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우산운동] 포스트 천안문, 반중국 감정과 계급운동의 굴곡

흑 대 황: 홍콩의 우산 운동과 계급 적대(2) 역사 2편

[편집자 주]본 글의 필자는 “미국의 한 과격파와 익명의 친구들”로 Ultra-com.org에 최초 게재한 글을 <립컴(libcom)>의 블로그 “나오(Nao, 鬧)”가 재게재한 것임을 밝힙니다. Ultra-com.org는 2011년 이래 세계 오큐파이, 파업과 반란에 참가하고 있는 자칭 “울트라스(과격파들)”가 이 위기의 과정에서 형성된 다른 ‘울트라스’와의 만남, 지역에서의 토론, 조사와 협력을 위해 만든 웹사이트라고 소개합니다. 필자들은 이 글을 전하며 “직접 조사로 작성된 정보와 사진을 제공해준 홍콩의 모든 친구들에게 감사한다”고 기록했습니다.

한편, 이 글을 재게재한 <립컴>은 세계적 반자본주의 사회운동을 조명하는 온라인 매체며 이 글에 대해 홍콩 “우산 운동”에 대한 직접 조사에 기초하여 배경과 한계 그리고 맑스주의적 전망을 분석한 글이라고 전했습니다. “나오”는 <립컴>에서 중국에서의 계급투쟁을 전하고 있고 “몰수, 착취와 배제에 맞선 소농,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반란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문제아들을 옹호한다”고 소개합니다.



1편:[홍콩 우산운동] 미래 없는 세대의 등장(클릭)

첫 번째의 즉각적인 효과는 “홍콩시민지원 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쓰투화, 마틴리와 리척얀과 같은 인물들이 여기서 함께 하기 시작했고 본토 정부는 이들 모두를 빠르게 공격했다. 2년 뒤인 1991년, 홍콩은 첫 번째 직접 선거를 실시했다. 보다 작은 자유주의 성향의 정당들이 병합하며, ‘홍콩통합민주당[중도, 1990년 창당, 1994년 민주당으로 통합]’과 자유주의적 ‘미팅포인트당[중도좌파, 1983년 창당해 1994년 민주당으로 통합]’ 간 선거 연합이 대승을 거뒀다. 1991년 선거를 계기로 ‘범민주화’ 진영은 탄생했고 이들은 그 후 20년 동안 여러 차례 쪼개졌다가 다시 결합했다. 현재, 이 선거 정당은 지식인, 활동가와 NGO들이 느슨하게 결합한, 대략 ‘범민주파’라고 불린다.[쓰투화(시민운동가, 카오룽 이스트 입법의회 의원), 마틴리(변호사, 홍콩 민주당-중도/중도좌파, 1994년 통합민주당, 미팅포인트, 더프론티어가 공동으로 결성-초대당수), 리척얀(홍콩노총 전 사무총장, 지련회 전 회장)]

범민주파 활동가 진영의 핵심 구성원 중에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에 저항하며 형성된 학민사조와 같은 중등학교 조직들과 홍콩의 7개 주요 대학 학생연합이 결성한 홍콩학생연합(HKFS)이 있다. 이들 조직은 엄밀히 말하면 매우 폭넓은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대표직은 대개 범민주파와 방침을 같이 하며 제도적 개혁과 “예의 있는” 방식을 추구한다. 학생 조직이 종종 범민주파의 보다 제도화된 진영에 대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행동하도록 강제할지라도 다수는 여전히 자신이 ‘홍콩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경찰이 시위대를 공격할 때 반격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최근 홍콩 정치 상황과 관련해서도, HKFS와 학민사조와 같은 그룹은 선두적이었지만 결국에는 숨 막히는 역할 모두를 했다. 신제 개발에 맞선 시위부터 올해 7월 1일 연례 행진 뒤 잠깐 동안 진행된 점거까지, 학생그룹들은 시위를 순조롭게 진행하는 데 필수적이었지만 실제 경찰의 탄압에 직면했을 때는 대개 주춤거리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홍콩의 젊은 시위대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약하지만 자금은 충분한 ‘범민주파’ 자유주의 그리고 인민역량(人民力量) 또는 “민중의 힘” 당과 열혈공민(熱血公民) 또는 “시민의 열정[Civic Passion]”이라고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 주변에 느슨하게 그룹화된 모호한 극우 변이 사이에 뻗어 있게 됐다. 시민의 열정은 이주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어떤 입장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극우적 홍콩 민족주의자들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집회에서 그들의 흑황색 티셔츠를 입은 구성원이 이주민(특히 본토 중국인)은 떠나라고 말하는 것은 종종 눈에 띄는 일이다.

