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것? 뭔가 ‘언밸런스’하면서도 ‘매치’가 잘 된 것?

[워커스] 송창은, 「현대 한국어의 영어화 변이 현상에 대한 중국 동포와 북한이탈주민의 언어 태도 및 언어 정체성 비교 연구」, 서강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한국적인 영화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책세상, 2008)이란 책이 ‘한국적인 것’에 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지 10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서편제>나 <왕의 남자> 같은 영화를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우리는 알량한 안도감(‘한국적인 게 세계적인 것이야’)과 투어리즘(‘와우, 코리아 뷰티풀’) 외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들에 집착하는 걸까. 한, 흥, 신명, 곡선…. 한국적이라 배워왔던 그런 가치들 말이다.

오늘 글에서는 논문 자체를 요약하고 저자의 문제의식을 소개하기보다는, 거기서 특정한 한 가지 논점을 잡아 집중해보고자 한다. 달을 가리킬 때는 달에 주목해야 하는 게 강호의 도리겠지만, 때로는 달에 묻은 얼룩을 흥미로워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발상이라 보면 되겠다. 즉, 이번 논문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고정관념의 실체를 밝히는 것도,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진정으로 한국적인 것인지를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알던 상식을 깨는 데 굉장한 힌트를 주는 논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송창은의 석사학위논문 「현대 한국어의 영어화 변이 현상에 대한 중국 동포와 북한 이탈주민의 언어 태도 및 언어 정체성 비교 연구」는 ‘영어화 되는 한국어’와 ‘한자어와 융합한 한국어’, 그리고 이런 한국어에 대한 ‘북한이탈주민’과 ‘중국동포 이주민’들의 반응을 연구한 사회언어학 연구물이다. 쉽게 말하자면, “너무 디테일하게 데코하고 뭔가 언밸런스하면서도 매치가 잘 되는 느낌?”이라고 했을 때, 북한이탈주민이나 중국동포 이주민들이 어떤 생각이 들겠냐는 것이다.

일단 내 마음대로 썰을 풀더라도 저자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하니 논문 전체를 세 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북한이탈주민이든 중국동포든 누군가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 쓰면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처럼 본다. ‘뭔가 있어 보이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2. 그렇지만 그렇게 영어를 섞어 쓰면 위화감이나 거부감이 들 수 있다. ‘조선 사람이 조선말을 쓸 것이지’라는 생각일 것이다. 특히 중국동포들은 한국인이 (한자를 혼용해서 쓰면 친밀감을 느끼는 데 반해) 영어를 쓰면 위화감을 크게 드러낸다. 반면 북한이탈주민은 중국동포들에 비해 영어를 섞어 쓰는 한국인에 상대적으로 호감을 보이는 편인데, 특히 이런 호감은 젊은 사람들일수록 자주 나타나는 태도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을수록 영어에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3. 어쨌든, 한국에서 살려면 결국 적응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하지만 언젠가는 자신들도 이런 말들에 익숙해지고 또 실제로 사용을 해야 한다. “좀 있다 미팅 때 컨펌 받자고!” 같은 말들. 저자 송창은은 이런 과정을 초기의 언어적 불안정성을 전략적 언어정체성 형성을 통해 해소하는 경향이라고 분석한다.


세종대왕 게임이라는 게 있다. 여럿이 모였을 때 누군가 영어를 섞어 말하면 벌칙을 받는 게임이다. 이를테면 “자, 이제 게임 시작!”이라고 하면 ‘게임’이란 말을 썼으므로 바로 벌주를 마신다든가 하는 게임이다. 그런데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게임이 생각보다 어렵다. 벌주가 난무할 지경이 된다. 심지어 나중에는 벌주를 피하려고 모두가 침묵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만큼 현대 한국어에서 영어를 배제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순수 한국어주의자들에게는 유감이지만 콩글리쉬 없는 한국어, 외래어 없는 한국어는 상상하기 힘들다. 이런 사례들은 심지어 탁석산조차 가장 의심할 수 없는 한국 고유의 것으로 거론하는 한국어조차도 사실은 언제나 ‘형질 변환’ 중이라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순수 한국어주의자들은 오뎅과 시마이를 어묵과 마감으로 ‘순화’해야 한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어묵이나 마감에는 한자어가 있으니까 중국말에서 왔다고 봐야 하지 않나? 그래서인지 근본주의자들은 그런 말들조차 아예 ‘순우리말’로 바꿔야 한다고 한다.

아마 이런 생각 때문일 것이다. 순우리말을 쓰는 것이 바른 언어 습관이고 그렇게 해야만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 영어나 일본어에 ‘오염’되지 않은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한자어로부터도 독립적인) 한국어야말로 한국적이라는 논리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송창은의 논문을 통해 (사실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이런 상식에 맞설 만한 어마어마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가 인터뷰했던 어느 중국동포 연구참여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2년 정도 지나니까, 그 때부터는 적응해서 괜찮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어요.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것(영어화된 한국어) 거의 다 알아듣고요…. 아, 이젠 한국사람 다 된 거 같고. 하하하.”

여전히 우리들 대다수는 TV에 나오는 외국인들이 김치를 우적우적 씹어먹을 때 한국사람 같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들은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현상처럼 보이는 ‘영어화된 한국어’를 용케 알아듣거나 능숙히 구사할 때 비로소 자신이 한국인이 된 것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들이 알려주는 ‘한국적인 것’ 말이다.

잘 생각해보면 이런 이야기들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인들이 상상하는 한국적인 것과 외부인이 관찰하는 한국적인 것 사이에는 다소간 괴리가 있을 수 있다. 둘째, 우리가 학습해서 내면화한 한국적인 것에 관한 믿음은 사실 허구일지 모른다. 셋째, 진짜로 한국적인 것은 애초부터 고정적이고 순수한 실체로 존재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무수한 것들이 서로 마주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사회언어학적으로) 송창은은 콩글리쉬가 난무하는 한국에서 이주민들이 전략적으로 언어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주목한 것인데 이것은 기실 놀라운 역설을 발견한 셈이기도 하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이렇다. (언어사회학적으로) 송창은은 이주민들이 영어화된 한국어를 수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하이브리드’로 가득한 한국적인 것의 구성에 마침표를 찍어낸다는 사실을 발견해낸 것이다(어쩌면 이런 발칙한 발상으로부터 논문을 준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0년대 중반이던가, 영화이론가들이 모여 내셔널필름에 관해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자연히 <서편제>류를 떠올리겠지만 이들은 오히려 <올드보이>를 가장 한국적인 영화로 꼽았다고 한다. 대체 무슨 까닭에서일까. 이번에는 독자 여러분들이 직접 추론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워커스 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