요한 가난한 국가에 부채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시장개방과 함께 구조조정의 핵심과제로 요구했던 것이다. 민영화는 자본의 요구였고, 신자유주의의 주요 전략 목표였다. 그것은 공공영역의 축소와 해체였고, 이는 곧 공공서비스 시장의 확대와 창조를 의미했다. 공공재의 사유화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자마자 시판 생수를 마신 세대는 물을 돈 주고 사 먹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던 시대를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물의 값을 어떻게 매기며 누구에게 지불한단 말인가? 물이란 것은 샘과 강이 나눠주는 것이거나 정부가 수도관을 놓아 집집마다 수돗물을 공급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국민은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으로 수도와 전기 같은 기본권과 결부된 필수재를 국민에게 공급한다. 수도가 없는 곳,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방송이 안 나오는 곳, 우편물이 가지 않는 곳이 없도록, 길을 뚫고 전기를 연결하고 수도를 공급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이며, 세금을 잘 내는 것이 국민의 의무라는 것이 국민국가의 기본적인 사회계약이다. 이 공식을 깨트린 것이 민영화다. 민영화는 사유재산이 될 수 없는 것을 사유화하는 기술이었고 공공재에 대한 사회적 원칙과 합의를 파기하는 논리였다. 사회주의 국가의 GDP가 자본주의 국가의 GDP 계산과 비교 불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비시장적 국가 제도를 통해 공급되는 재화와 용역의 탈 상품화 된 성격 차이 때문이다. 자본주의 국가라 해도 공공부문의 재화와 서비스는 비슷한 성격을 갖는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 비시장적 부분을 차례로 시장으로 넘길 것을 요구했고, 민영화는 엄청난 시장의 확대를 통해 시장경제를 성장시켰다. 한마디로 민영화는 정부의 일을 기업으로 아웃소싱하는 것이었고, 정부가 공급하고 국민이 제공받는 공공서비스의 수요자-공급자 관계를, 정부는 공공서비스 발주자이자 구매자로, 기업은 판매자로, 시민은 소비자로 만들어 관계를 전환했다.

당연히 민영화는 원래 내세웠던 것과 정반대의 결과로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더 싼 전기료,더 높은 서비스 질, 더 다양한 소비자 선택권’을 내세우며 추진했던 유럽의 에너지 자유화(시장화) 정책의 결과가 대표적 사례다. 전기요금은 비싸지고, 서비스 질은 낮아졌으며, 저소득층의 에너지 사용권과 시민통제권은 제한됐고, 시장은 거대 에너지 기업이 독점했다. 시장화된 공공서비스는 공통적으로 자본이 공격했던 관료주의적 국가 서비스보다 더 불편하고 종종 더 비효율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더 비싸졌고, 불평등과 사회적 위험을 초래했다. 최소 비용과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수익성의 논리가 공공영역에 도입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그동안 수많은 사례가 입증했다. 주민 수가 적고 이용률이 낮은 우체국이 폐쇄됐고, 철도역과 버스 노선이 사라졌으며, 수익성이 떨어지는 탁아소와 학교와 병원이 문을 닫았다. 사고가 잦아졌고 복구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력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전기는 가난한 지역부터 가장 먼저 끊기고, 가장 나중에 복구됐다.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 위험의 외주화’는 민영화의 폐해를 집약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경제적 손실보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문제는 민영화가 가져온 정치적 결과, 즉 사회의 권력 관계와 지배구조의 변화다. 대처 집권 기간 40개가 넘는 국영 기업을 민간 기업에 매각한 영국에선 1980년 175만 명이던 공기업 종사자가 1990년대 초 50만 명 미만으로 줄었다. 그 결과 영국 경제에서 공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하게 감소하여 공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의 비율은 전체 노동자의 8.1%에서 2.6%로 급감했고, 총 고정투자 기여도 역시 15.2%에서 3.9%로 감소했다. 이러한 변화가 가져온 결과는 서구의 사민주의와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세력동맹인 조직노동과 국민국가의 정치적 동맹 관계를 해체하는 데 일조했다.(1)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계급이 친노동 정책을 가진 진보적 사민주의 정당을 지지하고,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 후 노동계급과 사회 저변의 지지기반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정치적 동맹 관계가 파기된 것이다. 영국처럼 폭력적 노조 분쇄를 통해 급진적인 민영화를 밀어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질서 있는 구조조정’과 장기 전환 계획으로 친노동적인 산업전환을 했다고 평가받는 독일에서도 정치적으로는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사회민주당의 지지기반이었던 루르 지역의 철강 산업 지대가 산업 전환으로 해체되는 과정에서 지역공동체가 와해되고 집단적 노조 교섭력이 약화하자 사민당과 노동계급의 지지 연합도 약화되고 해체됐다. 정치적 지지의 지역 기반과 산업기반, 계급적 기반의 와해는 계급적 지지에 기초한 이념 정당이 대중정당으로 변신하도록 하는 계기였다.