  우익 시민의 열정 그룹의 지도자 웡융탓, 뒤에 중국공산당 반대 현수막
[출처: Ultra-com.org(이하 같음)]

도처에서의 민족주의 정치와 일관되게, 시민의 열정은 민족적 속성의 언어로 계급 대립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 분석의 측면에서, 다수는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 좌파라기보다는 론 폴[미국 공화당 정치인]과 앨릭스 존스[미국 언론인]와 같은 사람들과 유사하다. 이들은 홍콩의 미래를 수탈하는 국제 자본가 계급의 진정한 역할보다는 이 과정에서 본토 자본가들이 취한 역할만을 강조한다. 더욱 위험하게는, 그들은 홍콩으로 이주한 더 가난한 수많은 본토 중국인에 대해 이 도시의 모든 자원을 빼내려 온 들끓는 메뚜기 떼 같다고 매도한다.

반중국 감정은 홍콩 사회의 일상에 가시적으로 나타날 정도로 폭넓게 인정된 매우 대중적인 인종주의의 한 형태이다. 베이징의 직간접적인 검열을 받지 않는 소수 언론 매체 중 하나인 <애플데일리>는 2012년, 신문에 홍콩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메뚜기를 묘사하고, “당신은 홍콩을 위해 본토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매 18분마다 100홍콩달러를 지불할 의향이 있는가?”라는 전면 광고를 게재했다. 올해 초엔,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반메뚜기’ 캠페인에 참가해, “중국으로 돌아가라”와 “홍콩을 되찾자”와 같은 문구를 들고 북경어로 말하는 구경꾼들에게는 고함을 치며 부유한 본토 관광객들이 애용하는 값비싼 보석매장이 있는 광둥 로드로 행진했다. 사회적 긴장이 악화된 시기에, 이 같은 일상의 인종주의는 편리한 압박 해소의 방법이자, 시위대를 분열시키고 주강 삼각주[중국의 주강 하구의 광저우, 홍콩, 마카오를 연결하는 삼각지대]에서 반란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협력을 가로막을 만큼 구조화돼 있다.

  홍콩 최대 신문사 중 하나의 반중국인 광고

그러나, 사람들이 범민주파동맹의 보수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민중의 힘과 시민의 열정 같은 그룹들이, 보다 전투적인 행동에 기꺼이 나서는 소수 그룹의 일부가 되면서, 첫 번째 가시적인 대안이 됐다. 젊은 사람들이 범민주파의 [보수적인] 농성과 정당 영합주의를 지켜보면서 단 몇 년 만에 이들 그룹의 대중성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가장 자주 인용된 사례를 보면, 6월 4일, 주류 민주파 정당들은 1989년 천안문 광장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연례 촛불 시위를 진행한다. 시민의 열정은 보다 전투적이지만 민족주의자들(그들은 ‘지역주의자’라고 부르는)과 인종주의 슬로건도 있었던, 연례의 대안 집회를 시작했다. 2013년, 이들의 대안 집회에는 200명만 참가했지만 올해에는 7000명이 모였다. [민주파 정당들의] 본 행사는 여전히 훨씬 크지만 공식 시위 참가자는 같은 기간, 수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현재의 “우산 혁명”에서, 반중국 그룹은 다시 열외로 취급되는 것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과거 경험을 보면, 범민주파가 활동 부족으로 흔들리기 시작하면, 극우만이 점점 더 전투적인 청년세대의 대열을 획득해 전술적인 전진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홍콩의 정치는 지금까지 수년 동안 이 벽에 부딪혀 왔다.

