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하청 기계들 속에서의 삶

[워커스] 기술문화비평

  고 김용균 씨가 작업 현장에서 직접 촬영했던 컨베이어벨트 [출처: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잘린 손가락 바라보면서 소주 한잔 마시는 밤
덜걱덜걱 기계소리 귓가에 남아 하늘 바라보았네 (…)
자동기계들 색색거리는 이 라인 저 라인 홀로계신
우리 엄마도 이 내 젊음도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다
돌아가누나


90년대 초반 이후 다시는 듣거나 부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노래들을 최근 다시 듣게 됐다. 민중가요 작사·작곡가인 김호철의 파업가 30년을 기념하고 그에게 헌정하는 음반을 통해서다. 이 음반의 제작을 후원하고 리워드로 CD 음반을 받았는데, 80년대부터 이어진 현장 노동자 투쟁의 정서가 순식간에 음악을 통해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 정서는 너무 낯설기만 했다. 심지어 이 CD라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장치를 찾기에도 여의치 않을 만큼 시대는 많이 변했다. ‘잘린 손가락’과 ‘컨베이어 벨트’는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낡은 산업 시대의 유령 혹은 유물처럼 보였다. 아니 들렸다. 기계에 잘린 손가락을 어딘가에 묻고 돌아오는, 어두운 밤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떠나보내는 젊은 노동자의 축 처진 어깨 같은 이미지는 지금의 21세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유령에 대한 기억을 모두가 잊었을 때, 그것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생각조차 잊었을 때,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음을 혹은 되돌아왔음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준다. 올해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의 연료공급용 컨베이어 벨트 사고로 숨진 김용균 씨도, 지난 2016년 서울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몸이 끼어 사망한 김 군도 그 유령의 희생자다. 이 유령은 그저 단순 반복 작업을 하는 노동과정 혹은 아무도 하지 않으려 드는 힘든 육체노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업장이나 기계 장치의 작동에 있어서 노동자에게 특별한 위험이 존재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 유령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맹목적 효율성의 추구가 빚어내는 인간성에 대한 망각이다. 기계작동의 효율성을 위해 인간 노동과 삶의 가치를 모조리 부정하는 도구적 효율성 속에서 불현듯 으스스하게 나타나는 그 어떤 저주다.

20세기 초 컨베이어 벨트가 발명되고 가장 먼저 사용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석탄 광산이었다. 생각해보면 광부들이 캐낸 석탄을 손수레에 퍼 넣고 좁은 갱도에서 밀고 나오는 것보다 얼마나 안전하고 효율적인 방식이었을지 알 수 있다. 캐낸 석탄을 퍼 담아 올려놓기만 하면 기계가 저절로 갱도 바깥까지 옮겨주니 광산 노동자에겐 구세주 같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머지않아 그 유명한 헨리 포드가 자동차 조립 공장 설비에 컨베이어 벨트를 도입한다.

이제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자의 힘을 절약하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끊임없이 일거리를 가져다주는 도구가 됐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기계의 리듬에 맞춰 노동자의 몸이 움직여야만 했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어떻게 컨베이어 벨트의 기계적인 운동이 인간의 고유한 움직임을 규정하고 포섭하고 명령하는지를 코믹하지만 서글프게 보여줬다. 심지어 기계 속에 빨려 들어가 그 기계의 먹이가 된 듯한 장면은 공장의 기계장치와 인간의 교합이 만들어내는 미적 앙상블 때문에 숨이 멎는 경험을 주기도 했다.

위험이 외주화된 공장과 삶이 하청된 작업장들

많은 노동자가 단지 그 기계장치에 깃든 유령 때문에 희생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끊임없이 정상적인 삶의 바깥으로 밀어내고 비정규화하고 외주화함으로써 값싼 목숨으로 만들어버리는 악순환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무수히 가지친 하청의 하청 과정에서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 삶의 가치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온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가 있다. 점점 바깥으로 내몰아 인간의 삶을 쓰레기로 만들어 온 정치경제적 제도의 역사가 있다. 그 인간의 탈을 쓴 제도의 역사는 흔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자꾸만 노동자의, 아니 인간의 삶 자체를 불안정의 영역으로 내몬다.

하청과 외주화로 값싸게 매겨진 청년들의, 단순노동자들의,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은 그 유령에 대한 두려움과 위험, 불안함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하지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무도 그 안전과 안녕을 책임지지 않는 그 값싼 목숨은 사고나 재해를 가장한 살인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비정규직이라고 해서 삶조차 비정규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안전의무 규정 위반으로 혹은 과실치사 혐의로 회사의 잘못을 판결하고 죗값을 묻는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삶과 노동의 가치는 점점 값싸게 매겨지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위험과 불안의 영역으로 내몰리고 있다. 사회 전체의 반성을 통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어 효율적으로 나르기 위해 고안된 그 기계장치가, 여전히 발전소에서 석탄을 태우고 나르며 에너지를 생산하고 있다. 21세기의 공장과 작업장이, 혹은 석탄 발전소의 컨베이어 벨트가 집어삼키고 태우고 있는 것은 그저 화석 연료만은 아니다. 거기에 자신의 삶이 외주화되고 하청된 사람들이 있다. 위험이 외주화된 공장과 삶이 하청화된 작업장들을 당장 멈추고 제발 거기 누가 있는지 살펴라. 그들을 보살펴라. 사회가 그들의 삶을 책임져라.[워커스 50호]