코포라티즘으로 불리는 서구의 전후 계급 타협적 노사정 합의구조는 노사정 삼자 권력이 동등하게 분점돼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이념 정당이 계급동맹을 통해 자본을 압박할 수 있는 협상력을 만들어냈기에 가능한 모델이었다. 여기에 더해 국가 외부의 식민지와 냉전 구도라는 특수한 상황이 자본의 내부적 양보 유인이 됐다. 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국내의 세력 관계 및 서구 자본이 국가 내부에서 양보한 이상의 이익을 식민지를 통해 회수할 수 있었던 것과 냉전기의 예방 혁명적 요구가 자본의 힘을 억제할 수 있는 주요 조건이었다. 민영화는 자본을 억제하던 고삐들이 다 풀린 시점에서 일어난 공공부문에 대한 자본의 공격인 동시에 조직노동과 국민국가의 코포라티즘적 연합이라는 전후 합의에 대한 파기였다. 민영화는 정치적 동맹을 새롭게 구성했다. ‘노동-정부 연합 대 자본’ 간의 노사정 합의 구조는 ‘자본-정부 대 노동’의 구도로 바뀌었고, 세력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기업- 정부-시민사회’로 재구축된 민관협력 거버넌스 구조에서 노동의 위상은 더욱 축소됐고, 노동 대표성은 기업과 함께 ‘민간’을 대표하는 시민사회 대표성의 하위 부분으로 재배치됐다. 민영화는 국민국가의 주권과 자본에 대한 통제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노동계급의 입장에선 노조를 통한 교섭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노-정 간 합의, 시민과 정부 간 합의 등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 모두 시장의 복잡한 규칙과 법률적 판단에 좌우되는 개별화된 사적 문제로 넘어갔다. 문제는 민영화 전략이 현재 남아있는 공공부문을 향해 공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사이 민영화의 방식은 알아챌 수 없게 교묘하게 진화했다. 공기업이나 공공자산을 사기업에 직접 매각해 아예 소유권을 넘기는 초기의 직접 민영화 방식은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공기업 매각은 국민적 거부감이 크기도 하지만 기업 전략도 정부 축소에서 ‘국가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8개 공기업을 매각했지만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는 공공기관이 더 늘어났다. 민영화 방식은 공기업 독점 분야를 시장 개방하는 ‘투자 자유화’로, 민관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 투자 방식으로, 국가 공공서비스를 외주화하는 방식 등으로 복잡 다변해졌다. 다른 의제에 민영화가 흡수돼 ‘민영화’지만 민영화인 줄 알아채지 못하도록 추진되기도 한다. ‘에너지 전환’이라는 큰 전환 의제 속에서 재생에너지, 수소에너지 등 에너지원 전환에 사회적 논의가 집중되면서, 사유화·독점화된 에너지를 어떻게 공공화·민주화할 것인지에 대한 ‘방향 전환’에 대한 논의가 누락되는 것이 그런 경우다. ‘에너지 분권화와 지역화’라는 말은 지자체가 민간 에너지 기업에 지역의 인프라와 서비스를 위탁하는 민영화를 쉽게 은폐한다. ‘천만의 분산 에너지’ 같은 슬로건도 시민 개개인을 에너지 생산자이자 판매자, 투자자로 만들어 시민을 시장참여자로 전환하는 에너지 시장화를 마치 민중이 에너지에 대한 주권과 통제권을 갖는 에너지 민주화로 혼동하도록 교란과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국민주 배당이나 주식개방을 통해 시민들을 주주와 투자자로, 공동의 이해관계자로 만드는 것도 오늘날 민영화의 주요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민영화 초기에는 ‘작은 정부’와 시장에 대한 ‘최소 개입’을 주창하던 기업들이 2000년대 이후로는 반대로 ‘강한 국가’를 요구하는 것은 세력 관계의 변화와 자신감을 보여주는 매우 징후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기업은 금융위기, 기후 위기, 성장 위기 등 자본의 축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매번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요청한다. 기술전환과 산업전환에서도 강력한 정책적 개입을 요구한다. 물론 이때의 개입 요구는 자본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강력한 억제와 기업에 대한 강력한 지원 요구다. 빌 게이츠 재단의 주력 투자 분야는 공중보건, 공교육, 식량, 수자원, 에너지 개발 등 공공부문에 집중돼 있다. 빌 게이츠와 같은 세계적 자본 경영가들은 국가의 공공투자 확대를 촉구하며 여기가 유망한 미래 투자 분야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지금 자본은 정부를 그 자체로 하나의 자원이자 시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공동으로 인프라를 구축 관리하고, 공공서비스를 위탁 운영하면서 자본과 국가는 점점 더 일체화된다. 민영화는 ‘점점 더 기업에 의존하는 정부’와 ‘영원히 국가에 의존하는 자본’을 동시에 탄생시켰다. 오늘날 공공부문과 공공사업은 자본이 이윤을 빨아들이는 화수분과 같다. 국가는 자본의 거대한 매트릭스가 되고 있다. 사유화, 금융화, 독점화를 통한 자본의 전 지구적 약탈이 전 지구적인 재난으로 돌아오고 있는 지금, 민영화의 해체와 재공공화를 통한 공공성의 탈환과 재구성이 시급하다.

각주
(1)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안세민 옮김 《금융도둑 – 99%는 왜 1%에게 빼앗기고 빚을 지는가》 (책세상 20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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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효정(정치학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해고강사)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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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경락

    예전에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놀이가 있었는데....예나 지금이나 그저 돈 없는 사람은 기댈때라곤 하늘과 정부뿐이 없었지요 공기업이 그런 역할 했더랬습니다......늘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