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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100주년] (1)러시아 2월 혁명이 피로 물든 왕조를 쓸어버리다

[역자 주] 러시아혁명은 20세기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전쟁과 빈곤, 착취와 억압을 노동자와 민중들이 끝낼 수 있다는 희망을 세계 인민에게 가져다주었다. 비록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러시아에 착취와 억압 체제가 다시 들어섰지만 러시아혁명은 왕과 자본가들을 쓸어버리고 노동대중이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이 실제 현실로 실현된 순간이었다.

러시아혁명 100년 미국 좌파 저널 <자코뱅> 온라인 시리즈는 러시아혁명이 벌어졌던 1917년 상황을 이야기한다. 1917년 러시아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차르를 타도했던 2월혁명부터 권력을 장악했던 10월혁명, 그리고 이어지는 내전까지 1917년 내내 수많은 사건들과 우여곡절 속에서 다양한 계급 세력들이 또 노동자계급 내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혁명과 반혁명을 오가며 갈등하고 대립하며 각축을 벌였다.

<자코뱅>은 러시아혁명을 분석해 온 마르크스주의 저자 22명의 기고와 논평을 1917년 2월혁명부터 해당 날짜에 맞춰 앞으로 1년 동안 차례로 실을 예정이다. 여기에 실린 기사들은 현재 약 10개국의 언어로 번역될 예정이며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인 Marxist Internet Archive에 번역문들이 게재될 것이다.

이 시리즈가 1917년 러시아혁명 상황에 대해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인 설명과 분석을 제공할 것이라 기대해 본다. 한편에서는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식으로 러시아 혁명을 폄하하는 주장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러시아혁명에 대한 발전된 분석과 새로운 통찰 없이, 똑같은 찬사만 반복되기도 한다. 이 시리즈에서 러시아혁명을 둘러싼 가장 첨예한 쟁점들에 대한 논쟁들이 소개되고 새로운 분석과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1917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타우리드 광장에 모인 노동자들 [출처] Wikimedia Commons

“우리 구세대는 어쩌면 다가올 혁명의 결정적 전투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1905년 12주년 기념일에 스위스 청년 단체를 대상으로 한 연설 중 레닌이 한 말이다. 이 말을 한 6주 뒤 차르 니콜라이 2세 왕조가 무너졌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유명한 농담이 생겼다. “집회 늦지마, 벌써 혁명이 시작됐을 수도 있어!”

당시 레닌의 저작들을 보면, 레닌은 러시아의 정치상황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가 지난 300년 동안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영토를 확장한 제국에서 러시아어 사용자는 소수였고 제국은 억압을 통해 지배하고 있었다.

고립되어 차츰 약해지기는커녕, 차르 정권은 서유럽에 자신의 반동적 브랜드를 과시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뒤 부상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적 운동에 맞서 러시아 제국은 거대한 농민군을 보내 유럽 왕조들과 반동을 지원했다. 로마노프 왕조는 또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에 공산주의의 적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여명이 밝을 무렵 러시아 제국은 토대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그의 책 <러시아 혁명>에서 세계경제발전이 불가피하게 불균등한 속도로 진행되는 것을 지적하며 러시아 사회의 휘발성을 설명했다. 니콜라이 2세는 뒤죽박죽인 영토와 사람들 꼭대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의 공식직함이 한 예다. “전 러시아, 모스크바, 키예프, 블라디미르, 노브고로드의 황제이자 군주이며, 카산의 차르, 아스트라한의 차르, 폴란드의 차르, 시베리아의 차르이자, 스몰렌트스와 리투아니아의 대공작이며… 기타 등등.”

다른 무엇보다 차르는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한 영주였다. 러시아 토지 소유 귀족들은 중세 서유럽 귀족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러시아 농노제는 1861년에야 폐지됐다. 귀족 3만 명이 1억8900만 에이커(평균 5400 에이커)를 소유했는데, 5000만 빈농·중농이 가진 토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넓었다.

