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블랙팬서

[워커스] 힙합과 급진주의

  블랙팬서 기관지에 실린 엘드리지 클리버와 김일성
https://apjjf.org/2015/13/12/Benjamin-Young/4303.html

“난 마오쩌둥을 읽지.” 힙합 듀오 데드 프레즈는 1998년 발표한 곡 ‘These Are the Times’에서 그저 각운을 맞추기 위해 중국 공산당 지도자를 불러낸 것이 아니었다. 뮤직비디오에선 체 게바라, 마오쩌둥, 김일성의 사진이 지나갔고, 앨범 카세트테이프의 새빨간 디자인은 명백히 ‘마오 주석 어록’ 소책자를 연상시켰다. 이들은 분명 진지했다. “난 마오 주석, 맬컴, 마우마우를 공부하지(‘Together’ 중)”라는 구절은 이들이 미국의 흑인 민족주의자, 영국령 케냐의 흑인 봉기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혁명가로부터 영감을 얻고 있음을 다시 드러냈다.

마오쩌둥을 언급한 힙합 뮤지션은 데드 프레즈가 처음이 아니었다. 퍼블릭 에너미의 멤버 프로페서 그리프는 1990년 발표한 ‘흑인의 사의(It's A Blax Thanx)’라는 곡에서 마틴 루터 킹부터 피델 카스트로, 마이클 조던에 이르기까지 흑인의 권리에 기여했다고 생각한 수많은 이름들을 나열하면서 그 맨 앞에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이름을 올렸다. 1990년대 중반 감각적인 재즈 랩으로 인기를 끈 그룹 디거블 플래니츠의 멤버 버터플라이 역시 “난 마오 주석을 공부하지(‘Borough Check’)”라거나, “넌 내 아버지에게 마오 주석 동지에 대해 물어볼 수 있어(‘Appointment at the Fat Clinic’)” 같은 가사를 쓴 바 있다.

이 힙합 뮤지션들과 마오쩌둥 사이의 연결고리는 바로 ‘블랙팬서당’이다. 버터플라이의 부모는 블랙팬서 당원이었고, 흑인 민족주의의 영향이 곳곳에서 드러난 디거블 플래니츠의 두 번째 앨범 표지는 블랙팬서당의 기관지 디자인을 흉내 낸 것이었다. 퍼블릭 에너미는 급진적인 가사뿐 아니라 패션으로도 블랙팬서를 계승했다. 데드 프레즈의 멤버 엠원은 블랙팬서당처럼 국제적 사회주의 흑인 운동을 지향하는 단체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다. 블랙팬서당의 혁명가들이
마오쩌둥의 사상에 매료된 것처럼 수많은 힙합 뮤지션들은 블랙팬서당의 정신을 자신의 음악적 원천으로 삼았다. 따라서 진지하게 블랙팬서당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뮤지션들이 마오쩌둥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흑인 운동이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것만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적어도 20세기 미국의 흑인 운동은 꾸준히 동아시아의 상황에 주목해 왔다. 아시아의 역사로부터 배우려 하거나 아시아의 민중들과 자신들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연대 의식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흑인들은 오랫동안 일본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유색인들도 백인을 이길 수 있다는 간단하면서도 불가능해 보였던 사실을 증명했다. 온건한 개선을 주장한 부커 워싱턴, 완전한 인종 평등을 주장한 시민권 운동가 두보이스, 흑인 민족주의자 마커스 가비처럼 서로 대립한 흑인 지도자들도 일본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견해가 일치했다. 흑인 대중 역시 일본인을 ‘유색인종의 투사’로 보는 등 호의적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일본의 우익단체인 흑룡회 출신의 예비역 육군 소령 사토타카 다카하시가 디트로이트에서 친일본 흑인 단체를 조직해 상당한 세를 불리고, 흑인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더 이상 모범이 될 수 없었다. 대신 막 태어난 중화인민공화국이 미국 흑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제공했다. 미국의 흑인들은 이제 제3세계의 운명에 감정을 이입했고, 미국과 대등하게 싸우고 핵무기까지 개발하며 자력으로 발전해 나가는 중국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오쩌둥이나 중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미국 흑인 운동을 포함한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지지해 온 사실도 급진적인 미국 흑인들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 1959년 노회한 사회주의자 두보이스는 마오쩌둥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해 여성 권리 신장을 포함한 중국의 발전상에 감명 받았고, ‘잠자는 거인’ 중국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유색인종의 세계적 투쟁에서 선봉에 설 것으로 기대했다. 시민권 운동가 로버트 윌리엄스는 1960년대 내내 쿠바와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여러 글을 발표하고 미국 최초의 마오주의 흑인 운동인 혁명적행동운동(RAM)을 이끌었는데, 그의 활동들은 휴이 뉴턴을 비롯한 젊은 혁명가들이 블랙팬서당을 결성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마오쩌둥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휴이 뉴턴이 1970년 중국을 방문해 크게 환영받고 “생애 처음으로 완전한 자유를 느낍니다”라는 소감을 남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반도의 정치 상황 역시 미국 흑인들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맬컴 엑스는 1960년 친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서울의 학생들을 추켜세우며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흑인 급진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주목한 것은 남한의 민중운동이 아니라 북한이었다. 1968년부터 망명 생활을 하던 블랙팬서당의 지도부 엘드리지 클리버는 알제리에서 북한 외교관들과 접촉하며 한반도의 역사를 접했고, 1969년과 1970년 동료들과 함께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해 환대받았다. 북한에 ‘사회주의 낙원’이라는 평가를 내린 체 게바라처럼 클리버가 보기에 북한은 의식주나 불평등, 범죄 문제가 없는 완벽한 사회였다. 그는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김일성을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원리들을 추종하는 대신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적용시킨 창조적인 인물로 보았고,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 역시 북한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부터 ‘주체’라는 김일성의 매력적인 사상은 미국의 블랙팬서 기관지에 수차례 보도돼 주목을 끌었다. 평양에서 태어난 클리버 부부의 딸에게 김일성의 처 김성애는 주체 조선의 여자아이라는 의미를 담아 ‘조주 영희’라는 이름을 선사했고, 김일성은 아이의 대부가 됐다.

미국의 흑인들은 일본의 군사력과 경제적 발전상, 혁명 중국의 역동성, 북한의 독자적인 행보에 주목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착취나 중국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의 희생, 북한 정권의 경직성과 개인숭배 같은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거나 알려지지도 않았다. 동아시아로부터 영향 받은 급진적인 흑인 운동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국제 혁명가 엘드리지 클리버는 1975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통일교를 비롯한 종교에 심취하며 공화당 지지자로 변신했다. 블랙팬서당은 1982년 해산했고, 휴이 뉴턴은 이후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힙합 뮤지션들은 끊임없이 블랙팬서의 이름을 불러내고 있다. 경찰의 총격으로 흑인의 생명이 위협받는 이상 흑인의 자기방어를 위해 일어선 선배들의 주장에 여전히 배울 것이 많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데드 프레즈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거리에서는 나이든 세대들이 블랙 파워 노래들을 불렀고 난 파농과 마오 주석을 읽고 있었지. 그것들로 내가 지금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있도록 말이야.”(‘Panthers’ 중)[워커스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