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 2017, 예견된 풍랑

[워커스] 경제로 보는 세상


경제위기 발발 10년을 되돌아 본다

올해는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 발발 이후 10년이 되는 해다. 이 위기는 미국 부동산 버블붕괴로 시작해, 2008년 9월 리만브라더스 파산을 계기로 전대미문의 세계적인 금융공황으로 전염됐다. 이 위기에 직면했던 대부분의 나라는 전례 없이 막대한 구제 금융과 함께 각종 경기부양책을 쏟아 냈다. 특히 ‘G20체제’라는 일종의 위기관리기구를 통해 통일적인 태세를 이뤘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Fed)를 중심으로 한 중앙은행들의 국제적인 공조는 각국의 금융위기가 외환위기로 전염되는 걸 차단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후 유럽 재정위기처럼 여러 번의 크고 작은 위기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심각한 붕괴에 이르진 않은 채, 장기적인 침체국면으로 흘러갔다. 한편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대부분의 금융자산 가격들은 원상회복 수준을 넘어 위기 이전보다 더 높아졌고, 기업들의 수익도 위기관리정책의 혜택들로 급격히 개선됐다. 하지만 누구도 세상이 위기 이전으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소위 ‘뉴노멀’(저금리-저성장-저물가)이라 불리는 경제 현상이 새로운 기준이 된 지 오래고, 심각한 소득격차, 인종주의적 갈등, 사회재생산 토대의 붕괴가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양극화된 상태로 10년이 지난 지금, 세계와 한반도는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 위기는 지난 10년간 이어온 위기관리체제 그 자체가 위기에 빠졌음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 유럽의 분열, 동아시아 군사대립 증대가 이를 상징하고 있다. 미국은 실업률이 5% 미만으로 떨어졌건만,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진 게 별로 없다. 실업률 수치를 메운 건 불안정 노동자층이고, 노동자들의 임금은 계속 정체되고 있다. 이런 계급 및 계층 간 사회갈등은 트럼프와 같은 기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자양분이 됐다. 이미 유럽은 수년 전부터 통합유럽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선거 때 마다 극우정치세력들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분열을 촉진하고 있다. 이들은 한때 좌파들이 외쳤던 ‘반세계화’ 구호에다가 민족적 이익을 앞세운 자국민 우선주의를 결합시켜 대중을 파고들고 있다. 프랑스 극우정치인 르펜이 주장하는 ‘세계화주의자 vs 민족주의자’라는 구호가 강력한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이번 10년 위기의 중심지였던 미국과 유럽의 정치적 사회갈등은 쉽게 잦아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런 새로운 위기는 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일본의 재무장을 허용한 미국은 일본을 지렛대 삼아 중국을 견제하고 동아시아에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에게는 아시아에서 지역 패권을 달성하려는 중국과의 마찰이 점점 불가피해졌고,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벌어지는 영토분쟁의 갈등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여기에 한반도 사드배치를 둘러싸고 촉발된 미중갈등은 2017년 한반도를 새로운 위기 양상으로 치닫게 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은 중국과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있으며, 이런 가운데 한반도가 대리전의 전장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2017년 전 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풍랑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세계적인 위기관리 공조체제였던 ‘G20’은 이제 각국 정상들이 사진 찍기 위해 한번 모이는 연례행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심지어 트럼프의 등장으로 올해 G20 공동선언문 초안에 ‘공정한 무역’을 넣었는데, 이것은 대미 흑자국들을 겨냥한 것으로서 미국 주도의 보호무역주의가 부상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위기관리 기구로 등장했던 G20 체제가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반영하는 정치 무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왜소해진 G20체제는 수년 전부터 지속돼 온 구심력의 상실을 보여주고 있다.