이 통계들은 “농민봉기가 필요하다는 기존 강령” 뿐 아니라 산업화하고 있는 서유럽과 농업국 러시아 사이에서 커져가던 생산력 격차를 알려준다. 과학기술이 뒤쳐져 군사력이 약화될까 두려웠던 차르는 프랑스와 영국 은행들에 자금을 빌려 페트로그라드와 다른 몇몇 지역 중심으로 매우 집중화되고 현대적인 군수 및 금속 산업을 발전시켰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공장들이 러시아에 세워져 자신의 노동력 밖에 가진 게 없는 새로운 계급의 사람들을 여기에 집중시켰다.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1899년)에서 레닌은 1890년대 러시아 임금노동자 규모를 1000만 명으로 추산했다.

1905년 리허설

차르는 이런 “혼합물”을 채찍으로 한 데 묶으려 했다. 반유대주의 깡패들, 검은 백인단(Black Hundreds)이 지방을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대(大)러시아 민족주의 아래 토착 언어 교육을 금지했고 군대가 파업을 진압했다. 황제는 서해 항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에 애국주의를 부추겨 1904년 일본과 전쟁을 벌였지만 일본의 우세한 장비와 전략에 부딪혔고 이로 인해 국내에서 전쟁 반대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1905년 1월 9일 노동자·학생 그리고 빈민 수십만 명이 가퐁 신부 뒤를 따라 차르에게 고통을 줄여달라고 청원하기 위해 행진했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총검과 실탄이었다. 수백 명이 피 흘리며 거리에서 죽었다.

‘1905년 거대한 리허설’은 사회적 불길이 여러 곳에서 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줬다. 농민들은 영주에 맞서고, 노동자들은 사장에 그리고 사실상 나라 전체(일부 중간계급과 심지어 일부 자본가계급)가 로마노프 왕조에 맞서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1905년 혁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수병들은 전함 포템킨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농촌지역 7분의 1에서 농민들이 영주 저택을 불 태웠다. 국제주의 좌파는 새로운 인식에 이르렀다. 레닌은 이렇게 정리했다. “독특한 대중 조직이 형성됐다. 모든 공장의 대표들로 구성된 그 유명한 노동자소비에트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 창립회원인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5년 상황을 러시아를 넘어 개괄하며 “대중파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위대한 혁명 투쟁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형태”라고 했다.

혁명 가운데 사회주의 좌파가 크게 성장했다. 잘 알려진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 (여기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처음에 단결했다가 나중에 분열했다. 그리고 유대인·폴란드·핀란드 및 다른 민족들에 기초한 사회주의 조직들과 복잡한 협상도 벌어졌다) 1년 전에 다양한 분파들에 속한 당원들이 대략 1만 명이었다. 1906년 봄, 소위 통합 당대회 즈음 당원은 수 만 명에 이르렀다.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대회 때는 잔혹한 탄압에도 당원 수가 (민족별 조직들에 가입한 당원들을 포함하여) 거의 15만 명에 이르렀다.

차르는 두려운 나머지 처음에는 혁명에 양보조치를 취했다. 두마라고 불리는 ‘장난감’ 의회가 세워졌다. 처음에 도시 노동자들은 투표권이 없었다. 나중에 지주 2000명 당 1명의 의원이 선출되고 노동자 9만 명당 1명의 의원이 선출되는 것으로 수정됐다. 이 미미한 조치조차 니콜라이 2세로서는 수용할 수 없었고 또한 혁명을 달래기에도 불충분했다. 러시아는 묘지로 변했다. 1만5000명이 처형됐고 2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4만5000명이 추방됐다. 잠시 핏물이 불길을 꺼뜨렸다.

공동묘지

1912년 초 파업들이 다시 발생해 시베리아 금광 도시 레나에서 폭발했다. 차르 군대가 파업 노동자 수 백 명에게 총격을 가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마치 잿더미에서 불사조가 솟아오르듯 떨쳐 일어났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다시 성장했고 파업이 확산됐다. 1914년 사회주의 신문 <프라우다>는 매일 30만에서 40만부 판매됐다. 대부분 문맹자인 나라에서 말이다.

1914년 여름이 되자 러시아는 한계점에 도달한 것처럼 보였다. 현상 유지가 불가능했다. 니콜라이 2세는 1914년 7월 19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극동 국경지역에 한정됐던 러일전쟁과 달리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선 전쟁은 왕궁 바로 앞까지 기아와 역병을 불러왔다.