  우산 운동의 과정에서 최근 홍콩 전역의 벽에 붙은 스티커: “식민주의자 반대! 새로운 홍콩인(중국 본토로부터의 이주민) 반대”

ㅡ최초 오큐파이와 항구 파업

현재의 “오큐파이 센트럴[Occupy Central]” 그룹은 - 엄밀히 말하면, “사랑과 평화의 오큐파이 센트럴[Occupy Central with Love and Peace]” - 홍콩 최초 오큐파이 센트럴의 존재를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오큐파이와 같이, 홍콩에서도 2011년 점거 운동은 시내 금융센터를 목표로, 이 도시 금융가의 심장부에 있는 HSBC 건물 바닥에 천막을 치고 시위했다. 비록 오큐파이 센트럴이 2011년 가장 오래된 점거 운동 중 하나를 기록했더라도(2011년 10월 시작해 2012년 9월 끝남), 이 운동은 전성기에도 100명 정도만 참가한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시민 소요의 새로운 시대를 기록했고, 최초 점거운동 참가자 다수는 신제 개발에 맞서거나 “우산 운동”을 점화한 학생 휴업 조직을 지원하는 등 현재 운동을 가능하게 한 토대를 세우기 위해 나아갔다.

  홍콩의 최초 오큐파이 운동

하지만 최초의 오큐파이는, 많은 다른 운동들처럼,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초기적인 아나키스트와 함께 이 운동에는 늘 그렇듯 온갖 음모설이 뒤섞였고, 근시안적인 활동가와, 물론 자유주의자 일부도 혼합돼 있었다. 홍콩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은 범민주파의 변이이다. 그들의 정치 관점이 기본적으로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에 참가한 자유주의자들이 들어올린 “정치에서 돈을 제거하라”는 피상적인 비평과 기본적으로 유사하긴 하지만 말이다. 이들 자유주의자와 최초 오큐파이 - 젊은 교수들, 학생들, 실업자와 집 없는 사람들 - 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최초 오큐파이 운동이 퇴거된 뒤, 언론 연줄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재점거 계획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사실은 그들 중 누구도 오큐파이 센트럴 자체에서 거의 참가하지 않은, 보다 나이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었다.

토킹헤즈의 3인조 - 베니 타이 교수, 찬킨만 교수와 츄이우밍 목사는 일반 투표로 선출된 정부를 요구하며 입법회에 제안할 일련의 집단 심의의 계획을 만들고 제안했다. 홍콩에서, 이는 국내 이주노동자와 같은 인구는 배제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보통 선거권”으로 간주됐다. 3명의 지도자는 이 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센트럴에서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에 나서겠다고 위협했고, “비폭력적”이며 홍콩 사람들 다수의 바람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운동 “사랑과 평화의 오큐파이 센트럴”을 제안했다.

  새 "사랑과 평화의 오큐파이"의 로고

하지만 새로운 오큐파이 센트럴 그룹이 온라인 선거를 실시하자(최종적으로 홍콩 인구 10명 중 단 1명이 참가한), 오큐파이 반대 세력은 도시 전역의 청원과 서명운동을 후원했으며 여론 조사 결과 다수는 재점거를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뒤 베니 타이는 범민주파가 실제 점거운동을 벌일 경우 소위 “실제적인” 시민들의 노골적인 반대가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하며 이 운동은 “실패했다”고 선언했다. 이즈음, 대중버스 방송 광고에는 유행에 민감한 젊은 홍콩인부터 나이든 기업인까지 모두 나와 오큐파이 센트럴 계획은 소상점의 영업과 주말 쇼핑을 망칠 것이라고 선전해댔다. 홍콩 정치인들은 시위 운동에 나섰다가 시민사회의 지지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했고, 심지어 예의라는 이름으로, 운동은 시작하기도 전에 억눌렸다.

오큐파이 브랜드를 다시 사용한 것은 또 편리하게 새로운 자유주의의 정견으로 최초 오큐파이의 보다 급진적인 관점을 위장시켰다. 이 의미가 외부에서 보기에는 분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 최초 점거운동은 “미래 없는 세대”의 성원 일부가 함께 하고 범민주파와 빌어먹을 예의를 포함해 홍콩 전체 정치를 집단적으로 비평한, 적은 공간 중의 하나였다. 이 점거운동 핵심 성원 중 일부는 심지어 자유민주주의, 실질적으로는 홍콩의 “성우[자본시장의 상징, 황소상]”를 도살하는 데 대한 명료한 비평을 나눴다 - 이의 일부는 89년 이후 이 도시의 역사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학생과 젊은 사람들의 보다 급진적인 계열이 사랑과 평화의 오큐파이 센트럴을 대신 결국 학생 휴업을 발의하고 센트럴 뿐 아니라 애드미럴티, 코즈웨이 베이와 몽콕의 긴 구간을 점거한 것은 이런 과정에서 나왔다.