2017년 예견된 갈등의 폭발

이제 2017년 세계정세 전망을 살펴보자. 먼저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상황으로 갈지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트럼프가 내세웠던 여러 가지 경제공약들은 적어도 올해는 작동불능 상태에 빠질 것으로 보인다. 첫째, 트럼프와 미국의 주류정치 세력 간의 이전투구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인사들이 러시아와 깊이 연루됐다는 폭로는 연일 트럼프 행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고, 이에 대한 트럼프 진영의 반발은 끊임없는 폭로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폭로전의 무대엔 수년전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위키리크스의 새로운 폭로가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 서로가 봉합될 가능성 없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극한 대립은 트럼프 행정부의 일관된 정책 추진과 의회 내 협상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트럼프의 경제공약 자체에 있다. 감세와 1조 달러대 경기부양을 동시에 주장했던 트럼프는 그 자체가 모순적이다. 그래서 경기부양의 재원을 대폭적인 재정적자 확대를 통해 동원하거나 기업들의 투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 재정적자 확대는 정부부채 한도를 늘리는 문제와 연동되고 세제 개편과 ‘오바마케어’ 축소와도 관련 있어 의회 권력과의 협상을 필요로 한다. 특히 연방정부 부채한도 협상시점과 ‘씨퀘스터’(재정감축) 지연 종료시점이 올해로 다가오는 가운데, 정치세력 간 이전투구로 인해 협상은 시작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 보니 트럼프 정부는 규제완화를 통한 기업들의 투자활성화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지난 금융위기의 교훈으로부터 만들어진 금융개혁법(도트-프랭크 법)마저 무위로 돌리고자 한다. 대형금융기관들, 특히 투자은행들의 투기적 행위(자기자본 거래)를 규제하고자 만든 이 법은 제정 당시부터 월가의 무수한 로비를 받아 후퇴를 거듭했다. 그래서 제정 당시부터 반쪽짜리 금융규제법이라는 혹평까지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마저도 헌신짝처럼 버려질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공화당은 이 법을 애초부터 반대했고, 월가의 로비에 협조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흔적 지우기’와 보여주기 식 성과에 목마른 트럼프의 초조함이 이와 결합한다면 금융개혁의 시계 바늘은 아마도 위기 이전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하지만 금융개혁법은 미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현 글로벌 위기관리체제와 긴밀히 맞물려 있다. 이 법을 바꾸는 것은 국제공조체제인 G20 차원에서 합의한 금융규제의 원칙을 바꾸는 것으로, 영향력은 미국에 그치지 않고 세계 금융환경의 큰 변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 중앙은행 격인 연준의 옐런 의장은 청문회에서 트럼프의 규제완화의 근거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IMF 라가르드 총재도 금융규제를 되돌리려는 시도에 대해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으며, 유럽연합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미 트럼프 식 보호무역주의, 반이민자 정책, 브렉시트에 대한 입장 차이 등으로 갈등이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금융규제법 무력화 시도는 위기관리체제의 한 축을 무너뜨리며 더욱 큰 갈등을 낳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유럽에서 불고 있는 극우정치의 열풍은 올해 예정된 각국의 대형 선거로 그 향배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내세우고 있는 민족경제 부흥 논리는 좌파의 아젠더 마저 잠식하고 있으며, 당선여부에 관계없이 선거를 계기로 대중적 영향을 더욱 넓힐 것이다. 최근 등장한 브렉시트 사태와 트럼프의 등장이 주류 지배질서의 연합 체제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형국인데, 유럽에서 이는 이미 수년 전부터 시작돼 올해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한편 내부적으로 난감한 상황에 처한 트럼프 행정부는 외부로부터 돌파구를 찾으려는 유혹을 더욱 받을 것이다. 특히 트럼프가 보호무역주의 재등장을 예고한 만큼 대미 무역 흑자국들에 대한 압박은 인기관리 차원에서라도 심심치 않게 등장할 것이다. 소위 자의적 판단에 의한 환율조작국 지정은 상대국과의 마찰과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특히 대미 흑자국 중 하나인 중국과의 무역 갈등이 더욱 심화될 경우, 그 파장은 현재 군사적 갈등으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는 남중국해와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중간 전략적인 경제 협력 관계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겠지만, 올해 가을 중국공산당 당대회를 앞두고 정치 외교적 성과를 지키기 위한 시진핑 지도부의 노력과 트럼프의 강경 드라이브가 충돌할 가능성은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적어도 올 한 해 동안은 서로의 탐색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대리전 양상이 한반도를 비롯한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특히 북핵문제와 대륙 간 탄도 미사일 문제에 대응해야 하는 미국이 내세운 카드인 한반도 사드배치 문제는 오랜 기간 동안 갈등의 고리로 작동할 것이다.

풍랑 속에 갇힌 한국경제

이런 가운데 한국이 직면한 위기가 한 둘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드배치 문제로 인한 중국과의 경제 갈등,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한 가계부채 위기, 조선업을 비롯한 대규모 기간산업의 장기침체 등등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매우 짙다. 당장 무슨 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 식으로 풍파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 모든 문제들이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계부채 문제는 속성상 한 번에 크게 터지는 게 아니라, 일본의 사례처럼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점증적으로 터질 것이고, 그 수습은 개인들이 각자 감당하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오랫 동안 치유되지 못한 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위기를 짊어질 주체는 사실 국가(정부) 밖에 없다. 기업들에게 세금을 더 걷는 방식이나, 그들에게 일자리 창출을 주문하는 정도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국가가 직접 돈을 써야 하고, 그 돈이 대중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정책을 설계하고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작년 IMF가 권고한 것처럼, 경상수지 흑자국, 외환보유고 세계 6번째, 정부부채 비율(GDP대비) 40% (매우 낮은) 수준인 한국의 상황에서 이 위기를 타계할 주체는 사실상 국가 밖에 없다. 자기 살길 바쁜 대기업들에게 계속 머리를 조아려봐야 허망한 일이다. 문제는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있다. 재원 마련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누구에게 어떻게 돈을 배분할지 정하는 것이다. 5월 대선에서 집권할 새 행정부가 풍랑 속에 갇힌 한국경제에 마지막 실탄을 어떻게 쏠지, 그리고 그 실탄이 위기에 처한 가난한 민중의 빈 호주머니를 얼마나 채워줄 수 있을지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그런 결단을 내릴 준비와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의례 눈감고 속아줄 만한 아량이 이젠 사람들에게 털끝만큼도 없음을 집권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워커스 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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