전쟁 초기 열광적 애국주의 물결이 황제를 추켜올렸다. 농민의 어린 아들들과 청년 수십 만 명이 입대했고 도시와 지방 광장에서 애국주의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05년 혁명을 불러왔던 모든 갈등들이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대중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이고 미발전한 사회 체제가 세계에서 가장 앞선 산업국가와 생사를 건 전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결과는 끔찍했다.

1억7500만 인구 가운데 병사 300만 명이 죽었다. 군인 400만 명이 부상으로 고통당했고 민간인 300만 명이 전쟁 관련된 이유로 사망했다. 차르는 과학기술로 무장한 독일군에 대항해 장비도 부실하고 제대로 무장도 못한 병사 수십만 명을 보내 죽음으로 내몰았다. 1915년, 1916년, 1917년 겨울 동안 병사 수만 명이 러시아군 참호 속에서 그냥 얼어 죽었다.

한편, 궁중은 방탕 속으로 몰락하고 있었다. 신비주의 신부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알렉산드리아 왕비를 통해 위세를 부리며 폭군 이반처럼 충성하지 않으면 모두 처벌하라고 황제를 부추겼다. 그의 영향력이 커지자 러시아 귀족들은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전쟁 정책에 다시 영향력을 미치고자 라스푸틴을 살해했다. 수 세기에 걸쳐 로마노프 왕조에 빌붙던 러시아귀족들이 이제는 정치적으로 썩은 시체 같은 황제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츠요시 하세가와는 이렇게 말한다. 황제와 왕비는 “바깥 세상을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강력한 적

전쟁이 질질 끌면서 1905년처럼 농민 봉기가 증가했다. 그러나 이번 봉기는 새로운 형태였다. 참호 속에서 귀족 장교들과 농민 병사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장교가 독일군 포탄에 맞서 자살과 다름없는 전투명령을 내릴 때 마다, 농민 병사 개인의 생명만이 아니라 이들 농민의 아들들이 돌아와 가족을 돌보고 노동해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 전체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게다가 차르 정권은 농민 가족들이 먹고 살 곡식과 다음 해를 위한 종자까지 군대를 위해 강탈했다.

어쩌면 니콜라이 2세와 그 왕조는 커지는 농민들 분노나 치명적인 군사적 패배, 자기 계급과의 단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강력한 적이 발 밑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전쟁이 참호를 피로 가득 채우듯, 전쟁은 페트로그라드를 노동자들로 가득 채웠다. 챠르정권은 자신에 맞서 1905년에 투쟁했던, 그리고 그 결과 끔찍한 고통을 당했던 바로 그 노동자계급에게, 전쟁의 성패가 달린 모든 총기와 총탄, 포탄, 철도차량 등의 생산과 운송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적, 노동자계급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세가와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수가 1914년 24만2600명에서 1917년 39만2000명으로 62% 늘었다고 한다. 이 중 4분의 1은 여성 노동자였다.

파업은 전쟁 초기 애국주의 시기에 약화됐다. 전쟁 전 1914년 붉은 일요일 기념 파업에 110,000명이 참가했지만 1915년 1월 9일에는 2,600명만 참가했다. 전쟁이 악화되자 파업이 확대됐다. 1916년 9월부터 1917년 2월까지 6개월 동안 589,351명이 파업에 동참했고 그 가운데 80%가 정치파업에 참가했다.

더욱이 대중운동이 커져가는 동안 노동자들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을 벌여온 끈질긴 사회주의 조직들도 성장했다. 1905년과 그 뒤 이어진 탄압으로 혁명가 수천 명이 생명을 잃었고 단련된 노동자 운동을 없애기 위해 수천 명이 징집돼 전선으로 보내졌다. 차르 경찰은 실제 몇 차례나 사회주의 좌파 조직을 거의 소탕할 뻔 했다. 그러나 십 년 넘는 전투와 지하당 조직 그리고 사회주의 교육으로 그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

가장 중요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1차 세계대전에서 자국의 지배계급을 지지한 독일과 프랑스와 달리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운동 다수는 전쟁반대, 국제주의 원칙을 갖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볼셰비키, 멘셰비키, 메즈라이온치[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중간파로 트로츠키·요페 등이 회원이었음. 1917년 7월 말 볼셰비키와 통합-역자주], 사회혁명당원과 아나키스트 등 많은 수의 조직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있어 다양한 상황에서 경쟁하고 협력하고 있었다.