젊은 민중이 범민주파의 친위대와 충돌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2012년 최초 오큐파이가 내쫓긴 후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을 때, 새로운 적대가 외부로 퍼지기 시작했다. 2013년 3월, 홍콩에서 가장 크고 긴 수십 년 만의 노동 쟁의였던 대중 파업이 홍콩 항구 쿠이칭구 컨테이너 터미널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최초 오큐파이와 파업 그리고 현재 시위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서로가 동일한 경제적 침체와 심화하는 계급 적대에 의해 생성된 것은 분명하다. 보다 중요하게는, 각 운동은 민중의 일반적인 정치 의식을 변화시켰고 이 새로운 인식은 연속적인 운동을 위한 지지 기반이 됐다.

이 파업은 애초 항구 내 크레인 기술자들이 독립적으로 시작했지만, 모두 범민주파 친위대가 주도하는, 홍콩노총 및 노동당과 연합한 홍콩부두노동조합(UHKD)에 의해 신속하게 수용됐다. 교섭을 주도하는 노동조합 대표단들로 인해, 파업 노동자들의 초기 에너지들은 빠르게 바뀌어 갔고 노동 인구 대다수로의 파업 확산은 방해됐다. 리자청의 기함회사 허친슨 왬포어가 소유한 이 항구는 홍콩의 이미지와 경제 모두에 핵심적이다. 이 항구가 진정 폐쇄될 경우, 홍콩과 본토 양쪽 모두에 있는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자본가들의 돈줄은 말라 전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과 노동당은 그렇게 항구가 폐쇄될 경우 언론 - 그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노동자들을 공격할 것이라면서, 파업노동자들에게 [항구 폐쇄에 관한] 법원의 금지 명령을 받아들이라고 수긍시켰다.

이후 노동자들은, 항구 자체를 점거하는 대신, 항구 외부 한쪽 보도에 천막을 치고 진입로 하나의 정면에서 거의 상징적인 봉쇄를 했다. 언론들은 세계적으로 “파업”에 대해 보도했지만 그림자 뒤에서, 이 항구는 평소보다 단지 살짝 느리게 가동됐을 뿐이다. 파업의 하이라이트에서도 이 항구는 여전히 80%의 작업 능력을 보였다. 항구 내 노동자들의 일부만이 조합원이었지만 조직된 노동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방해를 강화하자는 주장은 소외되거나 무시됐다. 보다 젊은 지지자들은 더 많은 노동자들과 접촉하려 했지만 이 노동조합들에서 일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친위대는 이를 열외로 취급했다.

노동조합은 도로변 점거로 인한 사소한 방해도 시민사회의 미각에는 맞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곧 이 천막을 함께 해산하고 허친슨 왬포어 본사가 있는 시내 쳉콩센터 아래에 훨씬 더 작은 농성장을 차렸다. 그때부터, “파업참가”들은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시내 빌딩 앞에 표지판을 든 소수의 사람들로 줄어들었다. 결국, 파업노동자들의 요구는 일부분만이 해결됐고, 노동자 다수는 파업을 손실로 생각했다.

이후 많은 언론매체는 이번 파업에 대해 전례 없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파업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에 대해 어떻게 느꼈는지 질문했을 때, 나이 많은 노동자들은 1997년 반환 이전, 노동당이 존재하지 않고 다수 노조는 불법이었던 당시 두 번의 파업이 이 항구에서 일어났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들 나이든 노동자들은 다른 무엇에 우선해 시민사회의 입맛에 맞춰 호소하도록 밀어붙인 노동조합이나 정당 대표자가 없었던 당시의 파업이 실제로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래서 단순하게 살쾡이 파업에 참가했고 항구의 실제 기능을 마비시켰으며 그렇게 해서 주요한 요구 사항들을 쟁취했다. 비교하자면, 최근의 파업은 암울한 손실이었다3.[3편으로 이어집니다.]


[각주](3) 이 정보는 홍콩 최초 오큐파이 운동에 참가했던 이들 중 파업 초기 며칠 내내 노동자들과 함께 했던 여러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것이다.
[원문]Ultra-com.org
http://libcom.org/blog/black-yellow-hk
[게재]2014년 10월 3일
[번역]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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