물론 잘 알려진 사회 애국주의자들도 있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던 멘셰비키 우파 지도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대표적이다. 한때 레닌과 멘세비키 국제주의자 율리우스 마르토프가 그를 멘토로 생각했다.

1917년 첫 번째 일주일의 상황은 레닌이 말했던 ‘혁명의 기본법칙’의 전제조건에 점점 가까워졌다고 많은 이들이 주장한다. 그가 말한 전제조건은 이랬다.

“‘하층계급들’이 더 이상 옛날 방식으로 살기 원하지 않을 때, 그리고 ‘상층계급들’이 더 이상 옛날 방식을 유지할 수 없을 때, 혁명은 승리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상황에 맞서 저항한 것은 러시아 제국 노동자 계급만이 아니었다. 칼 립크네히트는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전쟁 찬성 입장과 단절하고 의회에서 전쟁공채에 반대표를 던졌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감옥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율리우스 팜플렛을 썼고 프랑스와 독일 병사들은 일방적으로 크리스마스 정전을 선언했다. 미국사회당(the American Socialist Party) 좌파와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는 우드로 윌슨의 전쟁 책동에 반대했다.

1916~1917년 겨울에 세계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에서 사회·경제·군사적 위기가 심화됐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과 조직력 (더불어 커져가는 병사·농민·학생 그리고 억압민족들의 저항이 확대되면서)이 앞서 있었다.

여기에 더해 (전부는 아니라도 매우 광범위했던) 아름다운 환상이 광범위한 차르 반대 운동 세력들을 결합시키고 있었다. 니콜라이 왕조를 무너뜨리면 러시아에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번영이 찾아올 것이라는 환상이었다.

러시아 혁명 운동이 이 주장을 시험대에 올리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월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필자] 토드 크리티앙 |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활동가이자 <국제사회주의자리뷰(International Socialist Review)> 기고자
[역자] 최용찬 | 수년간 공공운수연맹 등 노동조합에서 정책 및 대외협력(국제) 사업 담당자로 일했다. 옮긴 책으로 <좀비자본주의>(공역, 책갈피), <세계화와 노동계급>(공역, 책갈피) 등이 있다.
[역자 주] 최용찬 대표 집필. 이 시리즈는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한국어 등 10여 개 국 언어로 번역될 예정이다. 한국어 번역 참여 문의(free.yongchan@gmail.com).
[원문] https://www.jacobinmag.com/2017/03/russia-february-revolution-tsar-great-war-lenin-trotsky/
[원제] Before February


[자코뱅(JACOBIN) 온라인 시리즈 - 1917년 러시아 혁명 차례]

토드 크레티앙(Todd Chretien) : 2월 이전
케빈 머피(Kevin Murphy) : 2월혁명의 진행
라스 리(Lars Lih)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1917년 볼세비키의 핵심 메시지
유리 콜롬보(Yurii Colombo) : 전쟁과 4월 위기
에릭 블랑(Eric Blanc) : 1917년 핀란드 혁명
다니엘라 무시(Daniela Mussi) : 그람시가 본 1917년 러시아 혁명
메건 투르델(Megan Trudell) : 여성과 1917년 혁명
브랜단 맥기버(Bendan McGeever) : 반유대주의와 1917년 혁명 정치
마이크 하인즈(Mike Hyanes) : 폭력과 러시아혁명
로날드 수니(Ronald Suny) : 바쿠 꼬뮌
다니엘 가이도(Daniel Gaido) : 6월의 나날들
크리스토퍼 리드(Christopher Read) : 늦여름의 위기와 정치 양극화
케빈 머피(Kevin Murphy) :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라 배드콕(Sarah Badcock) : 1917년 러시아 농촌에서의 혁명
폴 르 블랑(Paul Le Blanc) : 코르닐로프 쿠데타 패배하다
알렉세이 구세프(Alexei Gusev) : 1917년 멘세비키의 대안
데이비드 만델(David Mandel) : 10월혁명의 유산
차이나 미에빌(Chian Mieville) : 10월혁명
알렉산더 라비노비치(Alexander Rabinowitch) : 다시 보는 볼세비키의 권력 장악
수지 와이즈먼(Suzi Weissman) : 빅토르 세르주-10월에서 1월까지
소마 마릭(Soma Marik) : 혁명적 민주주의
닐 데이비슨(Neil Davidson):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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